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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포커스리더學] 조선왕비 ⑤⑥.
이장희 추천 0 조회 9 14.06.03 19: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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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사극 속의 그 악녀? 시대 앞질러 신분제와 맞짱 뜬 여걸

 

조선왕비-⑤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과연 희대의 악녀인가?

수많은 역사서와 드라마, 영화에서는 장희빈을 악녀로 인현왕후 민씨를 현숙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희빈 장씨는 중인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적극적인 여성으로 풀이된다. 또 격변의 시대 속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정쟁의 희생양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백성도 유생도 모두 무시했던 그녀

미천한 신분 굴하지 않고 운명 개척

여성으로서 정치권 장악 정국 주도

 

숙종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후 후궁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했다. 그만큼 희빈 장씨는 당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숙종 대에는 그 이전 시대보다 신분제 사회의 균열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 출신이자 어머지나 천인인 그녀가 명문가 출신인 인현왕후 민씨를 제치고 왕비가 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이 받침이 됐기에 가능했다.

 

장씨의 왕비 책봉은 조선의 신분제를 뒤흔들었다. 조선시대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신분은 대부분 사대부였다. 종실이나 대신들의 자제는 음서로도 진출했으나 대부분은 과거를 통해 선발됐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양반과 양인이었다. 천인과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분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장씨 집안은 어머니가 천인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장씨의 외삼촌, 오라버니는 벼슬에 제수됐다. 중인 출신의 아버지를 옥산부원군으로 봉하게 하고 오라버니 장희재를 훈련대장으로 삼았다. 신하들은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대했지만 장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폐비가 된 민씨는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선 집 밖의 왕래를 금하고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친척과 이웃에서도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양식과 땔감 마저 떨어져 살림살이도 궁색해졌다.

근신하며 지내는 민씨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항간에서는 민씨와 장씨를 빗대어 노랫가락 '미나리요'를 만들어 불렀다. '미나리요'는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라는 가사로 시작되며 여기서 미나리는 민씨, 장다리는 장씨를 가리킨다. 백성들은 장씨의 권세가 한철용, 즉 얼마 못갈 것이라며 민씨를 국모로 생각했다.  

 

결국 장씨는 빈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장씨는 민씨를 국모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든 자신이 민씨를 제거하고 왕비로 복귀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씨의 적은 신분제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백성들도, 유생들도 모두 그녀를 무시했다. 천인 신분으로서 어떻게 국모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씨는 이러한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장씨의 죽음을 통해 많은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 하지만 결국 역사의 새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숙종 대 신분제의 불합리함을 느낀 사람들은 비밀 결사 단체를 만들어 체제에 항거했다. 신분 제도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한 사람들에게 장씨의 삶은 희망을 줬다.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도 사대부들을 조종하는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씨는 자신의 삶을 찾아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은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6년이었다. 장씨는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은 남편 숙종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남성 국왕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으로 정국을 주도했고 여성으로서 정치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려운 환경과 배경을 이겨내고 자식을 왕으로 만든 그의 삶을 통해 상황을 탓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개척해내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또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 두 여성은 단순히 숙종을 둘러싼 왕의 여인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 각파가 벌이는 권력쟁탈의 상징이기도 했다. 민씨가 여흥 민씨 가문을 배경으로 한 서인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면 역관 가문 출신인 장씨는 남인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었다.

실제 권력과 함께 그들의 인생은 부침을 겪었다. 민씨는 서인의 집권과 함께 왕비가 됐다가 서인의 몰락과 함께 폐비가 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복위가 됐다. 반면 장씨는 서인이 실권을 할 무렵 희빈으로 서열이 올랐다가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왕비에 책봉됐다. 하지만 역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며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사약을 받게 된다.

 

 

 

 

[포커스리더學]

외교로 지킨 권력, 그 칼에 당한 '비운의 전략가'

 

조선왕비⑥-뛰어난 외교가이자 전략가- 명성황후 민씨
-힘없는 왕비, 스스로 기반 다지고
-시아버지 대원군에 맞서 개방 주도
-서양 열강들의 도발 '조율사' 역할
-백성을 품지못한 아쉬움 교훈으로

조선시대 명성왕후는 두 명이 있었다. 현종의 비로 숙종을 낳은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3) 김씨와 조선 말기 일본 공사가 이끄는 낭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민씨다.

이 중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민씨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엇갈린다. 그는 조선사회의 폐쇄성을 넘어서는 뛰어난 외교역량을 발휘했지만 결국 일본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1895년 조선은 중요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흔들리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 등이 얽히며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이 일어난 시기다. 건국 후 조선의 외교는 오로지 중국과의 관계뿐이었으나 19세기 말에 들어서며 구미 여러 국가와도 소통을 해야 하는 복잡한 관계에 직면했다. 이때 민씨는 국제적 외교관계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 명성황후 민씨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민씨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외교역량을 발휘한 반면 국내외에 많은 정적도 만들었다. 이로 인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결국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지지 기반을 만들라=명성황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됐으며 고종 즉위 1년 가례를 올리고 이후 30여년간 고종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흥선대원군은 앞서 여러 차례 외척세력에 의해 왕권이 흔들린 사례가 있다는 점을 감안, 민씨를 왕비로 간택할 때 이 같은 점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하지만 왕비가 된 민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 권력을 얻기 위해 먼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었다.

민씨는 일가부터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 첫 대상이 민승호였다. 민승호는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돼 있는 인물로 민씨의 오라버니가 됐다.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민승호는 곧 이조참의가 됐고 이후 병조참판에 임명됐다.

민씨는 만일 자신이 왕자를 낳더라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후궁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했다. 결국 민씨는 시아버지와 정치적인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민씨는 친정의 친인척 세력뿐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된 세력을 조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앞날을 계획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실각된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 일문의 김병기 등을 포섭하고 남편 고종의 형인 이재면 등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모두 흥선대원군에 불만이 많은 자들이었다.

유림 세력도 눈여겨봤다. 당시 유림들은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기회가 오면 봇물처럼 터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 기반을 통해 민씨는 왕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왕비로 책봉되기는 했으나 전혀 권력이 없었던 민씨는 스스로 지지 기반을 만들어 권력을 장악했다.

◆뛰어난 외교술=청국과 러시아를 이용한 외교술은 민씨의 정치적인 역량을 잘 보여준다.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는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일본 또한 갑신정변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른 열강이 조선에 출현했다. 바로 러시아였다.

민씨는 러시아 공사 내외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민씨는 비밀리에 조선과 러시아 간에 밀약을 다시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알려져 또다시 무산됐고 이로 인해 청나라와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을 지나치게 간섭한다며 공개적으로 공격을 해 댔다.

민씨에 의해 조선에서 밀려난 일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민씨만 제거한다면 조선의 내정을 장악할 수 있다고 일본은 계산했다. 조선침략의 장애물이 명성황후 민씨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일본의 계획은 을미사변으로 성공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고종 32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돼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이다. 민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은 더 이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민씨가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해가 두 번 바뀐 후인 1897년 1월이다. 또한 시해된 지 2년이 넘은 11월22일에서야 국장이 치러졌다.

백성을 품지 못한 아쉬움=명성황후 민씨는 정치적인 역량과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씨가 한 가지 자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백성이다. 민씨는 당시 백성의 어려운 처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생존권을 외국에 의탁했다. 그 결과 민씨는 일본의 칼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민씨는 리더로서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세력은 백성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21세기의 리더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지지해줄 부하직원, 상사, 여러 이해관계에 있는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리더십은 무용지물이 된다. 다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종잇조각이 돼버린다. 오늘날 필요한 리더십은 진정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이들을 먼저 신뢰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 아시아경제 

 

 

 

 

 

 

 

 

조선시대 야심찬 여인들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현재의 경복궁은 예전의 위용을 잃어버렸지만 드라마 여인천하 안의 경복궁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왕을 신처럼 받드는 신하들이 있고,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가꾸며 서로를 시기하는 여인들이 있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권모술수를 쓰는 정치인들이 있다. 여인천하 안에는 권력의 중심 인물들이 살고 있는 경복궁이 있다.

여인천하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경복궁 그 속안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의 제 11대 왕이었던 중종은 연산군의 폐위 후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된 왕으로 여인천하의 중심 인물인 문정왕후의 남편이다. 38년 동안 왕좌를 지키면서 경복궁에서 그가 주로 생활했던 곳은 근정전과 사정전 그리고 강녕전이다.

 

 

 

 

경복궁의 정전 : 근정전
화려한 용상에 위용을 과시하며 앉아 있는 임금… 그리고 만조백관과 호위하는 군사들 악공과 궁녀 내시들…… 조선왕조의 국가적 행사나 의식은 바로 이 근정전과 조정에서 이루어졌다.

 

500년 역사의 산실 : 사정전
나라의 앞날, 간신 척신을 물리치고 이 나라 조정을 바로세워야 할텐데….. 중종의 고민과 신하들의 정무가 이루어지는 공식 직무실에서 조선조의 역사는 쓰여졌다.

왕의 쉼터 : 강녕전
공인은 힘들어….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이라도 사생활이 없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강녕전은 공사에 지친 임금에게 안식을 주는 임금의 독립 공간이다. 신하도, 중전도, 후궁도 귀찮을 때, 절대 고독을 즐기고 싶을 때 찾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강녕전이다.

 

내명부의 안주인 중전의 처소 : 교태전
조선 500년 역사 중 교태전의 위세는 대단했다. 중전을 앞세워 권력을 잡으려는 외척들의 밀실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명부의 일은 교태전의 주인에 의해 결정되기에 후궁은 물론 궁녀들도 교태전의 위용에는 무릎을 꿇는데….

차기 왕권주자의 침소 : 동궁
복성군, 원자 그리고 후궁의 왕자들…. 차기 대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암투와 권력싸움으로 혼선을 만들어 낸다. 조선시대 많은 왕자 중 차기 왕권주자가 결정되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동궁이다.

 

외로운 궁중 생활의 휴식터 : 경회루
구중궁궐 외로운 궁중생활…. 친구도, 믿을 사람도 없는 철처하게 공적인 공간 궁전. 이런 궁중생활에 위안처로 애용되는 곳은 경회루이다. 여인천하를 비롯하여 각종 사극에 외로움에 눈물 흐리는 장면에 많이 쓰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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