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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9년 썼던 글입니다. 예술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작성한 글인데 다시 옮깁니다.
전에 어떤 분이 블로그에서 구글이 도서관 노릇을 한다고 쓴 글을 보았다. 사실 나도 구글을 잘 이용한다. 그러나 구글은 검색기능을 가진 것일 뿐 웹상에 많은 문서가 올라와 있기 때문에 웹이 실제 도서관이고 구글은 도서관을 집에서 이용할 수 있는 문지기 역할을 하여 주는 것이다.
우연히 '잭 런던(Jack London)'이라는 작가를 찾아 보게 되었다. 위 사진의 인물이다. 1876-1916년 즉 만 40에 요절한 미국의 작가이다. 나하고 연계되는 점은 잭 런던이 버클리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졸업은 못한 것이다. 고참 대학 선배가 될 뻔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이제 저작권이 만료가 되어 영문 원본은 웹상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내가 버클리에 유학중에(1982-1989) 19세기 말의 대학 사진을 본관에서 본 적이 있다. 지금은 버클리 대학부근이 도시로 개발되어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그 시절에는 대학부근은 훵한 들판이었다.
그 때 학생들 사진을 보니 올빽에 카이저 콧수염을 기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20대의 학생들이 지금으로 보면 40은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시에도 버클리 대학은 캘리포니아의 명문대학으로 역대 주지사 등이 버클리 대학 졸업생이 많다고 한다.
그럼 다시 잭 런던으로 돌아 가 보자. 잭 런던은 흔히 사생아라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 친부가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계부하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잭 런던의 어머니 플로라 웰만(Flora Wellman)은 음악 선생이면서도 인디안 추장의 혼과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심령술사 또는 영매(spiritualist)였다. 플로라 웰만은 점성가인 윌리엄 채니(William Chaney)하고 관계에서 아이를 가졌으나 윌리엄 채니는 낙태할 것을 주장하였다. 플로라 웰만이 거절하자 윌리엄 채니는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플로라 웰만의 이야기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금도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보는 신문이다)에 기사로 나왔었다.
플로라 웰만은 낙심하여 총으로 자살 시도를 하였으나 중상을 입고도 살아 났다. 처음에 잭 런던은 흑인 하녀가 기르다, 나중에 플로라 웰만이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하였던 상이군인이었던 죤 런던하고 결혼한 후 잭 런던은 계부와 자기 친모하고 살게 되었고 런던이라는 성도 가지게 된 것이다.
잭 런던은 버클리 대학에 들어간 후 신문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자기 친모의 자살 시도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래서 생부라고 생각한 생각한 당시 시카고에 살고 있는 존 채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존 채니는 자기는 발기부전으로 잭 런던의 친부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플로라 웰만이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를 많이 가졌으며, 자신이 낙태를 고집하였다는 것도 모함이라는 뜻의 답을 하였다.
만21세의 나이에 위와 같은 답신 내용에 충격을 받고 잭 런던은 버클리를 중퇴한다.
그러나 전기학자들은 죤 채니가 잭 런던의 생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 죤 채니의 글 중에 플로라 웰만을 자기 전부인이라고 쓴 내용도 있고 플로라 웰만이 자신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 '플로라 웰만 채니'로 부른 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만약 전기학자들의 의견이 맞을 경우 잭 런던의 친부의 비열한 거짓말은 한 젊은이를 절망에 빠지게 하여 대학을 중퇴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과 방황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문학사의 독특한 작가인 잭 런던의 작품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잭 런던은 1897년 대학을 떠나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열풍이 불던 골드 러시 즉 금광 찾기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금광에서 막 노동을 한 경험으로부터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898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돌아 와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자기 글을 출판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인쇄기술의 발전으로 잡지들이 많이 생기면서 나아지기 시작했다.
1903년 '황야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는 잡지에 기고되었다가 미국의 유명한 출판사인 맥밀란이 출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위 작품은 미국 고전 소설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잭 런던이 죽기전에 살던 집으로서 지금 주립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작품을 써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게 되고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 북쪽으로 해안에 가까운 소노마 카운티라는 곳에 4평방킬로미터의 넓은 방목지를 구입하여 저택을 건축한다. 그는 이 집에 대해 자기 처 다음으로 아끼는 것이라고 애착을 가지고 죽기전까지 살게 된다. 그는 위 넓은 땅에서 새로운 농법 등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경영에는 재주가 없었다고 후세의 비평가들은 이야기 한다..
지금 잭 런던의 저택은 '미국 역사 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있고 현재 '잭 런던 캘리포니아 주립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견해가 전에 많았는데 사망보고서에는 신장 결석으로 인한 신부전으로 사망원인이 나와 있다. 최근에는 자연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신장 결석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복용하였는데 과다 복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의 소설중에 잔인한 자살 등의 장면이 많고 잭 런던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바람둥이였다는 평이 많아 극적인 자살설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전기를 연구한 사람은 잭 런던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인세 수입으로 풍족하였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신의 넓은 저택을 만족해 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살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기에 살았다. 그러나 금광에서 직접 노동을 한 경험에서 비교적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많이 가졌다.
그는 1896년 사회노동당(Socialist Labor Party)를 가입하였고 그 후에도 미국 사회주의 운동에 많이 참여하고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는 짧은 글에서 설명된 것처럼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 사회의 바닥에서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 바탕이 되었다. 그 영향이 나온 소설이 '쇠 말꿉(Iron Heel)'이다.
그는 러일전쟁에 기자의 역할로 일본과 한국을 다녀가 본 바 있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는 그 관습이나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에 대해 아주 험한 편견을 가진 글을 썼다. '황색 위험(Yellow Peril)'에서 "한국사람은 무능력과 철저히 가치 없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중국사람은 근면의 상징으로 겁쟁이가 아니다. 반면에 일본 사람을 갈색인종이라고 부르면서 일본 사람 자체는 서양에 위협이 되지 아니하나 갈색인종인 일본사람이 4억의 황인종을 지도할 경우 황인종들은 서양세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혹시 오해가 있을가 보아 원문을 밑에 같이 첨부한다.
"The Korean is the perfect type of inefficiency—of utter worthlessness. The Chinese is the perfect type of industry"; "The Chinese is no coward"; "[The Japanese] would not of himself constitute a Brown Peril …. The menace to the Western world lies, not in the little brown man; but in the four hundred millions of yellow men should the little brown man undertake their management."
그런데 그를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그의 단편소설중에 멕시칸, 아시안, 하와이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섞인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위 '황색의 위험'이라는 글 말미에서 "위와 같이 주장한 것은 서양인종의 자만심에 인한 것도 있다. 즉 우리만이 정직하다는 생각은 인종에 대한 편견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하여 좀 앞뒤가 모순된 내용이 있다. 그 말미의 원문도 밑에 그대도 옮겨져 있다.
"it must be taken into consideration that the above postulate is itself a product of Western race-egotism, urged by our belief in our own righteousness and fostered by a faith in ourselves which may be as erroneous as are most fond race fancies."
이제 정리를 좀 해 볼 필요가 있다.
잭 런던은 계부가 상이군인으로서 경제적으로 넉넉치 아니한 과정에서 당시 버클리에 입학한 것을 보면 똑똑하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으로 더 깊은 사고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당시 미국 자본주의가 커 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바닥에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성공하여 부를 얻자. 4평방킬로미터라는 넓은 땅에 저택을 건축하고 만족을 하였다. 나는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의 정의를 위해 부의 분배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부에 대한 만족은 똑같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에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생물이나 인간의 본성은 씨를 많이 뿌리고(남자는 바람둥이이고) 여자에게 능력을 보이기 위해 부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결론이다.. 잭 런던의 일생도 그러한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황인종에 대한 모순된 견해에 대한 배경을 생각해 보자. 그는 골드러시 당시 중국인들의 끊질긴 생명력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인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리를 잡아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차이나 타운을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상업적인 경제력도 크게 가지고 있다.
반면 러일전쟁 중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본 서양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 군을 격파한 것을 보고 경탄한 것 같다. 그리고 일본사람들 나름의 깔끔함에도 호감을 가진 것 같다.
한국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중 방문하면서 무기력하고 모순된 것을 많이 본 것 같다. 한국 사람은 완전히 쓸모 없는 존재라고 평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쁘게 생각하기 보다는 조선왕조 말기에 우리의 상황을 뒤돌아 보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능하지는 않지만 만약 지금 잭 런던이 우리나라를 다시 방문하면 아마 놀라 자빠져서 위 글에서 한국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정중하게 사과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해 자만하기는 이르다. 외국에 나오면 한국인의 존재나 브랜드 가치가 아직 크지 아니하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모든 국민이 더 노력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