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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믿음으로
사도행전 15:1-32
2024년11월10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사도행전 15장은 기독교 최초 종교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된 이유와 그 때의 결정 사항을 기록했습니다.
15장 말미에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에 관한 기사가 시작되어 사도행전 18장 22절까지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에 관한 기사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입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와 2차 전도 사이에 예루살렘 공의회에 관한 기사가 들어간 이유는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전도의 걸림돌을 제거하여, 이방인 전도에 탄력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믿게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구약 여러 구절에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을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문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수단이나 과정을 거쳐 믿음의 공동체에 이방인들을 들어오게 하시는가 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에 들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 이방인들도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존 스토트, 사도행전, ivp, 1992, 284).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이방인 회심자들이 할례 없이 세례를 받으면, 기독교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교제하게 되는 것에 대해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또한 예수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야웨 하나님을 같은 주로 믿는 일입니다.
유대인 출신 예수 신자들은 이방인들의 할례 없는 회심, 율법의 행위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 유대교에 들어오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혼란스럽게 여겼습니다(존 스토트, 284).
헨챈(Haenchen)은 "15장은 전환점, 이 책의 중심부요 분수령, 과거의 진전을 마무리하고 정당화하는 사건, 그리고 앞으로 있을 발전을 본질적으로 가능케한다."고 했습니다(Hanenchen, 461, 재인용 존 스토트, 284).
15장을 기점으로 베드로는 사라지고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아시아, 유럽으로 나아가며, 예루살렘 보다 로마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 결론은 복음을 유대교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고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게 했습니다.
또 그 결정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화목된 백성,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자각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계시된 비밀,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도 유대인과 대등하게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고, '함께 상속자요 지체요 참여자'가 되는 것임을 말했습니다(엡 3:2-6; 존 스토트, 284-5).
초대 교회는 외적으로는 박해가 있었고, 내적으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 갈등으로 교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사도행전 15장이 알려줍니다.
사도행전 15:1-(쉬운성경)
[1] 유대에서 몇 사람이 내려와서 이방 사람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여러분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큰 다툼과 논쟁이 벌어졌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른 믿는 이들도 몇 사람 딸려 보내기로 하였다.
이 문제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3] 그들은 교회의 보냄을 받고 길을 떠나,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이방 사람들이 참 하나님께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믿는 이들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4]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자,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해 주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몇 사람이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이방 사람들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여야 합니다.”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간 어떤 사람들이 복음에 벗어난 교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했습니다.
최초의 할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창 세 기 17:9-14 KOERV(쉬운성경)
[9]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제 이 계약에서 네가 지켜야 할 부분을 일러주겠다. 너뿐만 아니라 네 자손들이 대대로 이 계약을 지켜야한다.
[10] 내가 너와 네 자손들과 맺는 계약은 이러하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
[11] 너희는 남자의 성기 끝을 잘라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이다.
[12]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사내아이는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 사온 종들도 비록 너희의 자식은 아니지만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집에서 태어난 종이든 돈을 주고 사온 종이든 그들도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나의 영원한 계약을 너희 몸에 표로 새기는 것이다. [14] 그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는 자기 겨레에게서 끊어져 쫓겨날 것이다. 그가 나와 맺은 계약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백성과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는 구원받은 자의 표징이지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은 율법주의 사고의 틀에 갇혀 있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할례나 율법의 준수나 어떤 행위가 구원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곡해하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중에 몇몇이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유대주의자들로 인하여 혼란이 야기 되었습니다.
유대로부터 내려 온 그들은 안디옥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하여 바클레이는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체 정신적 배경은 자기들이 선민에 속해 있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상 실제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저들의 각별한 소유라고 믿고 있었다(바클레이 사도행전 주석).”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교회에 내려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 예수 신자들처럼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복음 주의자들 즉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형제들을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은 후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이방 선교에 대한 소식을 전하므로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교회나 노회에서 풀지 못하는 사안을 상회인 총회로 헌의한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에 아직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지역 교회 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을 상회 기관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답을 얻으려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갈 때 지중해 연안 베니게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3절), 즉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과 그 외 지역의 이방인들에 대한 1차 전도의 열매를 알리면서 경유지 신자들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교회에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 즉 1차 전도 결과를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를 듣던 바리새파 출신의 어떤 교인이 이방인의 할례 준수를 주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다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6]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의논하려고 모였다.
[7] 오랫동안 토론한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저를 택하셔서, 저를 통해 이방 사람들이 기쁜 소식의 말씀을 듣고 믿도록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8] 그리고 사람의 속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방 사람에게도 성령을 주심으로써, 이방 사람들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10]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분은, 이 이방인 제자들의 목에 무거운 멍에를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합니까? 이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조상들도 질 수 없었던 멍에입니다.
[11]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도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고, 예수를 믿었으며, 성령을 받았고, 믿음으로 정결케 즉 의롭게 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똑같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행 15:9).
하나님은 성령을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주셨습니다(8).
유대인도 이방인도 은혜로 구원얻은 것입니다(11).
은혜와 믿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등하게 하고 형제 자매 교제가 가능케 합니다(존 스토트, 290).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입을 다물고,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들을 통하여 행하신 기적과 놀라운 일들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공의회 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 그리스인들에게, 더이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13] 그들이 이야기를 마친 뒤에 야고보가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 제 말을 들으십시오.
[14]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 가운데서 한 백성을 뽑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처음에 어떻게 보이셨는지 시몬이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15] 그리고 예언자들의 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과 들어맞습니다. 예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6] ‘이 뒤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세울 것이다. 나는 그 집의 허물어진 곳을 다시 지어서 새 집으로 지어 놓겠다.
[17] 그리하여 모든 사람 곧 내가 내 백성으로 부른 모든 이방 사람까지도 나 주를 찾을 것이다. 이 일들을 이루는 주께서 말씀하신다.
[18] 주께서는 이 일들을 오래 전부터 알게 하셨다.’
[19]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을 먹지 말고, 부도덕한 성 관계를 갖지 말며, 목 졸라 죽인 짐승이나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21] 예로부터 어느 도시에나 모세의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이러한 법들이 읽히고 있습니다.”
13-21의 야고보는 예수님 동생들 중 한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막 6:2; 행 1:14).
그는 신약 그의 서신서에서 구원의 믿음은 사랑의 선행과 선한 열매와 위선이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약 3:17).
그는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갈 1:19).
그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12:17; 갈 2:9).
그는 예루살렘 총회 의장이었습니다(존 스토트, 291).
15-18에서 야고보가 암 9:11-12를 인용했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폐지된 다윗 왕가를 재건하심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 자손으로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눅 1:32-33).
"그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영음사, 1981, 329).
19절에 이방인 중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괴롭게 말라"는 짐 지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구원 얻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을 부담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박윤선, 329).
예를 들면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0에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 앞에 바친 제물인데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계 2:14; 고전 10:14-22).
"음행을 말리하라"합니다.
정결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미혼자도 성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으로 봅니다.
혹은 피는 생명의 상징이니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박윤선, 330).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쏟지 않은 짐승을 먹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과도기 규례입니다.
예수 신자들은 소, 양, 염소 뿐만 아니라 돼지나 다른 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피를 삶은 선지국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일에 덕을 세우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1절은 20절 금령을 이방인 신자들이 지키도록 하는 이유는 유대인 출신 예수 신자들이 그 금령과 같은 의식의 인습을 가졌으니 이방인 예수 신자로서 덕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유대인 예수 신자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 글을 읽습니다(참고 빅윤선,330).
[22] 그리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온 교회의 동의를 얻어서, 몇 사람을 대표로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지도자인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를 뽑아 보냈다.
[23] 그리고 그들 편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들인 사도들과 장로들이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인 형제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24] 우리 가운데서 몇 사람이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여러 말로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5] 우리는 대표를 뽑아서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26] 바나바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그래서 우리는 유다와 실라를 보냅니다. 두 사람은 이 편지에 적힌 내용을 직접 말로도 확인하여 줄 것입니다.
[28] 다음과 같이 꼭 필요한 것 몇 가지 말고는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성령께도 우리에게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29]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도덕한 성 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멀리하시면 아주 잘 하시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이 혐오하는 것-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삼갈 것을 촉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짐’을, 다시 말해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성령과 우리’입니다.
그와 같은 결정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혹 나와 불협화음 속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쪽이 모두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 있으면 아름다운 화음을 낼 수 있습니다.
[30] 그들은 보냄을 받고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온 회중을 모아 놓고 그 편지를 전해 주었다.
[31] 사람들은 그 편지를 읽고, 용기를 주는 내용에 무척 기뻐하였다.
‘그들’이란 안디옥 교회의 공동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와 실라입니다.
그들은 함께 안디옥으로 내려가 교인들에게 사도들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결내용을 ‘위로한 말’, ‘권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판결내용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런 회의 결과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할례의 복음이 아니라 세례의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서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까지는 약 500km나 됩니다.
왕복이면 1,000km나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거기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는 할례의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또 베드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평소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집을 찾아가 그곳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수고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할례의 복음’이 아니라 ‘세례의 복음’이라는 기쁨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32] 예언자인 유다와 실라는 많은 말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주었다.
[33] 두 사람은 한동안 그곳에서 지낸 뒤에, 형제들에게서 평안히 가라는 인사를 받고 자기들을 보낸 사람들에게로돌아갔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 공의회 판결 내용을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도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믿음을 굳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한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구약의 할례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약 시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 관계 표시였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할례 대신 물세레와 성령 세례가 베풀어집니다.
물 세례는 예수를 믿는 자의 믿음의 표시로서 공적으로 시행됩니다.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를 주님으로 마음에 모시는 자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의 은혜 속에, 성령의 인도 중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 자손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