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태어난 나는 초가지붕이 있던 시절로부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급격한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세대다. 어릴 때 시작된 개발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붕개량이 이어졌고 마을마다 새 마을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항시 바라보이던 건 산업혁명 후의 엔크로우저 운동처럼 도시의 지평이 넓어지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놀이터는 항시 도시와 농촌의 경계였다. 그곳엔 항시 쓰레기를 버린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고 도시에서 버려진 각종 쓰레기들을 뒤집으면서 불을 피우곤 했다.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한 건 칠십년대부터였다. 양조장, 양옥집, 그리고 새로 들어서는 교회와 아파트들까지 그 경계를 보면서 우린 학교를 다녔다.
언덕 위에 세워진 삼학아파트, 오층짜리 건물이 어찌나 높아 보이던지, 남중 앞 느티나무 옆으로 들어서던 나운아파트의 늘어선 품 사이에서 우리는 주먹 야구를 하고 테니스 공을 주우러 아파트 사이를 뛰어다녔다. 월명산 자락을 가리면서 드러선 월명아파트의 위용은 도시의 변화를 예고하는 듯 보였다. 언덕을 따라 올망졸망하던 형무소 고개의 무덤들이나 서낭당 고개 자락의 양지바른 햇살이 사라지고, 그곳엔 형무소의 서릿발 대신 따뜻한 햇살이 아파트를 감싸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이어져 가던 아파트는 급기야 나운동에 대단위의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내며 팔십년대 개발의 붐을 일으키고 말았다. 기존의 구도시는 퇴락하고 신흥의 나운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건 어디 군산의 일만이랴. 서울에서도 중동의 건설 붐과 함께 반포지역을 시작으로 서서히 불어닥친 개발의 바람은 드셌다. 압구정 신사, 그리고 말죽거리에 이르기까지 들불처럼 번져가던 개발의 이익은 수없이 많은 서울 부자를 낳았다. 부동산 거품과 함께 개발의 시대를 지켜봤던 세대로서 우리는 항시 변화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코에 숱검정을 뭍이면서 벽돌 사이에서 감자를 구워 먹던 어린 시절처럼 우리는 도시의 변두리를 서성이면서 껌종이와 병뚜껑 누른 장난감을 찾아 다녔다. 공터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와이셔츠의 양니로 도리를 치던 시절, 김일의 레스링과 박치기를 보고 자랐고 만화방의 오뎅과 빛바랜 고행석류의 만화를 뒤적이지 않았던가.
문득 같은 세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런 공감을 나누면서 이 글을 적어 보았다. 어쩌면 조립식 학교 담장에 적혀 있던 방공방첩, 첫 째도 힘, 둘 째도 힘, 셋째도 힘이라고 하던 그 글귀처럼이나 도시화의 첨병처럼 숨가쁜 달리기를 해 온 느낌이 든다. 그 빠른 변화 앞에서 수없이 혼돈을 느끼면서도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이런 성장배경에서 오는 것이리라. 문득 도심의 빌딩 사이를 걷다가 그 안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런 변화의 가장자리에서 날카롭게 무언가에 찔리듯 협살을 당하는 기분과 같으리라. 그 변화는 구도시와 신도시를 판이한 세대차이처럼 갈라 놓았고 그 안에서 이전의 추억과 함께 변한 세상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혼돈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 그 개발의 변두리에서 다시금 더 멀리 도시 바깥으로 떠나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리라.
그렇게 어느 날에 보니, 자신은 아파트 사이에 늘어선 네온의 불빛들 사이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십이층 아파트에 누워서 떠다니는 어둠 속 구름을 잡으려는 듯 잠에 빠져 있었다.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려치는 아파트 사이로 흰 호랑이가 걸어가는 날에도 우리는 이 도시가 우리에게 급작히 찾아와 사람 위에 사람을 살게 하고, 또 집으로 가는 길 먼 술길을 만들어 놓은 그 포연의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양조장이 지어질 때부터 알아봤어. 아파트와 술집이 어울어지게 될 도시의 운명을... 코스모스 피고 조가비 날리던 들길 자리엔 빽빽히 아파트의 불빛들이 거대한 타이타닉처럼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