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형조 정랑 김공 묘갈명 병서
(刑曹正郞金公墓碣銘 幷序)
우리 조선조는 불행하게도 사림들이 연달아 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 기절이 꺾이지 아니하여 마치 돌이 눌러도 죽순이 나오는 것과 같았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선비를 배양한 교화와 원로 학자들이 가르친 은택을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경종 원년(1721)과 2년(1722) 사이에 여러 간흉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오직 살육하는 것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경상(卿相)으로부터 아래로는 포의(布衣)들에 이르고, 어린아이와 부녀자와 하인과 군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멸망하여 거의 없어졌다. 화의 혹독함이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니, 선비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한숨을 내쉬지 못하였다.
오직 김공 정오(金公 定五)는 현감으로 있다가 파직되고 공주의 마을에 은거하여 의연히 털끝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소재(疎齋)와 이우(二憂) 두 공의 상여가 지나갈 때에는 즉시 면추(綿芻)로 곡하고 제전(祭奠)을 올려, 도끼 바탕〔碪〕과 도끼〔鈇〕를 하찮게 보았다.
이때 여러 간흉들이 이미 뜻을 펼쳐 앙갚음을 하고는 ‘토역(討逆)’이라 이름하여 경사라 칭하고 과거를 보였는데, 같은 마을의 무인(武人)이 이 과거에 급제하자, 공은 이를 미워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당부해서 그 사람을 상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흉도들은 이것을 정탐하여 알고는 급히 공을 조사하여 죄를 물어서 일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는데, 공은 조사를 받으면서 흔들리지 않고 바른 말씀으로 정직하게 대응하여, 여러 번 협박하였으나 끝내 변함이 없었다. 흉도들은 몹시 분개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어 마침내 순창군(淳昌郡)으로 유배 보내니, 이에 듣는 자들이 장하게 여기고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어서 명성이 하루 만에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내 이때 북관(北關)의 변방으로 멀리 귀양 가 있었는데, 어떤 손님이 찾아와서 나에게 묻기를,
“김공은 어떠한 분이기에 이와 같이 곧바로 화를 범하였습니까?”
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는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옛날 ‘신무문(神武門)의 화’에 대사성 김식(金湜)의 귀양 가는 길을 전별하고 인하여 거짓 미친 체해서 세상에 은둔한 분이 있었으니, 김공은 바로 그분의 후손이다. 영지(靈芝)는 근본이 있고 예천(醴泉)은 근원이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김공은 일찍이 사론(士論)을 창도하여 경전을 훼손한 정승을 배척하고 또 글을 올려 국모를 무시하는 역적을 성토하였으니, 그 기절을 이미 볼 수 있다.” 이에 듣는 자들은 “예, 예”라고 대답하고 떠나갔다. 이듬해에 국가가 다시 교화를 펼쳐서 뇌우(雷雨)가 풀려 공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내가 외람되게 천관(天官)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채택해서 첫 번째로 공에게 옛 직함인 현감을 회복시켰다. 이어서 공은 세 번 전직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얼마 후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승진하였다가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 오래 있다가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으로 나갔는데, 얼마 안 있다가 무신년(1728, 영조 4)의 변고가 일어나니, 황공 선(黃公璿)이 영남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 공과 함께 계책을 내어 적을 막았다.
공은 마침내 군사들을 단속하고 창과 병기를 수리하고 식량과 미숫가루를 저축하고서, 순국하기로 맹세하고는 편지를 자제들에게 보내어 결별하고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윽고 영남의 적이 패하였으나 황공이 갑자기 별세하니, 적의 세력이 다시 떨쳐서 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은 지붕만 쳐다보고 길이 탄식하였다.
황공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은 자가 공을 미워하여 하고(下考)에 두자, 공은 깨끗이 돌아와서 문을 닫고 높이 누워 서재 이름을 ‘노포(老圃)’라 하였다. 당세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안부를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고, 내방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피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공은 이때 나이가 70이었고, 둘째 아우와 막내아우 두 분 또한 늙어 머리가 세었다. 3형제분이 백발에 구공(鳩筇)으로 아침저녁에 모여 즐거워해서 풍류를 사모할 만하니, 한 지방이 부러워하며 칭찬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735, 영조 11) 11월 13일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6세이다.
온양의 신풍리(新豐里)에 장례하였다. 배위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좌랑 위(偉)의 딸인데 일찍 별세하여 자식이 없었고, 계배(繼配) 신천 강씨(信川康氏)는 선비 후익(侯翊)의 딸로 두 딸을 두었는데, 유언섭(兪彦燮)과 민첨(閔䄡)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아우의 아들 명집(命集)을 양자로 삼았는데, 명집이 다섯 아들을 낳았으니, 색(穡)과 확(穫)이고 나머지 세 아들과 한 딸은 모두 어리다. 유씨 사위는 한 딸을 두었는데 어리고, 민씨 사위의 아들은 효창(孝昌)이며 나머지 한 아들과 한 딸은 모두 어리다.
공은 자가 여일(汝一)이고 안산(安山) 사람이니, 계통이 고려조에 복야(僕射)를 지낸 긍필(肯弼)에게서 나왔다. 본조에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위정공(威靖公)인 정경(定卿)과 판중추부사로 시호가 평호공(平胡公)인 개(漑)는 부자가 연달아 현달하여 혁혁하였다.
평호공의 아들 맹강(孟鋼)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감(校勘)이고, 교감의 아들 필(珌)은 문과에 장원하였으니, 바로 거짓 미친 체한 분으로 호가 모기재(慕箕齋)인데, 공의 6대조이다. 증조 휘 희현(希賢)은 선교랑(宣敎郞)이고 조고 휘 재건(在鍵)은 통덕랑으로 호가 운봉(雲峰)이며, 선고 휘 시성(始聲)은 광릉 참봉(光陵參奉)으로 호가 도계(陶溪)인데, 두 대가 모두 훌륭한 행실로 알려졌다. 선비 파평 윤씨는 통덕랑 평(坪)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오년(1702) 휘릉 참봉(徽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전직하여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와 선공감 직장을 역임하였다. 부친상을 당했다가 상을 마치고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에 제수되었으며, 전직하여 장원서 직장ㆍ종부시 주부ㆍ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공은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가서 고을을 다스림이 마땅함을 얻으니, 아전들이 단속되고 백성들이 그리워하였으나 도백에게 거슬려 파직 당하고 돌아왔으며, 이어 세상일이 크게 변하여 마침내 제구(鞮屨)의 걸음이 있게 되었다. 공은 가정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 모친을 잃은 것을 애통하여 도계공을 섬김에 효성을 극진히 하니, 보통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일이 많았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더욱 힘써서 남쪽 고을에 있을 적에 제찬을 크게 진설하여 위정공(威靖公)을 제사하였으며, 제기(祭器)를 마련하고 묘표와 비갈을 세웠다. 또한 일찍이 관청에 있으면서 사당에 있는 모기공(慕箕公)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하였으며, 여러 집안들과 약속하여 해마다 한 번씩 친진(親盡)한 묘소에 제사를 지내었다.
두 아우와 집을 나누지 않고 한집에서 살았으며, 아우들의 가난함을 딱하게 여겨 특별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백씨가 일찍 별세하고 아들이 없자 고아가 된 딸을 시집보내어 보살폈다. 늙은 누님을 어머니처럼 섬기고 온 고을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법도를 따르게 하고, 관장의 옳고 그름과 조정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도록 금하였다.
성품이 근신하여 스스로 봉양하기를 질박하고 누추하게 하였으며, 부역을 반드시 백성들보다 먼저 하고 높은 관원에게 관절(關節)을 통하지 않았다. 도계공이 향학(鄕學)을 세우기를 대략 손명복(孫明復)의 고사와 같이 하여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났는데, 공은 인하여 이것을 닦고 밝혀서 오랫동안 침체하지 않게 하였다.
우암 선생을 높이 사모하고 농암(農巖 김창협)을 좋아하여 그의 책을 읽고 깊이 음미하였고, 중승(中丞) 조성복(趙聖復)의 억울함을 슬퍼하여 특별히 비호하고 보살폈으며, 말씀이 그에게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니, 풍의(風儀)의 돈독함이 이와 같았다.
아, 기묘년과 신축년에는 환란이 서로 이어졌는데, 공의 집안은 앞뒤로 사화를 만나 함께 높은 지절을 세웠다. 공이 두 분(이이명과 조태채)의 상여를 맞이하여 곡한 것은 모기공(慕箕公)이 교외에 나가 귀양 가는 길을 전별한 의리이고, 공이 시골에 물러나 살면서 입을 다물고 한탄한 것은 미친 사람에 의탁하여 스스로 은둔한 모기공의 마음이었으니, 공은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조의 일을 잘 이은 자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교감공(校勘公)의 외손이어서 공과 정분이 매우 두터우니, 이제 묘갈문을 부탁함에 어찌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나약하여 / 世常恨挽近士趨之骫骳
고인의 풍모와 절개를 따르는 이 적음을 한하였는데 / 鮮能追古人之風節
이제 공을 가지고 살펴보면 / 今以公觀之
어찌 반드시 옛날의 명철들보다 많이 뒤지겠는가 / 奚必多遜於往哲
만약 내가 고금을 견주어 논한다면 / 如使我比挈今古而眇論
진실로 마땅히 당고 제현의 열에 두어야 하네 / 允合寘公於黨錮諸賢之列
---------------------------------------------------------------------------------------------------------------------------------------------------
[脚註]
[주01] 소재(疎齋)와 이우(二憂) :
소재는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호이고 이우는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1660~1722)로, 이들은 소위 노론 사대신
중의 두 명인데, 이때 사사되었다.
[주02] 면추(綿芻) :
면주(綿酒)와 생추(生芻)로, 소박한 제수(祭需)를 이른다. 면주는 솜에 적신 술로, 옛날 먼 곳으로 조문 갈 때 휴대하기에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술을 솜에 적셔 닭 속에 넣어가지고 갔던 데서 유래하였고, 생추는 새로 베어 싱싱한 풀로, 후한 때 명사인 서치(徐穉)
가 곽태(郭泰)의 모친상에 조문하러 갔다가 가난하여 제수를 마련하지 못하자 생추 한 다발을 놓아두고 상주(喪主)를 보지 않은 채
돌아간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53 徐穉傳》
[주03] 도끼 …… 보았다 :
주인공 김정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도끼 바탕〔碪〕은 참수대(斬首臺)이고 도끼〔鈇〕는 참수하는 도끼이
다.
[주04] 신무문(神武門)의 화 :
중종 14년(1519)에 발발한 기묘사화를 말한다. 이는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의 훈구파들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를
모함하여 제거한 사건인데, 이때 훈구파들이 중종의 밀지를 받고 몰래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왔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05] 영지(靈芝)는 …… 있으니 :
훌륭한 조상이 있어야 훌륭한 자손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영지는 신령한 약초이고 예천은 맛이 감미로운 샘으로 모두 상서로운 물건
인데, 이들은 나라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주06] 경전을 …… 배척 :
당시 영상으로 있던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예기유편(禮記類編)》의 주석 일부가 주자의 설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노론 측에서
배척한 일을 가리킨다.
[주07] 뇌우(雷雨)가 풀려 :
임금의 사면(赦免)이 내림을 뜻한다. 이는《주역》〈해괘(解卦) 상(象)〉의 “우레와 비가 일어남이 해(解)이니, 군자가 보고서 잘못
을 저지른 자를 사면하고 죄 있는 자를 너그럽게 처리한다.〔雷雨作解, 君子以, 赦過宥罪.〕”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해괘(")는 우
레를 상징하는 진(震 )과 비를 상징하는 감(坎 )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우레와 비가 일어남이 해’라고 말한 것이다.
[주08] 하고(下考) :
근무 고과에서 하등(下等)을 받는 것을 이른다. 외직의 경우 고과에서 하고를 받으면 바로 파직되었다. 조선조에서 관리의 성적을 고
과할 적에, 관장(官長)은 부하의 성적을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 임금에게 보고하는데, 외관(外官)은 8자로, 경관(京官)은 4자로
평을 달되 상ㆍ중ㆍ하의 3등으로 구별하여 포폄하였다.《大典會通 吏典 考課》
[주09] 구공(鳩筇) :
손잡이 부분을 비둘기 모양으로 조각한 지팡이로, 예전에 임금이 나이 많은 신하에게 비둘기처럼 소화를 잘 시키라는 의미에서 내려
주었는데, 구장(鳩杖)이라고도 한다.《後漢書 志5 禮儀中》《呂氏春秋 仲秋記》
[주10] 교감(校勘) :
승문원(承文院)의 종4품 벼슬로 1465(세조11)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주로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일을 담당하였
다.
[주11] 제구(鞮屨)의 걸음 :
유배(流配)를 이른다. 제구는 가죽신으로 대부(大夫)와 사(士)가 나라를 떠나갈 때 신는 신발이다. 원래 상주가 신는 신인데, 신하가
벼슬자리를 잃고 수도를 떠나는 것은 한 집안의 변고이기 때문에 흉상(凶喪)을 당한 예로써 자처하는 것이다.《禮記 曲禮下》
[주12] 친진(親盡)한 묘소 :
친진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대수가 다한 것을 말하는데, 천자는 6대, 나머지는 4대까지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 《주자가례(朱子
家禮)》에는 사서인의 경우 고조까지만 사당에 모시고 5대 이상은 친진조(親盡祖)라 하여 제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5대 이상의 선조에게 1년에 한 번씩 묘제(墓祭)를 지내며 이것을 ‘세일제(歲一祭)’라 칭하였다.
[주13] 온 …… 것 :
지방관이 되어 누님을 잘 봉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옛날 지방의 수령이 되어 부모를 모시는 것을 ‘전성지양(專城之養)’이라 한 데
서 유래하였다.
[주14] 관절(關節)을 통하지 :
요로에 뇌물을 바치고 청탁하는 것을 이른다. 관절은 뼈마디로서 인체의 요긴한 부분이기 때문에 관료조직에서의 요로를 뜻한다.
[주15] 손명복(孫明復) :
북송의 학자인 손복(孫復)으로, 명복은 그의 자이며, 호는 수양자(睢陽子)이고 평양(平陽) 사람이다. 벼슬이 국자감 직강과 전중승
(殿中丞)에 이르렀는데, 호원(胡瑗)과 함께 태학과 향학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그가 태산(泰山)에 살았으므로 그의 학파를 태산학파
라 부른다.
[주16] 중승(中丞) 조성복(趙聖復)의 억울함 :
중승은 어사중승으로 조선조의 집의에 해당한다. 조성복(1681~1723)은 자가 사극(士克), 호가 퇴수재(退修齋)이며, 본관이 풍양
(豊壤)이다. 1721년(경종 1) 집의로 있으면서 노론을 대표하여 경종에게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소를 올려 경종의 재가를
받았으나, 소론측이 무군부도(無君不道)의 죄로 몰아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이듬해 정의(旌義)에 위리안치되었다. 1723년 다시
잡혀 와 국문을 받던 중 옥중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주17] 교감공(校勘公)의 외손 :
교감공은 주인공의 7대조로 교감 벼슬을 한 김맹강(金孟鋼)을 이른다. 도곡의 8대조 이종형(李宗蘅)의 부인인 안산 김씨가 김맹강
의 따님이므로, 도곡이 자신을 외손이라 한 것이다.
[주18] 당고 제현 :
붕당을 한다는 죄목으로 금고당한 여러 현자들을 이른다. 후한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에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범방(范
滂)ㆍ두무(竇武) 등이 발호하는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당인(黨人)으로 지목을 받고 금고의 화를 당하였으며, 북송 때에는
채경(蔡京)ㆍ장돈(章惇) 등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한 정이(程頤)와 소식(蘇軾)ㆍ유안세(劉安世) 등을 원우 당인
(元祐黨人)이라 하여 박해를 가했으며, 남송 때에는 한탁주(韓侂冑) 등이 주희(朱熹) 등을 위학당(僞學黨)이라 몰아 금고하였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宋史 卷471 章惇列傳》《宋史 卷472 蔡京列傳》《宋史 卷474 韓侂冑列傳》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황교은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5
-------------------------------------------------------------------------------------------------------------------------------------------------------
[原文]
我朝不幸, 士林連受禍殃。 然其氣節不挫, 如石壓而筍出, 祖宗培養之化、儒老敎思之澤, 不可誣已。 景宗元二之間, 群凶堵立, 惟殺戮是尙。 上自卿相下至韋布, 以及童孺、婦女、儓隷、軍卒, 無不夷滅殆盡。 禍事之酷, 千古所未有, 士皆惴惴不敢出一氣。
唯金公定五罷縣宰, 里居公州, 毅然不動一髮。 當疎齋、二憂兩公輤車之過, 卽綿芻哭奠, 傲視砧鈇。 時群凶旣逞志施快, 名之曰討逆, 稱慶設科。 有同里武人占是科, 公惡之, 飭里閭勿使接應。 凶徒詗知之, 亟請追公鉤問, 事機叵測。 公對簿不撓, 正言直說, 屢迫而終亡變。 凶徒恚甚, 顧無如公何, 遂竄之淳昌郡。 於是聞者莫不壯而義之, 名一日傳四方。
余方遠謫關塞, 客有問余者曰: “金公是何如人, 而直犯火色乃爾?” 余曰: “是固當如此。 在昔神武之禍, 餞金大成湜謫行, 仍佯狂逃世者有之, 夫夫其耳孫也。 芝本醴源, 烏得不然? 且金公曾倡起士論, 斥毁經之相, 又上章聲罪無母之賊, 其氣節已可見矣。” 聞者唯唯。
其明年, 國家更化, 雷雨作解, 公得放還。 余忝長天官, 採公議首復舊御。 三轉爲義禁都事, 俄陞社稷令, 改刑曹正郞。
久之, 出省峴察訪。 亡何, 戊申之變作, 黃公璿按嶺南, 與公合謀禦賊。 公遂團束軍伍, 修戈矛峙糗糧, 誓死殉國, 爲書訣子弟, 奮袂而起。 已而嶺賊敗衄, 而黃公暴卒。 賊勢復張, 事無可爲者, 公仰屋長吁。
代黃公莅事者, 嗛公寘下考, 公浩然而歸, 杜門高臥, 名其軒曰老圃, 絶當世念。 時輩問訊, 不報謝; 有欲來訪, 避不見。 公時年七十, 仲、季二公亦老白首。 鶴鬢鳩筇, 日夕湛樂, 風流可挹, 一鄕艶稱。
以乙卯十一月十三日, 疾卒, 享年七十六。 葬于溫陽新豐里。 配全州柳氏, 佐郞偉女, 早卒無育。 繼配信川康氏, 士人侯翊女, 有二女: 適兪彦燮、閔䄡。 公以弟之子命集爲後。 命集生五子: 曰穡, 曰穫, 餘三子與一女竝幼。 兪有一女, 幼。 閔子孝昌, 餘一子一女竝幼。
公字汝一, 安山人。 胄出新羅敬順王。 本朝蓮城君・威靖公定卿、判中樞・平胡公漑, 仍父子顯赫。 平胡子孟鋼, 文科校勘。 校勘之子珌, 文科壯元, 卽佯狂者, 號慕箕齋, 公六代祖也。 曾祖諱希賢, 宣敎郞; 祖諱在鍵, 通德郞, 號雲峯; 考諱始聲, 光陵參奉, 號陶溪, 兩世俱以行誼聞。 妣坡平尹氏, 通德郞玶女。
公於肅宗己卯, 中生員試。 壬午, 除徽陵參奉。 再轉掌苑奉事、繕工直長。 丁外憂, 憂吉, 除平市奉事, 轉掌苑直長、宗簿主簿、司憲監察。 出監知禮縣, 政理得宜, 吏戢民懷, 忤方伯罷歸。 仍値時事大變, 遂有鞮屨之行。
公內行純至。 痛早失恃, 事陶溪公盡孝, 多人所難及。 尤力於奉先, 在南縣盛設具祀威靖, 偫祭器, 樹表碣。 亦嘗官奉慕箕公廟主以祭, 約諸宗歲一祭親盡墓。 與二弟不分宅, 閔其貧, 別爲析箸。 伯氏夭歿無子, 嫁孤女而育之。 母事老姊, 以未及專城養爲恨。 敎子弟必循軌則, 禁勿言官長是非、朝廷得失。
性謹愼, 自奉樸陋, 賦役必先於小民, 關節不通於達官。 陶溪公立鄕學, 略如孫明復故事, 文敎蔚然, 公仍修明之, 久而不替。 尊慕尤菴先生, 愛好農巖, 讀其書而深味之。 哀趙中丞聖復冤, 護視加等, 語及必涕, 風義之篤如此。
噫! 己卯、辛丑, 禍亂相望, 公家先後遭値, 俱有樹立。 迎哭兩輤, 出郊餞行之義也; 屛居喑噫, 托狂自晦之心也, 公可謂善繼述者矣。 余自出校勘, 與公事契甚厚。 今於墓文之托, 安可以老病爲辭? 銘曰:
世常恨挽近士趨之骫骳, 鮮能追古人之風節。 今以公觀之, 奚必多遜於往哲? 如使我比挈今古而眇論, 允合寘公於黨錮諸賢之列。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