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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눈부심, 사유의 웅숭깊음으로 건너다
— 내가 생각하는 예술 디카시의 격(格)
나병훈/ 문학평론가
I. 서론
디카시, 사진의 재진술을 넘어선
사유의 도약
내가 생각하는 예술 디카시란 단순한 ‘영상과 텍스트의 상투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각적 포착(사진)이라는 찰나의 눈부심을, 언어적 절제(문자)를 통해 웅숭깊은 사유의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미학적 반전의 예술’이다. 오늘날 수많은 디카시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물의 표피를 받아 적는 일차원적 타성과 과도한 감정의 탐닉에 깊이 빠져 있다. 진정한 예술 디카시는 렌즈가 포착한 가시적 피사체와 찰나의 순간을 딛고 일어서, 우주적·철학적 사유로 껑충 도약할 때 비로소 그 독자적인 격(格)을 획득한다.
오늘날 한국 디카시 문단이 경계해야 할 가장 결정적인 미학적 오답은 바로 ‘상투적 감상(Cliché)’과 ‘청승맞은 연민(Melodramatic Pity)’이라는 두 가지 함정이다. 우선 ‘상투적 감상’이란 시인이 렌즈에 포착된 피사체를 보고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뻔한 감정과 수식을 감각 없이 덧붙이는 사유의 게으름이다. 사진 속에 시든 꽃이 있으면 "너도 나처럼 시들어 가는구나", 굽은 나무가 있으면 "어머니의 굽은 등처럼 아프다"라고 일차원적으로 재진술(Redundancy)하는 태도는 사진이 보여주는 시각 정보를 지루하게 반복할 뿐이다. 텍스트 내부에 어떠한 긴장(Tension)이나 ‘낯설게 하기’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이러한 죽은 언어는 피사체를 생동하는 존재가 아닌 박제된 기록물로 전락시킨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승맞은 연민’의 철학적 오류다. 이는 주관적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사물이 가진 실존적 숭고함을 시인의 값싼 동정표로 깎아내리는 감정의 과잉(Sentimentalism)이다. 감정을 언어로 절제하거나 사유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신세타령이나 눈물을 직접 토해내는 태도는 독자에게 사유의 여백을 빼앗고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의 굽은 등이나 부두에 쌓인 빈 소라 껍데기는 그 자체로 오랜 세월을 견뎌낸 생명의 흔적이자 숭고한 실존의 현장이다. 그러나 시인이 이를 단지 "불쌍하다", "가엾다", "애달프다"라는 앙상한 연민으로 다룰 때, 피사체는 존엄한 주체성을 잃고 시인의 감상놀이를 위한 '불쌍한 타자(Othering)'로 훼손되고 만다.
결국 텍스트 내부의 유기적 구조와 언어적 긴장감, 그리고 반어(Irony)와 역설(Paradox)의 메커니즘을 중시하는 신비평(New Criticism)의 관점은 이러한 상투성과 연민을 벼려내는 가장 날카로운 시선이 된다. 시각과 문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만들어내는 텍스트 내부의 긴장이야말로 디카시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핵심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 정교한 신비평적 긴장감의 이면에는 동양적 사유의 정수인 노장(老莊)의 철학적 미학이 내재해 있다. 노자가 말한 비움의 쓸모, 즉 ‘공(空)’과 ‘무(無)’의 역설은 채워진 것(有)만을 가치 있게 여겨온 현대 문명의 직선적 효율성에 거대한 균열을 낸다. 장자(莊子)가 설파한 ‘무용지용(無用之用)’—세상의 기준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숭고함—의 세계는 피사체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을 넘어 존재의 존엄을 되찾아준다.
본 평설은 이러한 필자의 시학적 프레임을 바탕으로, ‘상투적 감상’과 ‘청승맞은 연민’을 완벽히 격파하고 현대적 구조미와 동양적 사유를 눈부시게 결합해낸 세 편의 문제작을 주목하고자 한다. 알맹이가 떠난 소라 껍데기의 빈 구멍에서 도리어 격정적인 그리움의 통곡을 길어 올린 유레아의 「떠났어도」와, 반듯한 직선의 문명 위에서 가장 낮은 곡선의 자세로 우주적 생명력을 뿜어내는 나병훈의 「굽은 生」, 그리고 인간의 건축과 대자연이 어떻게 하나의 호흡으로 유무상생하는지를 보여주는 「토루(土樓)」가 그것이다.
II. 본론
1. 「떠났어도」
— 부재(不在)의 공명통이 들려주는 존재의 소리
사진의 물질적 구속력을 깨뜨리는 예술 디카시의 첫 번째 방법론은 사물이 지닌 형태적 ‘빈 곳’을 정신적 깊이로 치환함으로써 상투적 재진술을 넘어서는 일이다. 유레아 시인의 「떠났어도」는 예술 디카시가 도달할 수 있는 역설적 긴장(Paradoxical Tension)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시가 포착한 영상은 부두 한편, 굵은 밧줄에 촘촘히 묶인 채 쌓여 있는 빈 소라 껍데기들의 더미이다. 만약 시인이 이 장면을 보고 "바다를 잃고 버려진 껍데기들이 가엾다"라며 청승맞은 연민을 읊었다면, 사물은 '불쌍한 타자'로 박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차갑고 고요한 정물(靜物)의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격정적인 청각적 서사를 길어 올린다.
첫 발소리
목 놓고 싶은
함께였던 시간
-유레아,「떠났어도」,전문
신비평의 시각에서 이 작품은 ‘청각의 시각적 전이’가 만들어내는 언어적 아이러니(Irony)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3행의 짧은 시 안에 배치된 “첫 발소리”와 “목 놓고 싶은”이라는 극적인 청각적 모티프는 완벽한 적막의 사진과 팽팽하게 대립한다. 소라 껍데기들의 알맹이가 떠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과 ‘부재(不在)’를 의미하지만, 시인은 이 비어 있는 구멍을 결핍이 아닌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공명통(共鳴筒)’으로 재정의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도리어 가장 거대한 통곡의 소리를 시각적으로 ‘보게’ 만드는 구조적 반전이 이 텍스트의 뼈대를 이룬다.
이러한 신 비평적 유기성은 노자(老子)가 설파한 ‘공(空)과 무(無)의 쓸모’라는 동양적 사유와 정확히 맞물린다.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 때 가운데를 비워놓아야 비로소 그릇으로서의 쓸모가 생기듯, 소라 껍데기는 제 안의 욕망과 생을 완전히 비워내었기에(無) 비로소 무형의 가치를 채울 수 있는 영성(靈性)을 획득한다. 만약 소라 속에 살점이 가득 차 있었다면 그것은 식욕을 채우는 일차적 이로움에 그쳤을 터다. 하지만 완벽한 비움의 상태가 됨으로써 그 안에는 바람이 드나들고 기억이 머물며, 마침내 지나간 “함께였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영원성을 얻는다. 존재는 떠났어도(不在), 비어 있는 몸뚱이들이 연대하여 만드는 정막의 공명은 누군가의 “첫 발소리”를 향해 언제든 목 놓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숭고한 주체로 서 있는 것이다.
2. 「굽은 生」
— 직선의 세계를 흔드는 위대한 곡선의 실존
유레아의 「떠났어도」가 사물의 ‘비어 있는 안쪽(空)’을 통해 부재의 무게를 증명했다면, 나병훈의 「굽은 生」은 사물의 ‘구부러진 바깥쪽(曲)’을 통해 존재의 숭고한 실존을 선언한다. 이 작품은 디카시가 빠지기 쉬운 가장 흔한 함정인 ‘노년에 대한 청승맞은 연민과 신세타령’을 신비평적 긴장감과 우주적 스케일로 격파해낸 완벽한 텍스트다.
화면이 포착한 것은 반듯하게 그어진 횡단보도 위를, 낡은 유모차 한 대에 의지해 위태롭고 느리게 건너가는 한 노인의 실루엣이다. 렌즈에 잡힌 이 일상적 풍경을 보고 대다수의 함량 미달 디카시들은 "초라한 노년의 고단함"이나 "외롭고 가엾은 삶"이라며 값싼 동정표를 던지는 '청승맞은 연민'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덕천은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주관적 감정의 탐닉을 철저히 배제하고, 피사체가 가진 형태적 대립과 철학적 도약을 통해 거대한 우주적 서사로 치환해 낸다.
직선 세상이 내어준 틈새
등 굽어버린 세월이 건너고 있다
무거운 하루, 네 바퀴에 의지한 채
대지의 주름을 밀어내는 붉은 노을
지금, 또 하나의 지구를 굴리고 있다
- 나병훈, 「굽은 등」,전문
신비평의 관점에서 이 시의 구조적 밀도를 지탱하는 것은 ‘직선과 곡선이 이루는 형태적 긴장(Tension)’이다. 아스팔트 위에 반듯하게 그어진 횡단보도는 자본과 문명이 요구하는 효율성, 속도, 그리고 규격화된 ‘직선’의 세계다. 반면 그 위를 서행하는 노인의 등은 평생 생의 모진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형성된 순응과 생명력의 ‘곡선’이다. “반듯한 직선의 세상이 내어준 틈새”라는 표현은, 문명의 삭막한 시스템 속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실존적 온기를 뿜어내는 존재가 바로 저 구부러진 등(곡선)이라는 미학적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형태적 긴장은 장자(莊子) 철학의 핵심인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미학과 눈부시게 융합된다. 세상의 재목이 되기 위해 일찍 베어지는 곧은 나무와 달리, 구부러져 쓸모없어 보이는 나무가 천수를 누리며 지친 나그네에게 거대한 그늘을 내어주듯, 속도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불쌍해 보이는 노인의 ‘굽은 생’은 도리어 가장 숭고한 생명의 가치를 획득한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린 채 “가장 낮은 자세로” 대지와 맞닿아 걷는다. 이는 단순한 쇠잔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내고(無) 자연의 순리에 순응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대지와의 온전한 합일이다.
이 예술 디카시의 백미는 마지막 5행의 극적인 반전과 스케일의 확장에 있다. 노인이 밀고 가는 낡은 유모차는 오늘의 하루를 간신히 지탱하는 미시적이고 유약한 도구다. 그러나 시인은 이 낡은 네 바퀴의 구름을 “지금 또 하나의 지구를 굴리고 있다”는 우주적 선언으로 격상시킨다. 대상의 슬픔에 동정하는 청승을 걷어내자, 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생계를 책임지고 묵묵히 직선의 세상에 응전하는 고독한 노동이 우주를 자전(自轉)하게 만드는 거대한 신성함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실루엣을 배경의 “붉은 노을”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묵직한 마침표를 찍는 이 종장(終章)은, 예술 디카시가 대상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승화시킬 때 도달할 수 있는 눈부신 격(格)을 보여준다.
3.「토루(土樓)」
- 외벽의 ‘유(有)’와 중심의 ‘무(無)’가 일구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
유레아가 소라의 빈 안쪽(空)을 통해 부재의 울림을 전하고, 나병훈이 횡단보도 위의 낮춤(曲)을 통해 주체의 실존을 선언했다면, 구수영의 디카시 「토루」는 시선을 거시적 공간과 문명사적 층위로 돌려 인간의 건축과 대자연이 어떻게 하나의 호흡으로 유무상생(有無相生)하는지를 보여주는 비평적 정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 역시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적으로 받아 적는 '상투적 묘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화면 가득 들어오는 중국 복건성의 전통 건축 토루는 거대한 산자락과 굽이치는 계단식 논밭의 품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풍경이 주는 첫 번째 미학적 충격은 신비평적 ‘형태적 조화’에 있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 부드러운 능선과 인간이 깎아 만든 논밭의 곡선, 그리고 그 중심에 버섯처럼 돋아난 둥근 토루의 곡선은 인위와 자연의 경계를 지우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장관을 이룬다.
평화는
혼자서는 지킬 수 없다는
오래된 기억
흙은 집을 짓고
사람은 마을이 되었다
- 구수영, 「토루(土樓)」,전문
이 예술 디카시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뼈대는 노자 《도덕경》 제11장이 설파한 ‘유(有)와 무(無)의 유기적 결합’이다. 토루는 외부의 위협과 약탈로부터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육중하고 거친 흙벽이라는 거대한 ‘유(有)’를 취한다. 그러나 이 건축물의 진짜 실존적 쓸모는 그 빽빽한 방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심의 텅 빈 원형 마당, 즉 ‘무(無)’에서 발생한다. 하늘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이 비어 있는 광장은 고독한 개인들이 모여 소통하고, 평화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상생의 공간이 된다. 견고한 외벽(有)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안쪽의 평화로운 비움(無)이 확보되는 유무상생의 극치다.
시인은 결부에서 "흙은 집을 짓고 사람은 마을이 되었다"라며 물질의 영성을 극대화한다. 시멘트로 대지를 찢어발기는 현대의 직선 문명과 달리, 주변의 흙과 나무를 잠시 빌려 수명이 다하면 다시 대지의 무(無)로 돌아가는 토루는 그 자체로 자연의 순환론이다. 상투적인 관람객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대자연이라는 무(無)에서 인간의 집이라는 유(有)가 태어나 다시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유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다.
Ⅲ. 비교 및 융합
‘비어 있음(空)', '구부러짐(曲)', '유무(有無)'가 일구는 예술 디카시의 멋
지금까지 분석한 세 편의 문제작은 각각 객체(사물)와 주체(인간), 그리고 거시적 공간(자연과 문명)이라는 서로 다른 대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텍스트의 심층 구조와 철학적 지향점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방법론적 통일성을 성취하고 있다. 세 작품을 비교 평설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현대적 매체인 예술 디카시가 동양적 사유의 핵심인 ‘비움’과 ‘낮춤’, 그리고 ‘상생’을 만났을 때 발휘되는 독보적인 미학적 격조(格調)를 목도할 수 있었다.
각 작품별로 구체적으로 이러한 예술 디카시의 미학적 격조(格調)를 다시 한 번 요약해보면, 「떠났어도」에서 소라의 빈 안쪽은 물리적으로 '비어 있음 (공·空)'이자 알맹이의 죽음(결핍)이었다. 그러나 텍스트는 이 비어 있는 틈을 파도 소리와 옛 기억, 그리고 누군가의 "첫 발소리"를 받아들여 크게 울리는 영혼의 공명통(Resonance Box)으로 바꾸어 놓았다. 「굽은 生」도 마찬가지다. 속도와 효율을 숭상하는 현대 문명의 직선(아스팔트/횡단보도) 기준에서 보면 ‘쇠퇴'이자 ‘퇴행'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그 굽은 곡선(곡·曲) 이야말로 한 생명이 세월의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지탱해 온 가장 진실한 실존의 궤적이자, 스스로를 낮추어 지구를 자전시키는 거대한 축임을 밝혀냈다.
마지막 작품인 「토루」의 거친 흙벽은 차단과 폐쇄(유무·有無)로 읽히기 쉬우나, 그 중심에 하늘로 열린 비어 있는 원형 마당(무)을 품음으로써 도리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연대와 평화를 지켜내는 상생의 우주 건축물을 완성해 내고 있다.
좋은 예술 디카시는 시인이 먼저 울지 않아야한다. 대신 독자가 사진과 글 사이의 '비어 있는 여백'을 읽으며 스스로 감동을 느끼도록 반어(Irony)와 역설(Paradox)의 장치를 다듬는 것이 곧 예술 디카시의 '기술'인 것이다. 또한 카메라 렌즈라는 물질적 매체에 갇히지 않고, 찰나의 장면을 우주적 사유나 삶의 본질로 껑충 뛰어오르게 만드는 것, 바로 이 사유의 도약이 예술 디카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봉의 '멋'이며 다른 문학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 세 작품은 디카시 창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상투성(클리세)과 청승맞은 감상주의’를 격파하는 훌륭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데에서 예술 디카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대다수의 초급 디카시가 빈 소라 껍데기나 유모차를 미는 노인, 혹은 이국적인 전통 가옥 앞에서 앙상한 슬픔이나 신기함 같은 얄팍한 동정심을 쏟아내는 것과 달리, 이 세 편의 문제작은 철저하게 사물이 가진 물질적 형태(빈 구멍, 직선의 횡단보도, 굽은 등, 둥근 흙벽)에 집중하는 건조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사물이 가진 형태적 조건과 철학적 은유(알레고리)를 텍스트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거대한 정서적 울림에 도달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 예술 디카시가 지니는 격(格)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감정을 전면에 드러내어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진과 문자라는 두 매체의 격렬한 스파이크를 통해 사물 고유의 주체성과 숭고함을 되찿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정의하는 예술 디카시의 진정한 ‘멋’이자 ‘기술’인 것이며 그 종합적 형태로서의 격(格 )인 것이다.
Ⅳ. 결론 : 가을의 정점에서 만나는 비움과 순응의 미학
가을은 대지가 스스로를 비워내고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낮추는 조락(凋落)과 성찰의 계절이다. 화려했던 여름날의 초록을 내려놓고 정적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이 가을의 정점에서, 유레아의 「떠났어도」, 나병훈의 「굽은 生」, 그리고 구수영의 「토루」를 나란히 마주하는 일은 평론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깊은 실존적 떨림을 자아낸다. 세 작품은 사물의 단순한 재 진술이라는 디카시의 구속에서 벗어나, 신비평적 긴장감과 노장 철학의 융합을 통해 디카시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예술 디카시가 지향하는 격(格)이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증명해 보였다.
유레아가 보여준 소라 껍데기의 빈 구멍(空)은 타자의 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영성의 공간이었으며, 나병훈이 보여준 노인의 구부러진 등(曲)은 대지의 주름을 밀며 지구를 자전시키는 우주적 실존의 위대함이었고, 구수영의 「토루」가 보여준 유무상생(有無)은 자연과 인간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평화의 서사였다. 이들은 눈앞의 피사체에 종속되지 않고, 형태적 조건 속에 숨겨진 철학적 알레고리를 길어 올림으로써 앙상한 감상주의와 클리셰를 단숨에 격파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디카시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멋스러움’의 실체다.
한국 디카시 문단은 지금 양적 팽창에 걸맞은 질적 심화를 요구받는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누구나 쉽게 풍경을 찍고 몇 줄의 감상을 얹을 수 있는 시대일수록, 사진이라는 디딤돌을 딛고 우주적 사유로 도약하는 시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더욱 소중해진다. 문자가 영상의 하인이 아니라 동등한 예술적 동반자로서 제3의 미학을 창출할 때, 예술 디카시는 비로소 불멸의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나병훈|문학평론가, 1957년 전북 임실 출생
2026년 계간《문학사계》문학평론 등단
문학평론집『언어의 숲,사유의 길 』外
동인디카시집 『감정계약서』, 『물낯에 햇살이 비칠 때』
전문칼럼집『쌀과의 연애론1,2』外,
前 계간《씨글》편집장 , 前《온글문학》주간
사) 한국디카시학회 전북지부장. 글벼리디카시문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