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2. 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3. 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는 것이 사실입니까? 국서의 실체를 알고 싶습니다.
4. 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5.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6. 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 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7. 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8. 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설명해 주세요.
9. 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10. 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1. 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조영의 성은 대씨입니다.하지만,대조영의 왕호가 高王 이라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즉, 대조영의 원래 성씨가 고씨인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마도 대조영은 옛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왕호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요.
2. 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에는 진국이라는 국명을 썼습니다. 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稱葉岩吉) 구당서 권 199 발해말갈전을 보면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이 되었다.." (自立爲振國王)에 진국이 나옵니다. 발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한 이후, 국명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어 당에 통보한 식으로 생각합니다.
즉, 국력이 강성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죠.이런 경우가 바로 후대의 조선인데, 국명을 미리 정한 후 명나라에 선택권을 줍니다. 당연히 명나라는 조선이 선택한 국명을 따르겠죠. 중국 학계는 책봉으로 인해서 국명 변경을, 북한 학계는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 학계는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 시각이 다릅니다.
3. 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국서의 실체를 알고 싶습니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 권10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부분이죠.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 내용인데,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왕은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국서의 내용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고자 무왕이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건국도 알리고 있는데 발해가 여러 번국들을 주관하고 부여-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국서의 자세한 내용은 발해 서적을 참조하세요.
4. 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발해의 등주 공격으로 인해서 당-신라의 관계는 자연스레 복원 되었습니다.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갔지만 발해로 인해서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733년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합니다.물론 실패로 끝나죠. 이후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5.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발해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문왕은 나아가 발해-일본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설정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국서 없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전달하는 등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표출했습니다.
1988년 북한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 당나라 또는 일본의 천제, 천황을 모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금동판에서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였죠. 결국, 발해 왕실도 스스로 천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 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 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문왕의 대흥이라는 연호는, 정효 공주 묘지문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大興은 '크게 흥하다' 라는 뜻처럼 문왕은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정효 공주 묘지문에 보면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문왕의 연호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리고 대흥 이외에 묘지문에서 확인된 것이, 보력이라는 또 다른 연호입니다. 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보력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7. 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6부의 중앙 관청은 현재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문.무 관리를 등용하고, 조세 및, 군사, 법률 등 왕권과 결부되는 곳입니다. 중앙 관청의 힘은 곧 왕권의 힘입니다. 중앙 정부가 힘이 없다면, 왕권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죠.
8. 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설명해 주세요.
문왕대에 대부분 수도를 옮겼습니다.742년 문왕은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옮겼습니다. 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할려고 했습니다.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 시기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수도 방위의 중요성 때문에 상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30년 뒤 문왕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는데 아마도 문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돌아옵니다.794년에 성왕에 의해서 다시 수도를 천도하여 상경용천부가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9. 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국제적으로는 당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 체제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더불어 정혜, 정효 공주 묘지문에 나오는 황상 같은 경우에는 문왕을 황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함화 4년명에 나오는 허왕부라는 존재와 발해 3성 중에 하나인 선조성을 보면 詔 의 경우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敎는 한 단계 아래인 왕이 사용하는 용어이죠. 자세한 것은 송기호 교수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글을 참조하세요.
10. 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발해왕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위해왕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 김육불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사실상 13대왕 대현석 이후 인선왕까지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더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발해가 남긴 사료도 없기 때문입니다.
11. 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 신라'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12. 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발해는 다민족 국가인가요?
13. 발해가 중국,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4. 발해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가 아닌 만주사가 아닐까요?
15. 발해 시대에 존재한 소고구려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16. 발해의 옛 터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한국사가 아닌가요?
17. 발해는 여권이 강한 사회였는지요?
18. 발해와 신라의 뱃길의 역사를 알고 싶습니다.
19. 발해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20. 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11. 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 신라'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은 어느 정도 정착되었지만,단일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국 시대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 명칭을 구분해야 하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오래전에 '후기신라'라는 명칭으로 통일 신라 시대를 대신했으며 남한에서는 한규철 교수님께서 '대신라'로 제안했습니다. 즉, 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대신라'라는 시대 명칭을 제안한 것이죠.
12. 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발해는 다민족 국가인가요?
사실상 한국 역사는 단일 민족사의 역사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국민과 민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ethnic group(민족) 하고 nation(국민) 의 혼동입니다.하 지만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다릅니다. 중국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다양한 55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려 이후 중앙 집권화된 국가에서 강력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이 몽고의 침략입니다. 당시에 많은 역사서들이 집필된 이유도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민족 통합을 강력히 추구하신 분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입니다. 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중국과의 차별성을 둔 것이고 압록. 두만강에 방어진들을 구축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구분 지어 버렸습니다. 특히 이 민족의 풍습을 금지시켜 많은 위구르인과 한족들이 조선인으로 동화되어 버렸죠.
처음부터 韓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수백, 수천의 민족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통합했으며 다시 발해와 신라,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한국인과 한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발해에는 고구려인, 말갈인 뿐만 아니라 소그드인, 한인, 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았습니다. 9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합 정책으로 어느 정도 단일화된 발해인이 나타납니다. 동화가 된 것이죠.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민족은 국수주의와 배타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죠.
13. 발해가 중국,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발해가 있었던 지역은 북방 지역으로 상당히 추운 지역입니다. 하지만 발해가 북쪽 지역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발해가 존재할 시기에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기후의 영향으로 발해 지역에서 농사나 작물 생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 한랭기의 시기에 발해가 존재 했다면 발해는 한반도 내로 중심 수도를 옮기던가 아님 신라와 전쟁을 했을 것입니다.발해는 자체 생산력만으로 식량을 해결하는데 충분하여 남쪽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 발해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가 아닌 만주사가 아닐까요?
박시형 교수님께서 중국 학술회의에서 영토가 바뀐다고 역사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학술회의는 중국과 북한 학자들의 논쟁으로 인해서 엉망으로 되어 버렸죠.
비록 중국, 러시아가 옛 발해 영토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지만 발해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귀속시키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집니다.
발해 이후에 일어난 금이나 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진출하였기에 중국 왕조의 한 부문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멸망합니다. 중국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 고구려도 같은 경우이죠.
후대의 역사 인식도 중요합니다. 후금이나 청은 발해가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서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중국보다 200년 이상 앞서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합니다.
유득공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저술합니다. 이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변화 때문입니다. 영. 정조 시대에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실학자들은 자연히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실학자들의 발해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는 바로 발해가 선조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조선 전기와는 다른 역사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발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 중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발해에 대한 귀속 의식은 한국인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영순태씨, 협계태씨 등 대조영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지역에는 없습니다.
15. 발해 시대에 존재한 소고구려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고구려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당나라는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요동에 세웁니다. 677년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해 신성으로 보내서 고구려인을 회유한 것이죠.
당시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다르게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했으나 당에 발각되어 잡혀가 공주로 귀양을 갑니다. 그리고 682년 보장왕은 서거합니다.686년 당나라는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요동 지역의 통치를 맡깁니다. 이 시기의 고구려를 소고구려라고 부릅니다.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소고구려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지만 발해 문왕대에 들어와 흡수됩니다.하지만 소고구려는 발해의 번국으로 인정되었나 봅니다. 10세기 초까지 여러 사료에 고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죠. 당회요나 책부원귀에 보면 고려가 당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나오는데, 이 당시의 고구려는 소고구려를 지칭합니다.
소고구려의 영토는 황해 북부, 평안. 남북도, 요동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얼마 전 천지출판에서 나온 '자주독립국 발해'라는 책 속에 장학종 교수님의 "고려 후국의 수도와 그 존립에 대해서" 논문을 참조하세요.
16. 발해의 옛 터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한국사가 아닌가요?
금나라가 고구려. 발해처럼 만주에서 흥망했다면 한국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한 왕조로 풍미했습니다.또 한 이 당시의 여진족들은 많이 이질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록 같은 원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활, 풍습, 언어 등이 달라지면서 분파 되었습니다. 금의 황실이 발해와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한국사로 귀속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17. 발해는 여권이 강한 사회였는지요?
발해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 정효공주묘지문에는 발해 사회에 유교적인 경향이 나타나지만, 유교는 발해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남녀 평등 사회를 접목하기에는 힘들지만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습니다. 이것은 발해 무덤 발굴에서 확인되는데, 보통 중앙에 주인공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송 시대때 쓰여진 [송막기문]에는 발해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자매를 이루었는데, 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남편이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의 연애(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 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사람)들은 모두 소부(첩),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 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다." -역 송기호 교수님-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서 여창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라 시대때 김유신이 간 곳이 창가였는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발해 사회에서는 위의 사료를 참조했을 때, 발해시대에는 매춘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으며 첩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겠죠.
송막기문에 나오는 내용은 발해 지배층의 생활상입니다. 성을 가진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집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간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홍라녀'에 대한 기사입니다.'홍라녀'에 대한 많은 전설이 있기에 우리는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홍라녀가 전사가 되어 적을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자가 장군이 되어 적을 물려쳤다는 것은 민간 전설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라녀는 국왕을 대신해서 적(거란)과 싸워 물리치고, 남편을 구해 온다는 내용이 중국 동북부 조선족에 전설로 내려옵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한다면, 발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는데, 이것은 북방 민족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려 시대에도 여성들은 재산권 및 자식들이 어머니 성을 따르는 사실 등 여성의 지위를 엿볼수 있는 자료가 많습니다.
18. 발해와 신라의 뱃길의 역사를 알고 싶습니다.
포시에트만 근처에서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 그 형태가 신라의 불상과 비슷하여 신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장에 나오는 이광현의 이야기를 봤을 때 발해-신라간의 해양 교류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10세기 초에 발해는 신라와 결속을 맺습니다. 당시 한반도 중부 지역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염주(현 포시에트만)와 경주를 잇는 해상 루트를 이용하여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9세기 발해의 국제상인단과의 연관성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19. 발해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일본 문인들은 발해 사절단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아마도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의 특성 때문이겠죠. 중국과 인접한 발해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외국인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발해 대사들의 한시 수준은 매우 높아 일본 문인들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종종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도 했답니다.
발해는 26회 발해 사절단때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해주었는데, 일본에서는 이것을 1684년까지 사용하였으며, 27회 발해사절단 때에는'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현재, 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습니다. 발해에서 전래된 발해악은 지금도 '아야키리'로 아악의 상연 종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20. 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규장각에 있을때 쓴 책이 바로 발해고입니다. 1784년에 유명한 발해고 서문을 썼는데, 이 서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국 시대를 제창한 사람이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성시켜 독자적인 역사서로 저술했던 분입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유득공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만 한국 역사가에서 유득공이 없었더라면 발해사는 한국사의 한 영역으로 평가받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본문에 들어가면 군고(왕에 대한 고찰 ),신고(신하에 대한 고찰),지리고(지리에 관한 고찰),직관고(관청 및 관직에 대한 고찰),의장고(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물산고(물산에 관한 고찰),국어고 (국어에 관한 고찰),국서고 (국서에 관한 고찰),속국고(후국에 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년 초에 송기호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발해고가 출판 되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역사학도나 발해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뒷 부문에 원문도 있습니다.
유득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은 정진헌 선생님이 쓰신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선원에서 나왔습니다.
발해 21-30문답
21. 발해의 영토는 가장 넓었을 때 어느 정도였습니까?
22. 발해가 요동지역을 차지했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3. 발해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4. 발해군을 지휘했던 장문휴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5. 발해에서 쓰던 무기 방어구 공성용무기 계열체계 진형, 기타등등이 궁금합니다.
26. 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27. 발해의 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8. 발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24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9. 발해 정혜 공주 무덤의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30. 발해 정효공주 무덤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21. 발해의 영토는 가장 넓었을 때 어느 정도였습니까?
발해의 영토는 전성기일때 사방 5천리였다고 합니다. 동쪽으로 연해주 지역을 포함해서 아무르 강까지, 서쪽으로 요동 지역, 남쪽으로 대동강, 원산 이남(강릉이 신라와의 경계선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북쪽으로 송화강 이북의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보여 줍니다.
물론 지방 수령들은 발해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죠.
22. 발해가 요동지역을 차지했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발해가 요동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는 학자는 많습니다. 하지만 요동반도 끝까지 발해 영토였는지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 10세기 초에 발해와 요는 요동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 결국 발해가 요동을 잃게 됩니다. 요사 기록을 살펴 본다면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 발해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의 유명한 장군은 장문휴 대장이겠죠. 당의 등주를 기습한 어쩌면 우리 나라 역사상 수군으로 해외 정벌을 지휘했던 첫 장군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 대진국 본기에 전하는 수비 장수 출신인 연충린 장군도 있지만 위서 논쟁으로 인해서 이 분이 실존한 인물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대진국 본기에는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군을 이끌었던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간 무관 출신 명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하는 장군 이름이 없습니다. 최근, 고고학에서 발견된 장군 이름도 있습니다. 러시아 니꼴라예브까성에서 발견된 청동 부절에 좌효위장군 '섭리계'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도 있었습니다. 이 성의 성주겠죠.
이 밖에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발해 멸망시에 3일 동안 부여성 방어 전투를 지휘한 성주, 924년 요나라의 요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장군, 문왕이나 선왕 시대때 정벌 전쟁에 참가한 장군, 장군은 아니지만 멸망 후 요와의 전쟁을 6개월간 이끌었던 장령부 도독, 기병대 7천을 이끌고 요와 싸운 압록부, 장령부, 남해부, 안변부, 정리부 도독, 포로로 잡혀 참살당한 안변부 두 장수, 철주 자사 항쟁 등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군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장군 밑에 있는 일반 병사들의 공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 전쟁에서 장군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겠죠.
24. 발해수군을 지휘했던 장문휴 대장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대장이라는 직책과 무왕의 명을 받고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 후 철수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부분은 알수가 없습니다. 추측한다면 장문휴 대장(중국에서는 해적 두목으로 봅니다.)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의 부장 출신일지도 모르죠.
전쟁의 경험 없이 당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할 것이고, 발해 최고의 군사 작전에서 경험이 많은 노장이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도 장문휴는 옛 고구려 해양 세력의 출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다를 아는 사람만이 당의 등주를 기습할 수 있겠죠. 물론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25. 발해에서 쓰던 무기 방어구 공성용무기 계열체계 진형, 기타등등이 궁금합니다.
발해 중앙 군대는 10위가 있었습니다.좌맹분위, 우맹분위, 좌비위, 우비위, 좌웅위, 우웅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입니다. 이 곳에 대장군 1명, 장군 1명이 배치되었죠.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이 발해 군사 제도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었을 것입니다.
고려로 망명한 좌수위 소장 모두간이나, 일본에 파견된 낭장 고인 등 별도의 명칭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느 소속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발해가 쓰는 무기. 방어구 등은 고구려 시대와 비슷하겠죠. 사료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발견되고 있는 유물 등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수도를 다섯 군데로 분산시켜 방어력을 높이고자 했으나 상경 지역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원적 방어 체제가 아니라서 문제점을 많이 노출 시켰습니다. 외성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 한 부분이 뚫히면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26. 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곳이 서경 압록부와 동경 용원부입니다. 나머지 3경의 위치는 학계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습니다. 서경 압록부의 경우 대체적으로 임강진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발견되는 유물. 유적이 적어서 이 곳에 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집안 지역을 서경으로 보기도 하며, 집안에서 임강진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동경의 경우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기에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27.발해의 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 시대 탑의 경우 영광탑이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외에 정효공주 무덤 위에 탑이 존재했으며,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훈춘의 마적달탑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마적달탑을 찍은 사진이 없기에 그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마적달탑을 문왕의 아들인 대굉림을 위해 건설한 탑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발해 탑의 특징은 무덤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궁이라는 무덤칸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의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전탑 위주입니다. 한반도 남부가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 위주에 반해서 발해는 전탑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영향이 아닐까 싶네요.
28. 발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24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24괴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춧돌입니다. 연변대학에서 나온 발해사 연구2에 보시면 이 주춧돌에 대한 보고서와 논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24괴석 위에 있던 건축물이 어떤 용도였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관아에서 사용된 건축물, 곡식창고까지 다양합니다. 공통된 점이라면 이 괴석이 발견되는 곳이 성입니다. 즉, 발해 시대 행정 중심지이던 성에서 발견되는 만큼 공공성을 띈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9. 발해 정혜 공주 무덤의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혜 공주묘의 건축 양식은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 무덤(석실봉토분)입니다. 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길이 있으며, 여기서 널길을 통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정은 고구려 무덤에서 특징적인 각을 줄여 쌓는 고임천정 방식입니다. 정혜 공주는 777년, 정효 공주는 792년에 사망하였는데 불과 15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정효 공주묘는 대부분 당나라 형식입니다. 천정 구조만 제외하면, 전탑 형식에 당 화풍의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문왕 초기까지 고구려 전통이 강했지만, 문왕 중기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당 문화 수용의 영향으로 무덤에도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30. 발해 정효공주 무덤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효공주 묘는 계단식 벽돌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돌방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정혜공주묘와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정혜공주묘는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무덤이지만,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돌로 쌓았습니다. 현실을 벽돌로 쌓아서 당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천장은 고구려 방식으로, 무덤 위에 벽돌탑이 있는 것은 발해 고유의 특징입니다.
계단으로 통해서 현실로 들어가기 때문에,굴식일 경우 지면과 수평으로 판널길을 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굴식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라고 하기에는 정효공주묘는 탑 아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굴식 돌방 무덤은 아닙니다. 벽돌 무덤에 가깝다고 봅니다. 물론, 고구려. 당. 발해적 요소가 모두 섞인 독특한 무덤 양식이지만, 당나라 요소가 강합니다. 벽화 역시 당풍이 강하죠.
마지막으로 발해가 아니라 대진국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정효공주묘지명을 보면 "발해황상"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발해의 황제란 표현인데 발해사람이 스스로의 국가를 발해라고 했는데 어째서 대진국이란 말이 나올수가 있죠? 대진국은 분명 아닙니다. 발해가 옳바른 국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