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여행기 [4] 낙양 이야기
2008.09.13 05:28분, 잠에서 깨어나니 낙양의 아침이다. 방문 커텐을 열고 도시를 조망해 본다.
호텔 맞은편은 우리나라의 올림픽 공원처럼 각종 경기장 들어선 낙양의 올림픽 중심지다.
좌측으로는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멀리는 타워크레인과 함께 고층 아파트 신축현장이
안개속에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시정부 청사도 길 건너 가까이에 있다.
한창 건설중인 전형적인 신도시 분위기다.
중국어 사전을 보면 양(陽)은 양지를 의미하는데 지명에 쓰일때는 산(山)의 남쪽 지역 또는
강(江)의 북쪽지역을 가리킨다.
형산의 남쪽에 있는 형양(衡陽)이 그러하고 우리나라 경우 한강(漢江)의 북쪽인 한양(漢陽)이
그러하다. 낙양(洛陽)은 바로 낙수(洛水)의 북쪽에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의 낙양은 시정부의 최근 통계에 의하면 2007년 말 현재 낙양이 관할하는 총면적은15,208㎢
이고,시내지역만 544㎢이다. 인구는 6,504,500명에 이르며 총46개 민족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한족이 거의 대부분인 98.8%를 차지한다. 소수민족은 1.2%에 불과하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되는 천자문(千字文) 속에는
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화하의 도읍으로 동과 서에 두 서울이 있다는 뜻으로 동경(東京)은 낙양이고 서경(西京)은 장안
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도 중국의 7대고도(古都)이든 3대고도이든 낙양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낙양처럼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비록 불타버리고 허물어져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이 땅을 스쳐간 수많은 영웅
호걸과 기인이사, 그리고 제왕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양은 그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찾게되면 그다지 재미있는 여행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낙양의 역사
낙양은 중원지역의 중앙에 자리잡아 ‘천하의 중심’이라고 부르며,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옛 도시로서
중화 문명의 중요 발상지다. 전설에 따르면 중화문명의 시조인 복희(伏羲),여와(女娲), 황제(黃帝),
당요(唐堯),우순(虞舜),하우(夏禹) 등 신화(神話)속 황제들이 낙수(洛水) 주변인 현재의 낙양 지역에
서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신화의 시작이 바로 낙양인 셈이다.
이 낙양(洛陽:뤄양)이 역사적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기원전 770년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인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은나라로 불리게 되는 상(商)나라에 이어 중원을 지배한 주(周)나라는 처음에 수도를 황하변이 아니라
오늘날의 섬서성 서안부근인 호경(鎬京)으로 정하였다. 원래 주나라의 본거지가 서북 변경이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수도가 치우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쪽 황하변에 있는 낙양을 부도로 정하였다.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BC770년 주평왕(周平王)때 수도를 아예 낙양으로 옮겼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조선 역사서인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있는 자료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당시 수도를 정하려 함에있어, 신하들이 송도(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주장과 한양
이나 계룡산 신도안으로 정하자는 주장 등으로 수년을 끌어오고 있었는데 당시 사헌부(司憲府) 중승(中丞)이던
류관(柳觀) 등이 한양정도를 주장하며 올린 상소를 보고 마침내 도읍을 결정했다는 기록이다. 그것을 간추리면
(도읍을 정하는 법으로 말하면 예부터 제왕이 도읍을 정함에 있어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야 백성이 잘 살 수 있으며
수륙(水陸)의 교통이 통달하여 곡식 등 물자를 운반할 수 있으며 이정(里程)의 거리가 서로 고르려야 동서남북을
통치할 수 있으며 토지가 고상(高爽)하여야 가히 수재(水災)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네 가지가 갖추어지지 못하
면 좋다 할 수 없습니다. 하(夏), 은(殷), 주(周) 등 중고(中古)시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주나라가 도읍을
정한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상(商)나라의 식년(殖年)이 6백 년인데 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호경(鎬京)에 도읍하고
성왕(成王)이 무왕을 이어 낙양(洛陽)에 도읍을 옮기어 8백 년이나 사직(社稷)을 이었으니 대저 낙양은 지세(地勢)
가 평탄(平坦)하고 넓으며 뱃길이 통하고 땅이 또한 고상(高爽)하며 도리(道里)가 서로 고르니 이 네 가지 좋은 점
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나이다.
신(臣)등이 생각할 때 송도는 곧 주(周)나라의 호경(鎬京)이요 한양은 곧 주(周)나라의 낙양(洛陽)이라 할 수 있으니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시는 옳다고 여깁니다.) 하며 상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낙양은 우리나라 서울을 정하는데 있어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낙양은 BC 770년에 주왕조가 천도한 뒤 부터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
국(三國)의 조위
(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9대 왕조를 포함
13개 왕조가 1,529년동안 이 낙양을 도읍으로 삼아왔고 96명의 황제가 살았다 한다.
그 이유는 낙양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배산임수(背山臨水)로 황하의 지류인 낙수를 앞에 두고 뒤에는 망산(邙山)이
있어 방어에 적합하였으며,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낙양이 중원의 중심 도로망이 된것은 중국에서 최초로 도로망을 건설한 3,000년 전인 서주(西周)때부터 이며,
한나라 때도 비단길이 낙양에서 시작되고 수(隋)나라 때에 개통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도 이 낙양을 거쳤다.
당나라 초기에 낙양 인구가 이미 100만을 넘어 섰으며 중국에서 유일한 여 황제인 무측천(武厠天)이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는 그 이름을 한때 신도(神都)로 부르기도 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당시 장안(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당나라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또한 오랜 시기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
였다. 그리고 유명한 '삼국지(三國志)'이야기도 후한말기의 이 낙양이 무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곳 낙양의 지리적 위치가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천연적인 요새일 뿐만아니라, 하남성
(河南省) 서부 지역을 지배하려면 반드시 낙양을 점령했어야 하므로 낙양을 차지하기위한 쟁탈전은 필연적
이었으며 수 많은 전쟁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더욱이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는 전란이 끊이지 않아, 수 많은 문화 유적들이 소실되거나 없어졌다.
이 과정에서 낙양사람들은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보물들을 땅속에 뭍어 두었다.
가이드 이해용씨의 말에 의하면 낙양사람들중에 부자가 많다고 한다. 바로 땅속 숨어있는 보물들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물이 발견되드라도 개인이 가질 수 없고 국가소유가 된다고 한다.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이 멀다더니 건너 산이 북망산일세.” "황천길이 멀다더니 방문 밖이 황천이라"
이는 우리나라 판소리 심청가 속에서 있는 말이고,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이는 유명한 우리 민요 '성주풀이'의 가사다.
여기서 북망산(北邙山)은 우리 국어사전에도 있는 말로 무덤이 많은 곳이나,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때문에 '북망산에 가다, 북망산천에 묻히다'는 말은 바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말이 생긴 것은 바로 이 곳 낙양의 북쪽에 있는 망산(邙山),
즉 북망산(北邙山)에 무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2년전 중국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중 낙양시 문물당국은 2003년 10월부터 3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많은
고분군이 집중돼 있는 망산(邙山)의 고분 문물에 대한 전면조사를 진행, 약 700여기의 고분을 조사.측정
했으며 오는 2012년까지 9개년 계획으로 '망산 능묘군 고고조사 및 탐사'를 진행, 망산 고분군의 '진면목'
을 밝혀내기로 했다.
지금까지 망산에서는 진(秦)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 남조(南朝) 마지막 왕 진숙보(陳叔寶), 남당(南唐)
마지막 왕 이욱(李煜), 서진(西晉) 사마씨(司馬氏), 한(漢) 광무제(光武帝)의 원래 무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대서예가 안진경(顔眞卿) 등의 무덤이 확인됐다.
또한 한나라 환제(桓帝)의 선릉(宣陵) 또는 질제(質帝)의 정릉(靜陵)으로 추정되는 무덤 등 3기의 황제릉에
대해 고고조사 및 탐사도 실시했다.
망산은 낙양시 북쪽에 동-서로 100㎞에 걸쳐 있는 해발 300m의 작은산으로 지리적 조건이 알맞아 후당 이전
에 쓴 24기의 황제릉을 비롯해 청나라 때까지 수십만기의 무덤이 쓰였으나 시대 흐름과 역사 변천,자연 및 인
위적 파손 등으로 대부분 파괴된 상태다.
특히 이 망산 일대는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夫餘隆), 고구려 연개소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獻誠),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1400년 이상 자취를 알 수 없었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義慈王) 무덤의 발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의자왕은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 만 2,000여명의 백제인들
과 함께 끌려갔다가 병사, 북망산에 묻힌 것으로 역사서에 전해 오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수많은 왕조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낙양에는 많은 제왕과 영웅들,그리고
귀인과 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죽어 북망산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 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이다.
北邙山上列墳塋 북망산 위로는 무덤들이 즐비한데
萬古千秋對洛城 천년 만년토록 낙양성을 마주하였네
城中日夕歌鐘起 성 안에는 밤낮으로 노래소리 들리는데
山上唯聞松柏聲 산 위로는 소나무 잣나무 소리만 들리네
이는 중국 당나라때의 시인 심전기(沈佺期)가 노래한 망산(邙 山)이라는 시다.
낙양에 와있으니 우리 가요 황성옛터가 생각난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다 가사를 살짝 바꾸어 읊어본다.
황성옛터에 왔으나 그 터는 간 곳이 없고
전설뿐인 옛터가 그 옛날의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애닮다 이 내 몸은 그 무얼 찾으려고 이 낙양에 왔는가
성은 허물어져 보이지 않고 이름만 요란한데
명멸해간 제왕들의 발자취가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