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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에서는 백중 입재하시는 분들로 이른 아침부터 북적북적하고, 현관에서 법회보를 나누며 반갑게 형제들을 맞이하시는 17구 봉사팀, 안내 데스크 및, 27구 엘리베이터 봉사팀들은 빈틈없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니 그 모습들 멋집니다.
데스크 안내 및 법당 안내팀이 일찍 보광당 입구에서 법당에 오시는 불광 형제여러분들을 맞이하시고 강남구, 강동 1, 2, 3구에서 는 떡과 생수를 준비하여 직접 법회오시는 분들께 배분하고 계십니다.
현진 거사님께서 법당을 맑히시는 천수경 독경 및 타종 후, 부처님 전에 현향, 헌다를 올립니다. 혜안거사님의 법회 시작 말씀으로 불광 법회의 일요법회가 시작됩니다.
백중 입재일인 오늘 법회 보광당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불광형제들로 가득찬 일요법회 현장. 청정승 모시고 재정투명화를 이루어 정법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 불광 형제들의 간절한 바람을 주지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외면하시며 저희를 아프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요법회 오셔서 속 시원하게 말씀을 해주시면 안되시는 것일까요?
금주의 법문 : 여여법사(문사수법회)
금주의 법어 : 볶은 씨앗을 심으려는가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다 보니까 무척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 만나 보면 오히려 할 얘기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침 귀한 날 이지요 우리가 우란분재 모시면서 이제 공양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 뜻 깊은 날을 맞으면서 아까 우리가 수희공덕분을 같이 올렸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생명이라는 한 몸 자리에서 오늘 법문을 시작할까 합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왼손을 먼저 내보십시오. 그 다음에 오른 손을 내미십시오. 그 다음에 합장을 해 보십시오. 제가 먼저 선창을 하겠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 생명입니다”. 이게 합장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단순한 에티켓이 아닙니다. 다시 얘기하면 생명이 원래 가야 될 곳이 아니라 출발점이, 우리가 한 생명 자리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요즘들 시끄럽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기가 왜 이럴까? 또는 내 부모 자식 간에 왜 이럴까? 또는 국가 살림살이가 왜 이럴까? 수많은 걱정과 근심이 우리 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습니다. 모든 것들은 결과를 보면서 내가 판정 하고 있는 거죠. 알고 보면 그러합니다. 세상살이라는 게 우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첫째, 부처님의 기본 입장은 인과론자라는 말, 제가 그런 말씀 드린 기억이 나는데, 결국 세상살이라는 것이 인과론자요, 그 인과론을 끝없이 믿는 사람이 세상살이를 정진해 가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합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는 것을 우리 어른들께서는 속담으로 남기고 계십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아마 우리에게 익숙한 이 속담 모르시는 분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나게 심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것을 제켜 놓고 좋은 결과를 바라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그럴 때 콩밭에다가 우리는 콩 밭에 팥을 심어 놓고 콩을 바라는 사람 사실 없습니다. 또 하나 뒤집어서 팥이라고 하는 결과물을 바라는데 콩을 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심었는지는 관계없이 콩과 팥이라고 하는 내가 갖고 있는 바람직한 결과를 앞세울 때 우리는 괴롭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은 그런 얘기 합니다. 어떤 분은 오해를 해 갖고요. 불교를 괴로움의 종교라고 얘기하는 분까지 있더라고요. 불교를 하면 안온하지 못하고 괴롭다 이런 얘기까지 하는 분을 제가 봤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 엄청난 오해입니다. 나를 앞세우고, 결과를 앞세우다 보니까 괴로움이라는 현상이 나타나죠.
결국은 나는 무엇을 심었는가라고 하는 자기가 씨 심은 것에 대한 반성의 시점이 내 인생의 출발인데도 이것은 안하고 결과를 바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습니다. 흔히들 인과를 믿습니까하면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무슨 그런 얘기 냥, 이상한 괴기로운 얘기를 합니다마는 사실 인과라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말고 없이 우주적 법칙이기 때문에 지금 언제 어느 곳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발생하고 있는 것이 인과법이죠. 그러니까 인과법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부터 내 인생의 관건이 시작이 된다고 그랬어요.
멀리 가고 할 거 없습니다. 식물들의 생장을 보시면요. 식물들이 자라는 걸 볼 때 우리들은 그것에 걸 맞는 씨를 심습니다. 그리고 오늘같이 이렇게 장마가 시작됐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 장마가 시작되면 산천초목을 축축이 적셔주는 비가 내립니다. 이것을 우리 법화경에서는 어떻게 얘기합니까? 모든 키가 크거나 작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관계없이 모든 식물들에게 똑같이 비를 뿌려 주는 것이 부처님의 법문이다. 다시 얘기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무량공덕 생명으로 다 평등하다 이겁니다. 그런 자리로부터 생장해 가는 거죠. 생장해 가는 거니까 조금 아까도 저한테 그런 좋은 법문을 하셨는데, 유튜브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자칭 부처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는데 제가 목도한 사람만 봐도 전국에 꼽다가 말았습니다만, 몇 사람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자기가 부처라고 그러 길래. 서른 몇 명대까지 세다가 말았어요. 자칭 부처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이게 인기가 있기 때문에. 다시 얘기하면 그러면 상품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처를 바래요. 그런데 다시 얘기하면 부처로서의 씨는 안 심고, 부처로서의 결과를 바란다. 그럴 때에는 내가 바람직해 보이는 부처죠. 사기당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사기꾼이 몰려들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를 대상화, 나와 대립적 존재로서 쳐다보고 있는 한 그 부처는 나와 연장일 뿐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입니다. 식물의 성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씨를 심을 때 그 생장의 가능성을 향해서 씨를 심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어떤 분들은요. 안타깝게도 제가 지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결과화 된, 결과화된 것을 씨라고 심는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내 딸입니다. 그분이 내 동창입니다. 그분이 내 이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씨가 아니라고 얘기하십니다. 슈퍼에 가시면요. 슈퍼에 가시면 우리가 이때쯤 되면 물을 많이 끓여 먹지 않습니까? 보리차를 끓여 먹게 되죠. 그런데 보리차에 있는 그 씨를 심는 분계십니까?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 슈퍼에서 파는 보리차꺼리의 그 씨를 가지고서 뿌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볶은 씨앗입니다. 볶은 씨앗이라는 것은 뭡니까? 삶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는 겁니다. 생장하는 가능성을 아예 다 버린 상태가 볶은 씨앗이죠. 우리는 볶은 씨앗을 가지고서 좋으니 나쁘니 이것을 내 삶의 목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얘기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그 어리석음은 두 말할 거 없을 겁니다.
우리가 법문을 들어 보면 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을 실현하려고 태어난 것이지 못난 중생 삶 속에서 그 안에서 윤회의 쳇바퀴를 돌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착각이 일어나요. 내가 좋은 아빠 잘하면 내가 좋은 사장 잘 노릇하면 내가 좋은 정치인 하면은 이게 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인 줄 알아, 그것은 내 기준의 답입니다. 내 기준의 답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문답들이 있습니다. 어제도 제가 중년까지는 아닌데, 젊은 아낙네를 상담을 했는데, 이 사람이 그럽니다. 자기가 친정아버지가 그렇게 싫어서 친정아버지 안 닮은 사람을 구해서 시집을 갔는데, 하필이면 친정아버지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제가 지금도 무척 괴롭습니다. 내용까지는 그만 두더라도 패턴을 이렇습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뭡니까? 접수했다는 뜻입니다. 미워한다는 건 뭡니까? 내가 받아 들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반복해 가지고 내가 그 씨를 심었으니까 어떻게 돼요. 그 열매가 내 앞에 나타나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요.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생명의 어떤 사명이라는 것은 있고, 노릇하기에 바쁜 입장을 생각하고 있지요. 요즘 사회에서 많이 얘기하고 있는 역할게임이죠. 역할을 잘한다. 그래서 내 인생이 과연 결단 될까요?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테두리 속에서의 역할인 겁니다. 어저께는 사장이었던 사람이 또 다른 회사 가서는 갑자기 신입사원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거 영화소재로도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떤 사장님이 은퇴하고 나서 인턴사원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우리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체가 없다는 거죠. 오늘의 며느리가 조금 있다 보니까 시어머니. 시어머니가 실체입니까? 며느리가 실체입니까? 아들이 실체입니까? 없죠. 그때그때 나타나는 결과물, 이러한 수많은 관계성 속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서 나라고 주장하기에는 인생은 억울하다는 것. 실제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노릇을 해 가면서 내 생명의 근본을 펼쳐 가는 게 즉, 무량 공덕 생명을 펼쳐 가는 게 내 인생살이라 그랬어요. 이것을 안 한다면 이건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결정하는 사람은요. 옛 조사님들이 하신 말씀이세요. 천 부처 만 부처가 나타나도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여러분 답 갖은 사람하고 대화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뭐로 가도 모두 자기 것만 얘기하고 있어요. 연극무대에서 독백하는 사람 있죠. 독백하는 사람. 마치 인생을 독백살이하는 것처럼 살아요. 들을 줄 몰라요. 자기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들을 줄 모르고, 자기 생명이 얼마나 엄청난 사명으로 태어났는지 들을 줄 모릅니다. 그렇게 닫아놓고 나서 자기 얘기를 곱씹어 들어 달라고 그래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오바이트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그러지요.
제가 글을 하나 읽었는데 참 멋지다기보다는 웃음 짓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우리 학창 시절에 많이 배우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이런 얘기를 하죠. 그 비극 중에 하나가 로미오와 줄리엣 아닙니까? 그래서 농담으로 이런 얘기를 하죠. 로미오와 줄리엣 읽어 보셨습니까? 그러면 나는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안 읽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우리는 비극의 하나로 알고 있죠. 또 그렇게 읽으신 분들도 그 애틋한 사랑은 왜 맺어지지 못했을까? 그래서 비극이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작가입니다. 작가가 이런 글을 썼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을 세익스피어의 비극이라고 했는데 세익스피어는 비극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 때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갈라 놓을 것이 아니라 결혼을 시켰어야 된다. 그러면 비극이 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해요. 역설이죠. 결혼생활이 다 비극이라는 것이 아니라, 제 정신 가진 사람은 결혼을 안 한다는 소리도 하죠. 자기 기준에서, 일종의 정신병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 내 결론을 가진 사람이 저 사람을 통해서 보완하려고 하니 그게 됩니까?
저는 일 년에 몇 번씩 주례를 보게 되는데요. 그때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받으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줄려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꼭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많은 경우에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보통 내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사람을 배우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모자란데 이것을 저 사람을 통해서 내 행복이 충분히 채워질 거야라고. 그런데 그게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두 사람 다 있을 때 어떻겠습니까? 거지와 거지가 만나니 그 삶이 거지같아 지지요. 구하려는 사람, 받으려는 사람을 만족시킬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왜? 내가 받기 바쁘니까. 우리는요, 받기 전에 이미 태어날 때부터 무량공덕 생명의 주인공이라 했어요. 이로부터가 출발점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이 착각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존재들이 다들 나를 앞세우고 있다. 나를 앞세우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법이라는 것을 교리 상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 지적하신 단어가 뭡니까? 일천제(一闡提: 불교의 올바른 법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불의 소질이나 연이 결여된 자)라는 말씀을. 인도말로는 이찬디카(iccantika)라고 그럽니다만, 간단히 얘기하면 제가 이것을 의역을 해서 볶은 씨앗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볶아버린 자기를 , 자기를 볶아 버리고 나서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어찌 해 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왜?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마침표를 찍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법우님들께서 조금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에서 마침표를 찍을 새가 없었죠. 지나간 삶이. 오늘은 내가 40이구나 했더니 좀 있다가 쉰 살이 되고, 쉰 살이 되어 조금 있다 보니까 어느 날 예순, 일흔 살이 되었어요. 그때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실체입니까? 나이가 나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몇 살이라고, 내가 나는 좋은 남편, 또는 착한 아들이라고 이미 작정을 해버린 사람에게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벽을 일으키게 됩니다. 다른 생명과의 교류를 스스로 단절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를 앞세우는 입장은 부처님의 진단으로 본다면 다 일천제(一闡提)라고 할 수 있는데 일천제로 사는 것으로 작정한 이 모습에 대해서 부처님이 참으로 우리에게 귀한, 우리를 참회시키고, 우리에게 있어서 다시 용기를 일으키게 되는 그런 법문을 주시는 날이 이 우란분절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이런 발심하는 날이 돌아 온 거죠.
우란분절이라는 말의 원뜻은 물구나무섰다는 겁니다. 우란분이란 인도말로는 우람바나(Ullambana), 거꾸로 매달렸다는 뜻이에요. 요가를 해보셨건 말건 물구나무 서 보셨죠? 물구나무 서보시면 어떻습니까? 피가 머리에 모이지 않습니까? 저 같이 잘생긴 사람이 잘 안 보입니다. 또 옆에서 좋은 소리해도 귀가 멍멍해 갖고 안 들립니다. 그냥 오로지 빨리 서고 싶을 뿐입니다. 피가 머리에 몰려 가지고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 물구나무 선 사람 앞에 가서 아무리 뭐라고 얘기해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물구나무 선 사람한테 가서 물구나무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우란분절의 시작입니다.
제가 구구하게 목련존자의 어머니 얘기 안 해도 평상시에 법문 다 들으셨을 테니까 따로 안하겠습니다. 결국은요, 우리가 오늘부터가 아닙니다. 나를 앞세운 지난 세월이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과 같다. 나는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사는 게 아니었어, 중생살이 하면서 바쁘게 사는 게 아니었어. 반성과 더불어서 결단을 일으켜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 생각으로 살아야 되겠다. 이거야말로 목숨 걸고 사는 거죠. 우리가 법회를 시작할 때마다 예불을 모시고 시작하잖습니까? 그때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심귀명례. 내 몸과 내 목숨 전체를 다 바쳐서 그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무섭지만, 대단한 말씀입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다시 얘기하면, 내가 지금부터 부처님 생명으로 살겠습니다. 라고 작정한 사람은 이때가 뭐예요. 이미 부처다.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 사는 겁니다. 이러한 도리 입장에서 볼 때, 아까 말씀드린 이찬디카(iccantika) 사는 분들을 보면요,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삽니다. 한결같이 부지런합니다. 자기 몸 가꾸기, 자기 스팩 갖추기, 온갖 것들에다 바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때, 저희 동네에 도둑이 끓었습니다. 왜 그렇게 그때 도둑이 많았는지 몰라요. 육이오가 끝난 후 무렵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동네마다 아이들이 모이면 도둑 이야기가 화제거리였습니다. 그 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윗집에 도둑이 들었데. 그러면 뭐 훔쳐 갔는데? 그러면 양복 한 벌, 구두 훔쳐 가는 도둑도 많았어요. 그러면 그 다음 화제가 있습니다. 그럼 그 도둑들은 뭐하고 갔대? 그러면 제일 흔한 대답이 다락에다 똥을 싸고 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들어 보셨어요. 제가 그 때는 하도 쇼킹해서 똥 구경을 갔었습니다. 와, 인간의 똥, 저는 그런 똥을 누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할아버지께 여쭤 봤죠. 왜 도둑들은 남의 물건을 훔쳐 가면서 그냥 가지 똥을 한 바가지씩 누고 갑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다. 무서워서 그런다고 하시더라고요. 들킬까봐 무서워서. 공포심이 극에 달하면 똥을 싼다고. 아이들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보면 수많은 분들이 자기 것 아니니까 똥 싸는 분들이 많아요. 내 것 아닌 것에 바빠서, 쫄려서. 바삐는 사는데, 부지런하긴 한데 계속 시쳇말로 계속 똥 밟는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인생을 꽃길만 가자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신랑 신부에게 마이크를 주고 얘기를 해 보라고 하면, 저희들 꽃길을 걸으면서 살겠습니다. 예쁘게 살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제가 꼭 물어요. 예쁘게 사는 게 뭐냐? 성형수술하면 예쁘게 사는 거냐? 우리는 자기가 뜻도 모르는 말을 마구 마구해요. 나 잘 살아야 되겠다. 행복하게 살아야 되겠다. 하면서 그게 뭔지도 몰라요. 관심이 없어요. 사실은. 그냥 바쁘게 살면 되는 줄 알아요. 이게 이찬티카(iccantika, 일천제)의 삶이에요. 무량수경(無量壽經)이라는 경전이 있는데, 우란분절 기간 중에 맞는 경전이니까 모셔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보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를 앞세우는 사람은 다 이렇게 사는구나. 집이 없으면 집이 없다고. 살 집이 있으면 집이 있다고. 차가 있으면 차가 있다고 그것 때문에 괴롭다고. 차가 없으면 없다고. 또 아들이 있으면 아들 때문에 괴롭다고 징징합니다. 아들이 없으면 아들이 없다고 또 징징. 또 벼슬이 높으면 벼슬이 높아서 괴롭다고 하지, 벼슬이 없으면 없다고 징징.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보는 모습 아닐까요? 이런 일상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뭐라 그래요?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남들도 다 그러잖아. 그런 사람을 우리는 중생에다가 두 글자를 더 붙여서 범부 중생이라 그러거든요. 범부는 ‘부처님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떠난 자’라는 뜻입니다. 제가 이걸 산스크리트어를 찾아보니까 원 뜻이 그래요. 다시 얘기하면, 자기의 생명의 본분으로부터 스스로 떠난 자야. 여러분들 스스로 떠난 자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싫어서 떠났는데. 자기가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데, 자기가 스스로 윤회하는데 어떡할까? 자기 생명의 소리는 안 듣고, 자기 생명의 사명은 뒷전이고, 볶은 씨앗으로 살겠다는 이것은 어불성설인 것이죠.
삶이란 것은요, 사실을 알고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회생활과 언어생활 또 정신생활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즘 아마 제가 봐서는 이 언어생활에 칼날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어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나를 표현하는데, 언어적 표현을 하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갖고 있는 핸드폰은 아직 바꾸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만, AI가 등장하면서 이제 어떻습니까? 통화도 즉각 영어 번역 일어 번역 그냥 하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검색을 하는데 검색을 할 때, 인공지능을 통해서 많은 답을 추출해 봅니다. 깜짝 놀라요. 제 딴에 책을 좀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AI는 지금도 공부하고 있어요.
인공지능은 요즘 유명한 게 코파이럿(Copilot)라는 게 있고, 제미나이(Gemini)이라는 게 있는데 또 지네끼리 경쟁도 시키고 그럴 수 있어요. 제미나이는 이렇게 대답하는데 코파이럿 너는 알고 있냐? 그러면 뭐라고 답하는지 아세요? 바로 공부해서 가르쳐 드릴게요. 그래요. 다시 얘기하면 지식 자랑할 것, 별 것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이것은 바로 이 세상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언어생활이라는 것이 나를 표현합니다, 언어생활의 대다수는 어떻게 됩니까? 고민해 보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난무합니다. 그 추출원이 어딘가 봤더니 다는 아니지만 메스컴입니다. 특히 TV.
연예인들을 제가 여기서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연예인들이 수준 낮다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간혹 연예인들이 일상사 말도 안 되는 얘기, 캠핑 가서 일어난 얘기 옮기고, 그 안에서 갈등이 있는 얘기 그걸 갖고 일반화시켜 버려요.
어느 어느 배우가 어디 가서 집을 샀는데, 어떻다더라, 그 얘기 갖고 하루 종일 떠드는 겁니다. 어쩌다 바람 쐬러 뒷산 약수터에 갑니다. 약수터에 가다 보면은 스마트폰 켜 놓고 열심히 뭘 들어요. 저는 그래서 그분이 우리 법문 듣는 줄 알았어요. 오로지, 어떤 분은 태극기 부대인가 봐. 또 어떤 분은 깃발부대인가 봐. 그래 가지고 그 얘기만 들어. 자기 듣고 싶은 얘기. 옆에서 시끄러우니까 끄라고 그러면 갑자기 성질을 내고요. 손가락질 하고 그럽니다. 다시 이야기 하자면 내안에서 나오는 생명의 소리가 아니라 이미 결론화된 그렇죠. (청명거사님 녹취)
여러분 가끔 토론 프로그램을 보시면 토론자들이 나와서 얘기하는 거 들을 만한 얘기 하나도 없어요. 왜? 토론이란 것은 네 얘기를 들으면서 내 얘기가 생성되어 가는 과정인데 아까 생장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생명은 네 얘기를 들어서 내 모순을 해결하고 또 이 안에서 생성된 걸 계속 해결해가는 것이 대화인데 토론에 나온 사람들은 대화를 안 해요. 자기 얘기만 하느라. 남의 얘기할 때 자기는 원고 보고 있고. 넌 떠들어라 하고. 제가 그 분들 보고 뭐라 그러는 게 아니에요. 일상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서 내가 듣고 싶은 것 가지고 ‘너는 이래,’ ‘너는 잘못됐어’, ‘너는 잘 했어’, 라고 논평합니다. 이런 가십거리 정도가 인생이라면 너무 하잘 것 없죠. 우리 인생이 그런 가십거리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죠. 제 소리를 내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제 소리를 못 내는 건지 우란분절 기도 시작하면서 한 번 반성해보죠. 나는 누구냐고 얘기할 때 진정으로 나는 누구냐는 겁니다.
오늘 갑자기 떠오르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의 어느 실버타운에 들어갔던 분이 기고를 해서 일본에서 지금 난리가 난 기사입니다. 보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만. 그 기사를 짧게 얘기하면 이겁니다. 이 분이 대기업에 계시다가 무척 고급 실버타운에 들어갔는데 한 달인가 두 달을 못 견디고 나왔어요. 다 손해 보고. 왜 그랬느냐? 자기가 그 안에 있어 보니까 미쳐버리겠다는 겁니다. 왜 미치겠느냐? 갔더니 자기 왕년에 누군지 알아? 라며 자기 자랑, 또 자식 자랑, 또 옆에 있는 여편네 잘못된 것, 왜 저렇게 밥 먹어? 남의 험담하는 소리 때문에 미치겠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려고 실버타운을 탈출했다는 분을 봤습니다. 실버타운이 이것도 나쁘다 좋다는 얘기가 아니죠. 다시 얘기하면 우리들이 보면 우리 안에서 생명의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볶은 씨앗 얘기를 하고 자기한테 주입을 해요. 그게 원래 내가 사는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죠. 이게 내 일상일까요?
한 분이 갑자기 저한테 선물이라고 택배를 보내셨어요. 제가 그것을 좋아할 줄 알았나 봐요. 택배를 뜯었는데 무슨 소리가 나요. 세상에 저는 교과서에서만 봤지, 고슴도치를 처음 봤네요. 어떤 분이 저보고 고슴도치 키우라고 보내셨어요. 고슴도치 먹이까지. 며칠 동안 제가 그 고슴도치 먹이 주면서 흔히 요즘 말로 멘붕이 왔어요. 이게 뭐야? 하면서 고슴도치를 만져봤어요. 생각보다는 안 아팠어요. 이 말씀을 왜 드리냐면 보낸 분의 의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법사님은 취미도 없는데 이런 것도 좀 키워주시고 그래야 많은 분의 취미생활도 이해하실 것 같대요. 제가 요즘 얘기하는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는 것에 무척 비판적인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거든요. 그랬더니 아마 그 분이 그것을 보내셨던가 봐요. 이런 거 키우는 사람도 있고 다음에는 뱀을 줘보겠대요. 고슴도치를 보면서 느낀 게 한 작가가 쓴 글이었습니다. 그 분의 내용은 모르겠고 주제는 고슴도치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데 서로가 상처를 주면서 사랑이라고 하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 볶은 씨앗 얘기를 하면서 평상시에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혹은 회사에서 동료간에, 이웃간에 고슴도치와 같이 뾰죽뾰죽한 내 결론을 가지고 대화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생명이 위축이 되겠죠. 더 나아가서는 사회화에 폭력화가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만의 세계를 또 좀 더 각질화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서는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고선 아까 얘기했던 대로 유튜브라든가 뭔가 정제되지 않은, 내 생명의 소리가 아닌 이미 결론화 된 어떤 것들을 통해서 마치 그게 나인 양 여기에다 옷을 껴입기 시작합니다. 뭘 많이 아는 것 같아요. 나는 무척이나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아요. 나는 무척이나 가족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같아요’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저는 기사 검색이 제일 많은 것이 인터뷰를 많이 보는데 그나마 살아있는 소리 같아서 많이 봅니다. 그런데 보게 되면 말투가, 심지어 외국인이 한 것을 번역한 인터뷰도 ‘같아요’라는 소리가 많아요. 원문을 찾아보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얘기했는데요. 한국에 온 느낌이 어떻습니까? 좋은 거 같아요.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작가가 그런 겁니다. 통역자가 그런 사람이죠. 여러분 혹시 사위가 생겨서 사위한테 좋은 음식을 차리고 자네 좋은 거 먹게 해서 먹었습니다. 장모님이 해주신 식사를 다 하고 ‘맛은 어때?’ 하니 뭐라 그래요? ‘맛있는 것 같아요’. 맛있으면 맛있다고, 맛없으면 맛없다고 하지 맛이 있는 거 같아요 라는 건 뭐예요? 제 삶이 아닙니다. 제가 먹은 게 아닙니다. 영가가 먹었습니다는 소리죠. 왜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소리를 못합니까?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뤄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며 쳐다봅니다. 아니죠. 삶은 평가받을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측정할 만큼 우리는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팽팽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오늘이라고 하는 온 생명의 그 귀한 순간에 태어나서 이 생명을 구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아요’ 라는 얘기를 하면서 인생을 뒷전으로 미룰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같아요’를 능사로 하는 분들이 주로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만 있으면 저는 행복할 것 같아요’입니다. 돈만 있으면, 제일 좋아하는 거죠. 전 세계는 지금 돈교입니다. 돈교. 오늘날 대다수의 종교는 돈교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건강교입니다. 건강만 좋으면 그럽니다. 제가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어떤 연세가 높으신 분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제가 문병을 하겠습니다’고 하니 제가 법사님같이 건강만 하다면 소원이 없겠대요. 제가 그랬어요. ‘건강하시면 어떻게 하실래요?’ 하니 ‘건강이 다 아닙니까?’ 그래요. 건강이 다입니까? 건강해서 제가 사지가 멀쩡해서 좀 힘 없는 분들 물건도 들어드릴 수 있고, 또 남한테 요리도 해줄 수 있고, 또 내가 어디로 여행도 다닐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건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건강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돈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목적이 됩니다.
이삿짐 센타 분들에게 인터뷰를 못해봤습니다만 일본 기사를 보니 기막힌 기사들이 나옵니다. 일본 경제가 지금 무척 어렵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돈 가진 분들이 연세 많은 분들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속앓이를 해요. 왜냐하면 이삿짐에서 짐이 나오는데 얼마 전에 한 청소부는 5억을 주웠답니다. 아시죠. 장롱에다 숨겨놓은 거를 누가 쓰레기라고 버렸어요. 그것을 이 사람이 줏은 거죠. 왜 그럴까요? 내가 죽을 때까지는 돈이 나를 보장해줄 거라는 거 아닐까요? 돈은 쓰기 위한 건데, 쓸 곳을 가정해놓고 내두다 보니 지금은 못 쓰고 굶어 죽는 겁니다. 전 그래서 누가 돌아가시면 그 유품을 꼭 검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베갯속에서 나오고 어떤 분은 이불 밑에서 나오는데 5만 원짜리가 깔려있어요.
다시 얘기하면 돈이 되었든 건강이 되었든 다음에 쓰기 위해서죠. 그렇죠. 조건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갖춰졌으면 인생이 끝난 겁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지금 일흔 된 분이 쉰 된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당신같이 젊으면 못할 게 없을 거 같애,’ 그러면 당신은 쉰 살 때 그러셨을까요? 그런데 여든 살 된 분이 옆에 와서 ‘젊은 것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합니다. ‘내가 자네 같으면 지금 운동장을 몇 바퀴 뛰었어.’ 우리가 이런 상대의 세계에서 나를 가둘 거냐는 말입니다. 상대의 세계에서는 사실은 진정한 인생의 답이 아닌데 우리가 언제까지 이 안에서 자기를 가둘 거냐는 겁니다. 가두는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
제가 이 잠실 쪽에만 오면 잠실 처음 개발할 때가 생각납니다. 아시는 분들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개발할 때 잠실 법당, 그때 잠실 이 근처 땅이 어땠는지 기억하십니까? 진흙 투성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법회 오려면 장화 신고 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잠실이라는 자체가 아시듯이 옛날 잠업하던 데 아닙니까? 진흙 있을 때 여기 이사 온 분들 제가 행복도를 따지면 무지무지하게 행복도가 낮았어요. 어떻게 이런 땅에 사느냐고 했는데 지금은 땅값이 많이 올랐죠. 그러면 잠실이 아주 요즘 잘 나간다고 합니다. 뭐가 잘 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조건을 갖고 내 인생을 감히 논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진흙이면 어떻고 고대광실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서 살아가는 내 생명은 누구냐를 물어야지, 이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고대광실에 살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냐? 내가 진흙탕을 헤매니까 또 행복을 아직 못 찾은 거냐? 아니다. 그 어떠한 조건에 있어도 내 생명이 떳떳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떳떳한 분이 앉아계신 이 법당. 대웅전이란 뜻이 뭡니까? 그 떳떳한 대장부가 앉아계신 곳입니다. 생명의 대장부를 따라잡을 이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것은 말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아까 언어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언어적인 문제가 너무 많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거론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이미 고려 때 이를 지적하신 참으로 큰 스님이 계십니다. 그 유명한 나옹화상이란 분입니다. 이 나옹화상이란 분은 오히려 제자 때문에 더 유명하신 것 같아요. 제자가 무학대사입니다. 고려말의 3화상하면 지공, 나옹, 무학대사를 얘기하거든요. 이 나옹화상이 남긴 법문이 우리 새벽에 예불 들어가며 쇳종송할 때 스님들이 꼭 하십니다. ‘아미타불은 어디 계신가?’ 그 유명한 얘기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내 무량공덕 생명은 어디에 계신가?’ 하고 묻습니다. 그 주인공이 우리에게 던진 경책의 말씀이 있습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 무척 쉬운 얘기죠.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나를 앞세우는 입장에서는 이거같이 어려운 게 없습니다. 왜? 입만 놀리면 내 자랑 아니면 남의 흉이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최소한 저는 그렇더라고요. 제 자랑하고 싶어서 그 인간 흉보고 싶어서 입이 가만 있질 못해요.
노는 입에 염불해라. 염불이 뭡니까? 생각 염(念)자를 파자해보면 지금 금(今) 밑에 마음 심(心), 지금의 마음이 부처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 초발심 얘기했어요. 지금 내 생명 시작의 마음이 부처다 그걸 잊지 말아라. 그때마다 자꾸 그러니까 이렇게 계산 빠르고 게으른 나를 일깨우기 위해서 염불을 듣는 거에요. 염불 듣는 것은 들을 문(聞) 그러니 바보가 아니니까 생각하게 되어서 사(思), 그 다음에 자기 삶을 수정(修)하게 되어요. 그래서 이것을 문사수라 그런 겁니다. 경전의 말씀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나옹화상이 노는 입에 염불하라고 말씀한 간곡한 이유가 뭘까요? 나를 앞세우는 사람은 그 뒷전에 놔두고 또는 네가 어떤 씨를 심느냐에 대해 벌어진 결과물이니까 결과물에 안달복달하지 마라.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라는 것은 전면 수용하겠습니다. 부처님 전에 ‘네~’ 하는 겁니다. 누가 저보고 악한이라 그래요. 나는 그래저래 변명할 시간에 ‘네~’, 왜? 네가 봐서 그렇다는데 어떡할 거야? 어떤 사람이 나보고 좋다 그래요. 자기 기준에 맞나 보죠. ‘네~’할 뿐이에요. 기고만장할 거 없어요. 부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무량공덕 생명으로 살라는 그 소리를 들으라는 겁니다. 그 소리는 그래서 우리가 몇 데시벨하는 음파가 아닙니다. 우주의 진동이고, 진동은 파장을 낳게 되고, 파장은 생명을 타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문을 들은 분은 당연히 건강해질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돈이 모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생명은 생명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이렇게 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일상적인 범부중생으로 사는 모습에 대해서 제가 오늘 여러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만 결국 우리는 남을 측정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남을 측정하고 측정하게 되면 반드시 오는 게 뭡니까? 비교하게 되죠. 비교하게 되면 이때 열리는 문을 지옥문이라 그럽니다. 대표적으로 지금 우리 법우님들의 아들 손주들에게 많이 읽힌 동화가 하나 있습니다. 백설공주 테마를 제가 다 얘기 안 해도 다 아시는 얘기죠. 백설공주를 보다 보면 저를 웃음 짓게 하는 안타까운 분이 한 분 있어요. 백설공주 엄마, 계모라고 나오는데 계모가 다 나쁜 사람입니까? 그 백설공주 엄마가 왜 불행하게 되었습니까? 거울을 본 순간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에게 묻습니다.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대답했죠. 그런데 거울이 무슨 대답을 해요? 자기 생각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평상시에 딸 앞에서 아마 열등감을 느꼈나 봐요. 법우님들 솔직히 그러지 않습니까? 딸이 엄청 예쁘면 엄마들이 예뻐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한때 더 예뻤는데 이런 생각 안 드십니까? 혹시.
그런데 이런 것이 뻣속들이 자기 자존심을 걸고 이 미모에 목숨을 걸게 되면 백설공주 테마에 나오는 황당한 일을 벌이는 겁니다. 딸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미우니까. 다시 얘기하면 내 미모에 대해서 내가 결론을 지었지 않습니까? 그걸 왜 비교를 해요? 코가 좀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고,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죠. 그걸 갖고 크고 작고, 이쁘고 오목하게 생겼다고 왜 비교를 합니까? 답이 있는 겁니다. 요렇게 생겨야 예쁘다는 답이 있지 않습니까? 요렇게 생긴 게 나라는 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이 아무리 성형수술을 해도 그 삶은 뜯어고칠 수 없습니다. 간혹 성형수술 중독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분들은 아까 말씀드렸던 ‘돈만 있으면, 건강만 하면, 또는 내 미모만 좋으면’ 하는 조건 충족의 맹신자들이셔. 한 번 수술해서 만족할까요? 안 해요. 코 수술을 하고 보니까 짝눈이어서 눈 수술을 해요. 요즘엔 예뻐지려고 턱까지 수술해요. 예뻐지려는 그 마음을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가면 갈수록 태어날 때 완전한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이 불완전 속에 계속 헤매게 됩니다. 죽어서는 그만두고 현생에서 성형외과로 윤회하더라니까요. 신사동 가면 많은 성형외과를 이 골목 저 골목 윤회하고 다닙니다. 이건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죠. 볶은 씨앗을 심은 데서 시작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착각이 시작이 되면, 그 다음에 너에 대한 착각이 일어나게 되고, 너에 대한 착각은 다시 나한테 반사되어서 그것이 나를 조종해버려요.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물구나무 선 인생에서 벌떡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으로 벌떡 서야 되겠다. 부모님 노릇을 하되 부모로서의 무량공덕 생명을 발휘할 뿐이지 좋은 부모 나쁜 부모가 아니에요. 자식도 마찬가지죠.
세상살이에서 어떤 것을 앞세울 때 우리는 지옥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지옥문이 열린 것을 심리학적으로는 ‘화가 났다’고 합니다. 탐진치 삼독이라는 얘기 다 아시지 않습니까? 진심이란 것이 화났다, 자기 눈 목자에 참 진자 (瞋)입니다. 제 눈에 보이는 것만 진짜라니 화나죠. 답을 앞세우니 화나죠. 화가 부글부글 나서 온 천지가 화가 나 있어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를 얘기하지만 사실은 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백설공주의 엄마만이 자기에 대해 그 못난 짓을 한 게 아닙니다. 너라고 하는 잣대를 통해서 내가 행복해지려고 할 때 우리는 조건에 쫓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면 이미 지옥문에 들어선 겁니다.
지옥문에 들어선 사람을 향해서 지장보살님께서 울고 계시다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49재 모실 때도 보면 삼도천 앞에서 지장보살님 우는 모습이 다른 게 아닙니다. 삼도천은 지옥 아귀 축생인데 지옥 그 앞에서 지장보살이 우십니다. 그런데 지장보살님이 왜 우십니까? 지장보살이 우시는 모습을 우리가 세상 살아갈 때 우화적으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영가 살림살이를 하게 되어서 중유가 됩니다. 사유, 죽는 순간이 있고 중유, 중간 존재로 49일 동안에 사후 여행을 하시는데 그때 식이 망동할까봐 49재에서 법문을 들려드리지 않습니까? 티벳에 있는 문헌에 보면 바르도 퇴톨에 보면 영가여, 꼭 조심하라. 혹시나 영가가 가다가 아주 아름답고 뻘겋게 당신을 반기는 공간이 있으면 그곳에는 가지 말아라. 강남에 밤거리를 다녀보면 온갖 네온싸인이 번쩍거리고 화려하죠. 그 화려한 곳에는 들어가고 싶죠. 그 표현을 한 겁니다.
왜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가 하는 것이 지장보살의 법문입니다. 거기는 축생의 자궁이니라고 합니다. 축생은 본능만 살아있는 것으로, 먹고 싸는 것만 아는 겁니다. 다시 얘기하면 본능에 의해서만 사는 세계에 너, 다시 태어날래? 우리는 축생으로 태어나는 거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좋아서 갑니다. 가끔 보면 카바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이런 즐거움을 모르다니’ 하고서 뿌리치고 가죠. 마치 지옥문 앞에서 지장보살이 거기 가지 말라고 옷소매를 붙잡고 우리에게 너는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을 발휘하며 살아, 지옥에 가지 마라고 아무리 해도 ‘이게 얼마나 즐거운 곳인데’ 라고 자기 눈에는 지옥이 아니라 이름하여 극락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도 깜냥껏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깜냥이 지옥 지나갈 것이면 지옥으로 갈 뿐입니다. 누가 가라고 한 적 없습니다.
오늘이 발원날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을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 왔으니까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거야 라고 감히 논단하지 마십사라는 겁니다. 자기를 결정하지 마십사하는 겁니다. 그 결정력은 나에게도 없습니다. ‘나는 좋은 중생살이 할거야’, ‘나는 요정도까지만 법회 다닐 거야’, ‘나는 요정도까지만 법문 들을 거야’, ‘불교에 대해서 다 알았어’, ‘알고 보니까 내가 부처야’, 이 몸뚱이가 부처예요? 몇 살 먹은 그 사람이 부처예요?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떡하니 세상을 향해서 사기 치죠. 그게 과연 인생인가? 나를 속이고 너를 속이는 게 인생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정직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정직해야 됩니다. 내 생명에 정직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출발하죠. 내 입장이 어떠하든, 내 나이가 어떠하든, 내 몸 컨디션이 어떠하든, 내 재무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먼저 선언하라.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입니다. 따라서 평상시 내가 헛소리하는. 노는 입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염불하고 살리라. 법문 들으리라. 그때마다 깨어나리라. 그래서 오늘이라고 하는 내 생명의 첫시작,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무량공덕 생명을 내가 증명하리라. 이것밖에 인생살이는 없다는 겁니다.
제가 한 번 여쭙겠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과연 그대로 살고 계십니까?’ 이것은 누구에게 내밀 이력서가 아니죠. 부처님 말씀대로 과연 살고 있는가? 어떤 한의사가 저하고 상담하다가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한의원 문 닫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자꾸 아프다고 해야 한의원도 많이 오고 농담하느라 그렇게 말씀하셨겠지만,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보기나 했어?’ 문자적으로 그렇게 얘기하고 또는 율법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구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법회에 아주 독실한 불자라고 하는 할머니가 찾아오셨어요. 그날 어떤 분이 제가 좋아하는 굴을 잔뜩 캐와서 굴을 같이 먹었는데 이 분이 삐져서 밥을 안 먹는 겁니다. 공양을 같이 하자고 했더니 세상에 나쁜 사람이 오신채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라며 중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평상시에 제일 존경하는 스님이 누구시냐’고 했더니 만공스님이라고 했어요. ’제가 한 때 인연이 있어서 만공스님 법어를 조금 번역해본 적이 있는데 만공스님이 제일 즐겨하셨던 게 뭔지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째려봤어요. 석화(굴)을 제일 좋아하신다고 말씀드렸는데. 딴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한 답을 지켰다고, 고수했다고 내 인생이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오늘 태어난 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그것도 오늘이라는 이 시간, 이 공간에 처음 태어난 겁니다. 지난 주에 오셨던 법당이 아닙니다. 오늘 처음 목격한 법당입니다. 지난 주에 모셨던 부처님이 아닙니다. 오늘 처음 뵙는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항상 처음입니다. 끝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끝을 앞세우지 마세요. 내가 지금 어떤 첫발을 딛고, 어떤 첫마디를 하고, 어떤 첫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신심이냐가 중요하지 어떤 과보를 앞세우지 마세요.
반야심경에 무유공포원리전도몽상이 나오죠. 전도몽상은 거꾸로 선 거죠. 결과를 앞세웠던 내가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으로 바로 서고 보니 무유공포원리, 두려움에 떨던 거, 앞날에 대한 걱정 다 사라지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떳떳하니까. 이 자랑스러운 부처님 공덕생명으로 사시는 우리 법우님들, 그러니 법우님들 가는 곳마다, 하시는 일마다, 하시는 말마다, 여러분이 만날 수많은 인연들이 함께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함께 부처님 생명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우린 이러자고 법회를 모시는 것이고, 이러자고 법회 속에서 내가 뛰어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49일 동안, 우란분재 회향하는 그 날까지 혹여 내가 물구나무 섰다면 반성함과 동시에 오늘로부터 만나는 모든 인연들에게 부처님 생명으로 과감히 살아가리라 결단하시는 굳히시고 베푸시는 날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고맙고 참으로 찬탄드릴 법회를 모시게 되어서 새삼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보리광 보살님 녹취)
♬ 찬탄곡 : 어디로 가시는가 (이영효 작사, 서근영 작곡,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여울져 흐르는 무심한 계곡물 굽이 굽이 흘려서 어디로 가시는가
때로는 돌아치고 때로는 기다리며 낭떠러지 떨어져도 미소로 노래하네
걸림없는 대자유를 그댄 알고 가시는가 근심 걱정 모두 모아 흘려 보내며
천년의 세월 침묵하며 뒤돌아 보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이여
빨갛게 물들어 날리는 단풍잎 너울 너울 춤추며 어디로 가시는가
살며시 안아주며 속삭이고 매만져도 버리고 또 버리며 다음 생도 그렇게
걸림없는 대자유를 그댄 알고 가시는가 번뇌 망상 모두 모아 날려 보내며
낡은 업보 옷 갈아 입으려 윤회의 수레바퀴 돌리는 여린 잎이여.
백중입재 축원 : 혜담 스님
발원문 낭독 : 송파 27구 명등 바라밀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문 수석 부회장님
오늘도 새 법우 두 분 오셨는데 법회장님이 안 계서서 그런지 포토 타임을 놓쳤습니다. 사진은 없지만 불광 법회에 오셔서 정법 만난 소중한 인연 오래 이어가시길 발원합니다.
사 측이 공양실를 잠가 놓고 개방하지 않는 관계로, 법회가 끝나고 각 구법회 법등모임을 갖고 계신 불들은 보광당에서 각자 준비해오신 것들로 점심공양을 하고 계신 모습이 즐거워 보이지만, 왠지 불사하여 멋진 공양실 만들었는데 결국 이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도 듭니다.
다음 법회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법당을 나가시는 형제분들께 공양물로 과일 보시하며 인사 하고 계시는 법당 안내팀의 정겨운 모습입니다.
법회가 끝나고도 금강경 독경하시는 분들로 대웅전도 가득합니다. 반드시 우리의 정상화 발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속상한 일이 자꾸 발생합니다. 사무국 표시판을 떼어 내어서, 다시 제작하여 설치하고, 불광 법회의 대자보를 붙여놓을 공간 없이 사측 유인물로 가득하니 속이 많이 상하지만 다시금 공간을 찾고, 찾아 붙이는 거사님, 보살님들. 수고 하십니다..
토요일 오후 청정팀에서 법당을 청소하고 좌석을 배치하시는 열정과 헌신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또 떼어 내신 것일까요? 거사님들께서 사무국 앞에 다시 붙입니다.
사 측의 토요법회가 끝나고 불광 법회 백중 입재 준비로 위패를 모시려고 하니 종무원들이 설치하지 말라고 하더니 바로 구담 스님께서 내려오시더니 위패를 떼어내라고 하셨다니 이 무슨 일이랍니까? 항의하시는 거사님, 보살님들. 그로인해서인지 바로 스님께서는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요 법회에 와 보니 설치했던 위폐를 저렇게 떼어서 바닥에 놓아두었습니다. 사측에 항의하고 백중 입재 법회를 위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설치한 위패. 조상님들께 정말 송구하옵니다. 어휴, 이런 행위의 과보는 없는 것인지, 과보에 대해 많이 아시는 주지 스님, 그것이 궁금합니다.
오늘이 백중입재 일요 법회날 인데 이 사태를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법회 시작 전에 거사님들께서 땀 뻘뻘 흘리며 다시 설치하고 계십니다.
법회가 끝나고 위패붙임을 철거하여 보관하는 이 상황. 조상님들, 초재 때 다시 뵙겠습니다.
지난주에도 쉼 없이 조계사, 동명사, 봉은사에서 1인 시위에 수고하시는 불광 형제 여러분, 응원합니다.
평일에 없어서 현수막을 제거했나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에 보니 토요 시위자를 향한 현수막이, 시리즈로 나오고 있나 봅니다. 처음엔 손가락 이더니 이번에는 혀를... 다음엔{?}
토요 시위를 견양한 현수막이 나날이 알지 못하는 기가 막힌 지옥과 과보를 열거하시고 계시나 저희는 뚜렷한 명분으로 하는 시위입니다. 저희도 갈 길 바쁜 이 세상에 이렇게 시간 투자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해야하는 일이기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지 동명 스님!!
이렇게 간절함을 표출하는 불광 형제들을 향해 육근(六根)을 열어 주시옵소서.,
불광 형제들이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으로 살며, 호법(護法) 할 수 있도록 부디 이러한 고생, 더 이상 하지 않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_()_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불광의 수많은 바라밀 행자님의 자원봉사로 이뤄지는 불광법회, 어떤 방해에도 환희롭고 희유한 법회를 이어갑니다 _()()()_
시간 많이 걸리는 녹취에 애쓰신 청명님, 곳곳에서 사진 찍어주신 많은 보살님들, 통합하여 일지 기록하시는 마음님도 희유하십니다 _()()()_
부처님 말씀 그대로 살고 있는가? 물어보는 하루 되겠습니다 _()_
오늘도 변함없이 불보살님들 덕분에 눈으로 법문을
읽어 봅니다.
법당에는 꽉 찬 불광형제님^^
우란분재 입재기도를 여법하게 올렸습니다.
법사님께서는 법문 시작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 듣고 살고
있는가를 법문주셨습니다.
' 내생명 무량 공덕 생명 '
다시금 새기면서 백중기도 열심히 할려고 합니다.
편집 ,사진 올리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분 좋은 날 됩시다.~~~~
불보살님의 화연으로 보현행원 실천
세밀하신 편집으로 불광일지 남기신
마음님과 녹취하신 청명거사님 미디어팀
애쓰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 *
수행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늘 알아차림 하는걸 목숨걸고 행해야 됨을
놓치고 일반 범부들 만도 못한 저질스런
행동을 거침없이하며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편견으로
내조상, 남의 조상, 이분법으로 보고,
*인과*를 믿지 않는...
수행자는 스님이라 할수없다
권승들의 상좌는 역시 다르네요.
감히 법상에 앉아서
*부처님과 광덕큰스님*을
팔아가며 스님임네 하지마세요.
우리는 햇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노는 입에 염불하라!!!
오늘 태어난 내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오늘이라는 이 시간,이 공간에 처음 태어난 항상 깨어있는 삶!!!
귀하디 귀한 법문을 다시 읽고 복습 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보장해주신
미디어팀원 님들께 감사감사 드립니다.
사진,녹취,편집하시느라 애쓰신 분들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불광법회 모든 형제님들의 수승한 공덕에 수희찬탄드리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