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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예절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은석
지난 2010.1.17 일요일..
대학후배 모친상 조문관계로 경남 칠원을 다녀왔습니다.
03학번, 06학번 남매가 모두 과 후배였습니다..
한참 아래 학번의 후배들이였지만
동창회 사무국장이라는 타이틀(??) 탓에
저로서는
늘상 이런 자리는 피할 수가 없죠..
홀로 가는 조문 길..
칠원면 무기리의 ‘무기연당’과
용정리의 ‘덕연서원’을 들러보면서..
호젓하게 기분을 한번 내보았습니다..
멋지죠??
칠원면 무기리의 ‘주씨고가’ 옆
별당인 ‘무기연당’의 모습입니다..
신재 주세붕 선생을 모신 덕연서원의 강당입니다..
칠원면 용정리에 위치해 있는데
무기연당과 덕연서원 모두
칠원면 사무소에서 5분내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가 조금 도움이 될까요??
무기마을 초입에 서 있는 마을 표지석입니다..
마을유래가 각되어 있는데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 고을 칠원현(漆原縣)에 주산(主山)인 청룡산(작대산)밑에
자리잡은 무기동(舞沂洞)은 물 맑고 산세 좋아
고을에 무우기수(舞雩沂水)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하여
판결사 주선원공(周善元公)이 무기(舞沂)라고 지명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뒤로 살짝 보여지는 산이
이 무기동의 주산인 청룡산(또는 작대산)입니다..
우리네 옛 마을길은 늘 이런 식입니다..
절대 한꺼번에 모든 걸 보여주는 법이 없죠..
하긴..
조금씩 보여 지는 게 사람을 더 감질나게 하는 법이죠..
역시.. 주산인 청룡산이 보입니다..
바로 이 집입니다..
함안 무기리 주씨고가(咸安 舞沂里 周氏古家)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이 곳 칠원 땅..
그 중에서도 이 곳 무기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에 형성된
상주 주씨 집성촌입니다.
사진 속 주씨고가는 신재 선생의 증손되시는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1681-1748) 선생 이후
이 곳 무기리 주씨 종가의 맥을 이어온 집입니다..
솟을삼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중문 처마아래에는
두 개의 정려표시문이 걸려 있습니다.
사진 우측이 국담 주재성선생의
충절을 기린 ‘충신정려’편액이며
좌측은 그의 장남인 감은재 주도복 선생의
효행을 기린 ‘효자정려’편액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 주씨고가의 솟을삼문을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정려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사랑채에 해당하는 감은재가..
우측으로는 별당인 무기연당이..
정면으로는 안채와 국담선생을
모신 부조묘(不祧廟)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감은재(感恩齋)는 국담 선생의 장남인
주도복 선생의 號로서
부모의 은덕에 감사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합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안대문입니다...
현재 종손어른께서 거주하고 계시더군요..
별당인 무기연당의 ‘한서문’입니다..
‘굳게 닫힌 대문!!!’
산책길에서 만나는
가장 황당하면서도,,
그러려니 하는 상황입죠..
무기연당을 관리하시는 종손어르신을 찾아
종택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출타 중이신지 종택의 대문도 굳게 닫혀 있고..
흙 담장에 매달려
온갖 해괴망측한 포즈를 취해가며
담 너머 펼쳐진 그림 같은 풍광을
디카에 담다가..
‘에이~ 걍~ 담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제게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니가 누 집 아고?? 이 래디오가 소리가 안나..
좀 고치도고...”
팔순이 넘어 보이시는 한 할머니께서
무기연당 담장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열심히 일을 보고 있는
제게 말씀을 걸어오셨지요..
그 할머니 댁이 종택 바로 옆 집이였고
제가 라디오를 고쳐드린 덕택인지..
할머니께서 종손어른께 연락을 하시니
종손어른께서 곧장 열쇠를 들고 오십니다..
‘일진을 보니 귀인을 만난다더니만...’
개봉박두!!!
우리의 송은석..
드디어 무기연당의 비경 속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은 함안 무기리 주씨고가의 별당으로
국담 주재성선생의 유적지입니다.
참고로 충신정려를 받은 국담선생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며
신재 주세붕 선생의 증손입니다.
문집으로는 4권2책의 ‘국담문집(1908년 간행)’이 있습니다.
무기연당에는 크게 4개의 볼거리가 있더군요..
사진 좌측(북쪽)으로 보여지는 건물이
무기연당의 정자에 해당하는 하환정(何換亭)입니다.
우측(동쪽)의 건물은 루각에 해당하는
풍욕루(風浴樓)..
가운데 연못은 선생의 호를 딴
국담(菊潭)이라 불리는 연당(蓮塘)..
그리고 그 연당 가운데 조성되어 있는
인공섬인 석가산(石假山)..
뒤에서 나오지만 연당의 남쪽에 자리한 충효사(忠孝祠)
이렇게 4개의 볼거리...
멀리 무기리의 주산인 청룡산(작대산)이 보이네요..
이 곳 무기연당의 하환정을 보노라니..
하빈 묘골 삼가헌의 별당인
하엽정의 풍광이 떠오릅니다..
‘참 많이도 닮았네..’
사진은 삼가헌 하엽정 겨울모습입니다..
삼가헌 하엽정 초여름의 모습...
하환정 내부 상단..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소박하지만
제 역할을 다하며
멋 떨어지게 걸려 있는 많은 시판(詩板)들...
잠시 마루에 앉아보았습니다...
답사의 철칙이죠..
‘옛 건물은 반드시 방이나 마루에 앉아
바깥세상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밖에서 바라만 보면
그는 마당쇠가 될 뿐이다...‘
음...
‘詩心이 動하리다...’
고개를 돌려 옆 건물인
풍욕루를 한번 올려다봅니다..
근데.. 혹시..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저는 하나 발견을 했거든요..
제 기준으로는
그 날
드디어..
‘한건’을 한 셈이죠..
풍욕루 현판 아래로 살짝 보여 지는 글자 말입니다..
좀더 가까이 가서 볼까요??
‘敬’字 현판..’
눈에 익지 않습니까??
눈 밝은 이는 아셨을 겁니다..
아.......
여기서 만나다니...
네... 맞습니다..
소수서원 경렴정(景濂亭) 죽계수 너머
‘敬자바위’ 바로 그 경자입니다..
1457년(세조3년)10월
단종복위 거사의 실패로
순흥 땅은 정축지변의
엄청난 화를 입게 되었지요..
그때 참화를 입은 순흥 땅 백성들의 시신은
소수서원 경자바위 아래에 수장이 되었고..
이후 경자바위 부근에는 억울한 한을 품은
원혼들이 떠돌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답니다..
소수서원을 세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께서
이러한 연유를 전해 듣고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경자바위에 친필로
‘경’자를 쓰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냈더니
더 이상 혼령들이 나타나지 않더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언젠가 제가 소수서원 답사기를 썼을 때
이 경자바위를 두고
‘신재 주세붕 선생의 부적이라’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르신!! 풍욕루 ‘경’자 현판이
혹시 소수서원 경자바위와 관련이 있습니까??”
라는 저의 질문에...
종손 어르신의 말씀을 빌자면..
“우리 周家들의 중요한 건물에는
이 ‘경’자 현판이 다 걸려 있어요..”
순흥 땅의 무수한 원혼을 달랜
신재 할아버지의 ‘경’자이니
오죽하겠습니까??
부적치고는
정말...
효험이 검증된 부적이 아닐까요...
이곳 석가산에 놓인 자연석들을
의도를 갖고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나...
‘남근석’이 몇 있더군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하하~~
風浴樓라...
정말..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무기연당 남쪽의 충효사와 영정각..
어르신께 여쭙고 싶은 내용도 좀 있고해서
周氏古家 안채에도 잠시 들러보았습니다..
안채 담장너머로 무기연당의 하환정 지붕이 살짝 드러나네요..
안채 뒤 국담 선생을 모신
不祧廟
사진은 함안군 칠원면 용정리에 위치한
덕연서원의 모습입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인
덕연서원은
1591년(선조24)에 이 지역 출신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 선생을 기리기 위해
칠원 지역의 사림들에 의해 최초 건립되었습니다.
최초 설립 당시 서원명은
동림서원(桐林書院)이였다고 합니다.
동림서원은 임난 때 소실이 되었고
이후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어졌다가
1676년(숙종2)에 ‘德淵’이라 사액을 받습니다.
이 곳 역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훼철이 되었다가
1911년에 덕연서당으로..
1964년에 존덕사를 지어
신재 선생의 향사를 받들면서
옛 덕연서원으로 복원이 되었다고..
1911년에 덕연서당으로 다시 세웠졌다하니..
100년이 된 강당건물인 셈이네요..
실내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탓에..
찢어진 문종이 사이로 디카를 디밀고
후레쉬를 터트려 무작정 몇 장의 사진을 찍어 봅니다.
혹시나,,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하는 맘에요..
어둠 속을 찍은 액정화면을 살펴가면서
몇 장을 더 찍다가 드디어 한 장을 건집니다..
담배갑 크기의 저의 디카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
3칸 마루의 짙게 퇴색된 문..
기단부의 다듬돌과 막돌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 잡는데..
강당 좌측 뒤로 보이는 건물은
덕연별사(德淵別祠)입니다..
이 지방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죠..
배세적, 주박, 배석지, 황협, 주맹헌 등..
강당 뒤 존덕사(尊德祠)
확인은 못해보았지만 당연,,
신재 주세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겠죠..
존덕사(尊德祠) 마당에는
10여개의 바위돌이 땅위로 약간씩 돌출되어 있습니다.
추측컨대 다른 곳에서 옮겨온 돌은 아닌 듯하고
이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석인 듯..
바위의 뿌리가 깊어 그냥 둔 것 같습니다..
언덕이나 구릉지 상부에 자리한
사당, 암자 등에서 많이 보여지는 형태죠..
‘地氣는 돌을 전도체 삼아 흐른다...’
조문길
경남 칠원 땅..
이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무기리 ‘무기연당’과
용정리 ‘덕연서원’
그리고
신재 주세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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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년(중종37)
당시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회헌 안향선생이 공부하셨던 순흥 죽계구곡에
회헌 선생의 사묘를 세웁니다..
다시 이듬해인 1543년
이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웠습니다..
1550년(명종5)에는
풍기군수였던 퇴계선생께서
상소를 올려 ‘紹修書院’이라는 사액현판을 받으니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세운
신재 주세붕 선생입니다..
그 분의 위패가 모셔진 덕연서원이였습니다..
그 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무기리였던 것입니다..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참 이상하죠??
여행이든 산책이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때쯤
그 의미를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송은석 올림..
아래 사진 자료 중에서
덕연서원을 설명한 자료를 한번 살펴보세요..
잘못 된 부분이 있지요..
칠원면사무소 홈페이지에도
똑 같은 오류가 그대로 등재되어 있던데요..
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