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신라
삼국이 처음 일어날 때에
진실로 모두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고 약한 것으로부터 강함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 같은 일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성립이 가장 힘들었고 발달이 가장 더딘 나라는 오로지 신라였다.
그 강토는 가락과 서로 적대될 만하였으며
그 병력은 포상팔국(浦上八國)과 서로 다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즉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이 쳐들어오매 주저하고 두려워하여
임금과 신하가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백제 군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으니
(신라 祇摩王 14년의 일)
그 약소함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원인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대개 삼한과 삼국이 처음 일어날 때에 경상좌도 일대는 황량하고 개척되지 않았던 땅이었다.
이에 마한이 바야흐로 강할 때에
본래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과 진나라와 한나라 유민들이 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을 이곳에 살게 하여
여러 부로 나누고 그 주권은 마한이 장악하였는데
진한 변한의 크고 작은 12 나라의 호수(戶數)를 모아도 4, 5만에 지나지 않으니
신라가 여기에 머물러 살고 있었으므로 그 힘을 의지할 만한 바가 이미 약한 것이 그 첫째이다.
고주몽 온조 박혁거세 세 왕이 모두 나그네의 발길로 타방(他方)에서 유리하다가 기업을 열었음은 같다.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명성 때문에 원근(遠近)이 두려워 복종하였으므로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여의 영웅 호걸들로서 따르는 자들이 많아서
한번 일어나 송양을 없애며
두 번째 일어나 유리를 항복시켰으며
세 번째 일어나 읍루 옥저를 평정하여 대업을 이룸이 손바닥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이 쉬웠다.
온조는 마한에 들어와 분할하여 받은 바 백여리 땅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끌어 모으며 군사를 양성하여
동서 정벌의 밑천으로 삼은 까닭에 그 강성하여 일어남이 역시 조금 쉬웠던 것이다.
혁거세는 주몽과 같이 활을 잘 쏘는 재주도 없으며 온조와 같이 근거할 만한 백리의 왕도 없고
단지 구구한 신화에 의해 고허부(高墟部)만 차지하였으나
토지와 군사력이 각 부를 정복하기 어려웠음이 그 둘째이다.
요동 만주 등지에는 동부여가 수천 리의 땅을 차지한 큰 나라요
한강 이남에는 마한이 오십 부를 통일한 큰 나라인데 주몽 온조 두 왕은 모두 이 땅에서 일어났으니,
동부여와 마한만 넘어뜨리면
나머지 작은 부락들은 모두 그 세력 범위 안에 스스로 복속해 들어올 것이거니와
저 경상좌도 일대는 그렇지 못하여 많은 부락들이 서로 엇비슷하여
능히 서로 받들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까닭에,
혹 한두 부를 빼앗으면 그 다음의 각 부락들이 서로 연합하여 반항하기에 족하니
(오가야 포상팔국이 결합하는 예)
이것이 셋째이다.
때문에 신라가 그 미약한 힘으로 열강들의 사이에 처하였으니 시종 단련하여 얻은 것은 외교다.
때문에 신라가 발전한 원인은 반 이상이 외교에 있었으니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각 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겠다.
그런즉 신라가 강대하게 된 때가 언제냐 하면 아달라왕 벌휴왕 시기이다.
이 때는 혁거세왕 원년에서 259년 이후니 그 일어남의 어려움이 과연 심하였다.
이 까닭에 백제의 침략이 벌휴왕 6년(189)에야 비롯하였으니
이 때 신라와 백제의 영토가 바야흐로 서로 가까워진 까닭이요
고구려의 침략이 조분왕 15년(244)에 비롯하였으니
이 때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영토가 바야흐로 서로 갈마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