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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에 위치한 국가로는 프랑스 · 네덜란드 · 벨기에가 보병대대급 부대를 파견했다. 프랑스 대대는 줄곧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는데, 특히 1951년 2월의 지평리 전투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어, 미 제23연대 장병들이 프랑스군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군의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프랑스군의 장군으로 종군했다. 종전 때 그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그는 종전 후 예편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급 규모의 파견부대를 구성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이 대대를 지휘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뜻에서 중령 계급으로 현역 복귀를 신청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어졌고, 프랑스 대대의 지휘관이 됐다.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유엔군사령부와 미제8군 장병들은 그의 이러한 배경을 알기에 '몽클라르 장군'으로 불렀다.
프랑스 대대는 원주 전투, 쌍터널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미 제23연대와 함께 혈투를 벌여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반격의 발판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다. 영국의 참전은 유엔군 창설 이전에 이루어졌다. 영국 육군은 먼저 홍콩에 주둔 중인 2개 대대와 지원부대로 제27여단을 구성해 곧바로 낙동강 방어작전에 뛰어들었으며, 제27여단은 압록강으로의 북진작전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은 추가로 제29여단을 편성해 참전했다.
제29여단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제8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중공군 5차 전역(4월 공세) 당시 벌인 임진강 남안의 설마리 전투에서이다. 제29여단은 1951년 4월 22일 한국군 제1사단의 방어선이 붕괴돼 우측의 글로스터(Gloucester) 대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3일간 진지를 굳건히 지켜 좌우측의 아군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이후 영국은 영연방 국가의 부대들이 도착하자 모두 통합해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을 창설했다. 영연방 제1사단은 영국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호주) · 캐나다 · 뉴질랜드 · 벨기에 · 룩셈부르크 등 모두 6개국 군으로 구성됐는데,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국 해군은 1950년 6월 29일께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프리깃함 3척을 파견해 미 극동해군사령부의 작전지휘하에서 미 해군함정과 함께 동서 해상의 작전에 동참했다. 이후 영국은 연인원 약 1만 7천 명의 해군병력이 한국작전에 참가했으며, 50여 척의 함정이 종전 때까지 교대로 해상작전을 수행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대대급의 전투부대로는 잘 훈련되고 책임감이 강한 부대였으며 영어를 구사하는 장병이 많아 미군과의 협조도 원활하였다. 네덜란드 대대는 1950년 10월 24일 한국에 도착해 12월 말까지 적응훈련을 마치고, 미 제2사단에 배속돼 중부전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했다. 대대는 원주에서 북한군 제5군단 예하부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며, 이 전투에서 북한군 1천 1백 명을 살상 혹은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네덜란드 대대는 횡성에서 사방을 포위한 채 위협해 오는 중공군을 일사불란한 대처로 격퇴하고 횡성 뒷내물 다리를 확보함으로써 미 제2사단의 철수에 크게 기여했다. 전통적 해운국인 네덜란드는 육군 이외에도 6척의 함정을 파견해 동서 해상에서 미 극동해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벨기에 대대는 1951년 초부터 미 제3사단에 소속된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돼 작전을 수행했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그들의 전문적인 전술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2월 공세 때 벨기에 대대는 임진강 북쪽의 중요 감제고지인 금굴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좌측으로는 영국군 푸질리어 대대와, 우측으로는 임진강의 가파른 단애를 사이에 두고 미 제3사단 제65보병연대와 접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벨기에 대대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좌측의 영국군 푸질리어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자칫 고립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때 대대를 지휘하던 크레하이 중령은 금굴산을 지키면서 철수로를 확보했으며, 그의 시의적절한 지휘 하에 벨기에 대대는 전차부대에 의해 확보된 도감포 교량을 통해 동쪽 미 제65연대 지역인 전곡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벨기에 대대는 2일 간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며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서측 영국 제29여단의 철수를 도왔으며, 큰 인원손실 없이 위기를 벗어났다. 이 전투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미국 대통령, 미 제8군사령관, 벨기에 국방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유엔 참전국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았던 '미니 부대'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리 유엔 사무총장과 미 국무부에 '참전을 희망하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 병력은 작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로 최소 1천 명은 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견해는 유엔 회원국들에도 전달됐다. 그러나 이 최소 기준에서 예외가 된 국가가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는 인구가 20여 만 명에 불과해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가 곤란했으며, 사전에 벨기에와 협의해 벨기에 대대에 1개 소대 병력을 포함시켜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전쟁 기간 내내 48명의 병력을 유지하며, 벨기에 대대에 소속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의 참전 병력은 다른 유엔 참전국의 파견 군대를 모두 합한 것의 몇 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미 육군은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 제1해병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 등 9개 사단과 2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수많은 지원부대를 파병했다. 미 육군은 전쟁 기간 중 최고 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1952년 유엔군사령부의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의 병력 수만으로 보면 지상군의 경우 한국군이 50%, 미군이 40%, 미국 이외의 참전군이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 육군이 시행한 작전은 사실상 6.25 전쟁 전체 작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 해군은 극동해군의 통제 하에 제7함대가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및 지원함이 참여해 개전 이후 10일째 되는 7월 4일부터 북한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미 해군은 공중폭격, 함포사격, 상륙병력 수송, 미 본토로부터의 인원과 물자수송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통해 고도로 숙련된 전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 하에 제5공군과 전략폭격사령부를 중심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폭격과 유엔 지상군이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근접지원 작전을 펼쳤다. 미 공군은 전쟁의 초기단계부터 마지막까지 북한군과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혀 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미국의 인접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일원이었던 캐나다는 북한의 배후에는 소련의 팽창욕구가 있다고 판단하고, 유엔의 공동노력으로 이를 강력히 저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쟁 발발 5일 후 캐나다 하원은 "집단안보의 효율성을 과시하기 위한 정부의 어떠한 조치도 적극 지지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날 루이스 로랭 총리는 "유엔의 권위 아래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안보 활동을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는 터키처럼 여단급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최초로 파견된 제2대대(PPCLI)는 영국 제27여단에 소속돼 작전을 수행했다. 1951년 5월 초 제25여단의 본대는 한국에 도착한 이후 새로 창설된 영연방 제1사단의 일부로서 전투에 임했다.
캐나다군은 영국군과 교리 면에서 매우 유사했고, 터키가 겪어야 했던 언어소통 문제도 전혀 없었다. 캐나다 제2대대는 가평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능력과 전투의지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참전한 국가 중 필리핀과 에티오피아는 대대급 부대를 파병했다. 그러나 그들은 낙후한 장비와 뒤처지는 훈련 수준으로 인해 한국에 도착해서 상당한 기간 미군으로부터 적응 및 전술 훈련을 받은 후에 전선에 투입됐다.
필리핀은 독립 이후 줄곧 공산반란군과 교전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가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정부는 먼저 전차 17대에 이어 1개 연대 전투단을 파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필리핀 대대는 1950년 9월 2일 시민들이 운집한 라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파병식을 가졌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보내온 나라이다.
필리핀 대대는 전체가 미군측의 무기로 무장하고 1950년 9월 20일 한국에 도착해 10일 간의 적응 훈련을 끝내고, 처음에는 후방 게릴라 소탕 작전에 투입됐다가 전선에 뛰어들었다. 대대는 미 제65연대에 배속돼 임진강 부근 군자산을 공격해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공로를 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의 기관총을 파괴한 소총수, 부상당한 채 끝까지 화력지원을 한 경기관총 사수, 사선을 넘나들며 부상자를 후송한 위생병은 장병들의 귀감이 됐다.
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4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참전국은 대대급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 아시아에서는 타이(태국)이 가장 먼저 유엔의 한국지원에 호응해 지원의사를 표명했다. 타이(태국)은 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30일 국가의 주 생산물인 쌀 4만 톤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지지를 보냈다. 유엔 회원국 중 최초로 물자지원 의사를 밝힌 타이(태국)에 대해 리 유엔 사무총장은 "타이(태국) 정부가 유엔결의를 지지하고, 식량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사실에 찬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중립을 표방해 왔던 타이(태국)의 참전은 단지 '서구의 제국주의자들'만이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것이라는 소련의 선전을 일축하는 데 좋은 모범이 됐다.
타이(태국)군은 참전 준비가 늦어지면서 결국에는 1천 명에 달하는 1개 대대의 육군병력을 파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타이(태국)은 육군부대 이외에 프리깃함 2척과 왕립 타이(태국)공군의 C-47 수송기를 보내 미 공군 제21병력수송대대에 속해 활동케 하는 등 육 · 해 · 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이다. 타이(태국) 대대의 용감성은 포크찹(Porkchop)고지 방어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타이(태국)군은 세 번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치며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타이(태국)군은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국 연방국가인 뉴질랜드 정부도 “유엔결의에 따라 함정을 파견하겠다”며 참전 의사를 표명했다. 이후 프리깃함 2척이 1950년 7월 3일 자국을 떠나 30일 한국 해역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뉴질랜드 해군은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 8척의 함정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작전을 펼쳤다.
또한 독특하게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를 파견해 화력으로 유엔작전에 기여했다. 제16야전포병연대의 일부로 구성된 뉴질랜드 포병대대는 처음에는 영국 제27여단에 소속돼 전투를 수행했으나,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뉴질랜드 포병은 인접국인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부대와 나란히 영연방 군에 속해 그들로부터 많은 기술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뉴질랜드 포병대대는 중공군의 신정공세 이후에는 영국의 미들색스연대 보병대대, 캐나다 보병대대에 대한 화력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가평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뉴질랜드는 포병뿐만 아니라 소규모이긴 하지만 해군병력을 보내 유엔작전에 기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정부의 군사원조 조치는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됐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만 5천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서 1개 대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수행한 바 있으며, 유럽에서도 많은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엔 한국위원단 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남북한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유엔이 파견한 군사조사단에 1950년 초 유일하게 2명의 장교를 파견했기 때문에 남한의 방어태세와 북한의 침공위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제3대대는 1950년 9월 27일 한국에 도착해 유엔군의 북진단계부터 곧바로 작전에 참가했다. 사리원 전투에서 적극적인 백병전을 벌여 후퇴 중인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작전속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들은 영유리 전투, 박천 전투,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였다.
콜롬비아는 유엔결의를 접한 후 1개 대대를 파병할 뜻을 밝혔으나 자국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참전에 따르는 무장 · 훈련 · 보급 등의 문제를 놓고 미국과 오랫동안 협상하는 바람에 실제 참전은 늦어지게 되었다.
콜롬비아는 우선 해군함정을 파견했으며, 육군은 참전국 중 가장 늦은 1951년 6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비록 참전 규모(프리깃함 1척, 지상군 1개 대대)는 작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유일한 참전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았다.
미 제24사단에 배속된 콜롬비아 대대는 한국에서의 첫 전투인 흑운토령에서 11명의 부상자를 내며 혈전을 수행했다. 또한 금성 진격전투에서 대대장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목표고지를 확보했으며, 그 후 볼모고지 전투에서도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전초선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유엔의 지원결의에 1950년 7월 1일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지원방식에 관해 미국과 협의한 후 국회의 동의를 받아 전투비행대대 파견을 결정했다. 대대는 9월 4일 더반 항을 출발해 40일 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 참전국 중 유일하게 공군부대만 파견한 국가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군으로부터 무스탕 16대를 넘겨받아 일본과 한국의 기지에서 근접항공지원과 차단폭격작전에 참가했다.
비행편대는 서부전선의 청천강 북쪽 상공으로 출격해 적의 병력집결지와 야전보급소를 공격했으나, 착륙 중이던 전투기 2대가 불량한 활주로 때문에 충돌해 대파하는 피해를 본 것이다. 그 후 대대는 북한 지역에 산재한 철교, 육교, 터널, 철도조차장 등을 폭격하는 차단작전을 수행해 큰 전과를 올렸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당한 적이 있어,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유엔이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평화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결의를 보였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1951년 5월 6일 한국에 도착해 미군이 제공하는 무기로 재무장했으며 8주간의 비교적 긴 적응훈련 기간을 거쳤다. 대대는 당초 낯선 현대적 장비와 전술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으나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해 훈련 후반기에는 통신장비와 수송장비를 다루는 데 있어 다른 유엔군 수준에 버금가거나 더 높은 숙련도를 보였다.
대대는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화천 봉당덕리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다. 대대는 4시간여에 걸친 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육군을 여단급 규모로 파견한 국가는 터키와 캐나다였다. 터키는 한때 중립을 표방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 측에 합류하면서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했으며, 북한의 남침 직후 한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원조 결의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단시일 내에 4천5백 명 규모의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유엔 회원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터키군은 육군 위주의 부대를 파견하면서 보병 외에 공병 · 수송 · 의무 · 병기 · 병과 부대를 포괄하는 전투단을 구성함으로써 독립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편성을 유지했다. 터키군은 1950년 중공군의 11월 공세(2차 전역) 당시 미 제2사단의 우익부대로 군우리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장병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착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해 부대의 강한 군기를 보여 주었다.
터키여단은 군우리의 손실을 보충하고 미군의 울프하운드 작전, 선더볼트 작전 중 수리산 전투와 김량장 전투에서 자신들의 사상자에 비해 적에게 10배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전과를 올려 유엔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당시 터키군이 미군과의 연합작전에서 가장 큰 애로를 느꼈던 것은 언어소통 문제였다. 특히 상황이 급변하는 전장에서 충분치 못한 통역은 생소한 지형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터키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 유럽 · 아프리카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소련과 그 위성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스는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아 양국의 우호관계는 밀접했으며, 그로 인해 그리스는 한국전에 지상군 1개 대대와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했다.
그리스 대대는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해 적응훈련을 마치고 미 제1기병사단에 속해 격전을 치렀다. 대대는 이천 부근 381고지 방어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전투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적의 주요 거점인 임진강 부근 고양대 · 대노리고지를 놓고 수차례 공방전을 거듭했다.
그리스 제13수송편대(C-47 7대)는 1950년 12월 1일 일본에 도착한 이후 장진호 전투를 지원했으며, 미 해병사단을 직접 지원해 전 · 사상자를 후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