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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0 -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은 칠천량 해전 승리후 천안까지 점령하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왕
으로 삼고 입공(入貢) 을 허락한다는 봉공안 (封貢案) 을 보냄으로써 국면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에 협박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하는데...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명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으니......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일본 요구조건들은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조선 8도중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조선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포로로 잡은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 를 석방한다.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화번 공주" 라고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가 외국의 지배자와 혼인하고 이를 통해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많았으니.... 히데요시가 천황(일왕) 의 정비 혹은 실권자인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요구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지만 후궁이라니?
무역 증서제란 감합무역이라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와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센고쿠 오우치씨와 호소카와씨등 다이묘들이 서로 명나라와 교역하려고 싸우자 폐지된 제도 입니다.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이니 고려해 볼 수가
있지만 세 번째, 조선 남부 4도의 할양은 제일 황당한 조건이며 조선이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조건으로 명나라가 강화 협상때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이었습니다.
왕자 석방및 볼모 송환은 임진왜란 이전 한국사에서 왕자를 다른나라에 볼모로 보낸건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왕) 이 왕자 복호와 왕자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 때 여몽전쟁 및 이후 원 간섭기
시절에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지만 이번에는 굴복하라는 소리니 조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 사신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임명해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고 허위 보고하니 명나라는 강화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
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죠안
(內藤如安 코니시 죠안) 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할 무장명단도 함께 제출합니다.
명나라 조정은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으며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합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임명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번속국인) 조선과 화해하고 침략하지 말 것.
명나라 책봉사는 완전 철군이 안됐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니 히데요시는 3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1. 조선의 왕자를 데려오면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소 중 10개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에 있던 일본군 군영 2/3 를 불태웠지만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고 도망치니....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했으며 조선은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냅니다.
심유경의 행렬에는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선교사 프로이스가 기록했으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에 책봉되었고
다이묘들도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니 책봉문, 금인, 관면이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중 입니다.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 로,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 도 수령해 착용하기 위해 별실로 갔다" 고 기록되었습니다.
책봉전후 히데요시는 조선 왕자가 오지 않은데 불쾌해 했고 조선이 사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노했으며..... 명나라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책봉하니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 고 말합니다.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합니다.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나라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을 이간질 하였음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으니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과 감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됩니다.
명나라는 요동 지방의 안보 문제와 동쪽에서 외국이 쳐들어올 때 완충지역으로 조선의 존재는 필수불가결
이었으니.... 조선군이 여진족에게 그렇게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것은 조선의 예방 전쟁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입장에서도 저들은 귀찮은 존재였기에 동맹국의 손을 빌어 해결하려는 명나라 의사도 작용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이유가 중국을 치려는데 교두보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반드시 살려내야만 했으며 또한 가장 관계가 좋은 번국이자 우호 국가인 조선을
지원하고 '천조' 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명나라 입장에서 무시할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업적을 조명하려고 실책을 덮는 책들도 있지만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대망> 에서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며....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노망이 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단 한 줄로 끝내 버리고 맙니다.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언급할 때 업적과 실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임진왜란을 특별히 신경쓰지는 않으며,
노망난 히데요시가 사고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흑역사 취급되어 매체로 다루지 않으려고
하며, 다뤄질때도 히데요시가 정신 나가 일으킨 쓸데없는 뻘짓으로 표현하는데 물론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협상을 통해 조선 남부 4개 도를 할양받을수 있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말에
현혹되어 3년 이상 회담에 매달렸으나 결국 속은 것으로 판명되자.... 화가 머리 꼭지까지 차서
1597년에 대군을 보내 침략하니 정유재란으로, 이번 전쟁의 목표는 경상도, 전라도 및 충청도
3개도를 할양받는 것이라 점령 대신에 무차별 살육과 방화를 통한 초토화를 자행하니 장기전입니다.
병력은 일본군 14만명에 명군은 11만 7천인데 비해 피폐해져 빈궁해진 조선군은 “3만 8천” 에
불과했으니이제 명군이 이 전쟁을 떠맡은(?) 것이며, 또 병사들에게 만나게 되는 조선인을
모두 죽이고 코(귀) 한되씩을 바치라는 엄명까지 내렸으니.... 조선을 말려 죽일려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보급이 안되고 혹한으로 고생한데 교훈을 얻고는 봄이면 공격해 충청, 전라도를 휩쓸어 죽이고
불태우며 가을에는 따뜻한 남해안 29개 왜성으로 돌아와 휴식하며 재정비한후... 다음해 늦은
봄에 다시 공격하기를 몇년 되풀이 하면 조선은 농사를 짓지 못해 굶어죽을 것이고, 멀리서 온지라
보급이 어려운 명나라군도 철수하면..... 기진맥진한 조선이 하삼도를 할양할수 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 이전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왜 조선 수군에 패하는지' 를 분석했으니.... 판옥선은 세키부네
보다 훨씬 크고, 화포/총통 발사가 주력이며, 제자리 선회가 되고, 장갑이 견고하니 판옥선 1척당
세키부네 5척은 붙어서 화포/ 총통을 무력화하고 백병전을 벌이거나, 큰 배인 안택선으로 산대해야 한다.
세키부네는 첨저선이고 판옥선은 평저선이니 세키부네가 더 빠르므로 거리를 벌리며 스웜 전술을
펼치면 판옥선의 노꾼들을 지치게 할 수 있으며 대신 세키부네는 이동의 곡률반경이
커서 내해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므로.... 내해 해상전은 피하고 외해에서 해상전을 유도해야 한다.
히데요시는 조선 (造船) 전문가 구키 요시타카에게 군선 설계를 맡겨 큰 배인 아다케부네 (안택선)를 대량
건조하니 이에야스를 비롯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기한을 정해 건조 척수를
할당했으며 또 조선 수군은 최정예로, 해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니 수군이 육군과 합동해 움직여야 한다.
낮에는 육지- 해안으로 피해 싸움을 피하고,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하도록 하며, 해안지역에 감시병을 배치해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량목을 봉쇄한다. 부산포 해전 때는 열려 있어 조선 수군이 장사진으로 들어와
부산포의 일본 선박들을 격멸하고 돌아갈 수 있었는데, 초량목만 지키면 부산포의
함선들도 보호하고 조선 수군은 절영도(현 영도구) 의 외해에서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안골포- 웅포- 가덕도에 왜성이 촘촘히 건축된 것이 이순신과 후임 원균 조선 수군의 7차례 부산 공략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데.... 왜성을 힘들여 공략해 봐야 일본 육군이 쉽게 다시 차지하여 소모적이고 또한
왜성들을 공략하며 순차적으로 부산포도 치자면 시간이 허비되나 왜성의 일본군들이 부산포에 알려 대비한다.
1592년 9월 1일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은 안골포- 가덕도가 비어 있었기에 조선 수군이
숙박하고 쉬어가며 부산포를 타격할 수 있었는데, 1593년 2월 10일 이순신의 웅포
해전은 안골포 일대에 상륙전까지 감행했으나 왜성을 뺏진 못하고 반신불수를 만드는데 그쳤다.
1594년 10월 1일, 이순신장군의 장문포 해전은 안골포- 가덕도 맞은편인 거제도에 조선
수군의 정박 거점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몰아내진 못했으나, 결국 조선 수군의 압박을 못 이긴 일본군은 거제도 주둔을 포기한다.
1597년 2월 10일, 이순신장군의 부산 진공작전은 거제도 장문포에서 출발해 안골포- 가덕도
를 패싱하여 절영도에 정박 지점을 잡고 부산포를 때렸으며, 1597년 3월 9일 원균의
기문포 해전은 졸전으로... 이후 일본군이 슬금슬금 거제도를 침범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다.
1597년 3월 29일, 원균은 육군으로 안골포- 가덕도를 공략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나, 당시 조선군의
힘으로는 시도도 어려웠고 1597년 6월 원균이 안골포- 가덕도를 때렸으나 패해 거제도는 일본군
세력권에 들어갔으니 부산을 치고 싶으면 칠천량과 옥포에 서 멀리 외해로 힘들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594년에 전염병이 돌아 수군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임란 개전후 최대 2만 명 이상이던 병력이 1595년 봄에는
4천1백여명으로 줄어들었으며 특히 이때 사망자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첫해 해전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전투력이 높은 병력들이니, 수군은 태반이 역질에 죽어 적을 소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도 운용하기 어렵다.
노직 (盧稷) 이 아뢰기를, “연해에 전선 (戰船) 이 비록 많으나 만약 배를 부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운행하여 수전 (水戰) 을 독책 (督責) 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수군 (水軍) 의
번가포(番價布) 를 경강(京江)에 사는 노젓기에 능숙한 사람에게 주어 격군(格軍) 을 삼아야 합니다.”
당시는 협상 시기라 교전이 없어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었으나, 일본군은 전술 교리가 향상되고
요충지를 점령하여 곳곳에 요새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수군의 움직임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임진년 때 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함부로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수군의 병력이 모자라니 충원하는 과정에서 호남 지방이 수군 징발 때문에 잡상인의 통행마저
없어져 기존 도로망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하며, 칠천량 해전 한달 전인
1597양 6월 중순에야 인력 충원을 하였으나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인원들이 대다수 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이 보여준 승전에 고무된 나머지 강화 교섭기 동안
위기를 맞은 조선 수군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이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부산 앞바다 출전의 무리한 강요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1996년 12월 27일 조선 조정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보고가 올라왔으니...
12월 12일 부산왜영에 큰 불을 내 가옥 1천호, 화약창고 2개, 군량
2만 6천섬, 왜선 20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라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다음날 제찰사 이원익의 선전관 김신국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군관 정희현이 부산왜영을 기습한
공인데, 이순신의 군관이 물건 운반으로 부산에 가서 이를 파악해 전달했고,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 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격노했고, 류성룡조차 이순신을 '게을러진 것' 이라 평했다.
1597년 1월 1일, 조선 조정에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편지를 전했으며, "가토 기요마사의
7천 군사가 12월 4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바람에 따라 거제/기장/서생포 중에 상륙할 것이다.
조선 수군을 거제도로 옮겨만 두어도 상륙에 압박을 주어 그가 태합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이
되어 오만함이 벌받게 된다. 그러면 고니시가 조선 정부와 계속 협상이 가능하다" 는 내용이었다.
선조의 명령서가 1월 6일 한산도로 왔는데 사나흘후 이순신은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나아가 주둔해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벌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다시 알려주십시오" 라 했고, 조정에 이 편지가 도달하자 모두 장하게 여겼다.
1597년 1월 12~14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410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재상륙했다.
이를 정유재란의 시작으로 보며,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이 가토가 넘어온 사실까진
모른 채 한산도를 직접 찾아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1월 19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 장계가 올라왔다. 1월 11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나는
가토를 미워해 죽이려 한다. 그가 며칠내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다. 제발 수전에 능한 조선 수군이 가토를
없애달라.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 라는 편지라 선조는 이순신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1월 21일, 조선 조정에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의 '1월 12~ 14일, 일본군 재상륙'
보고가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 조정에 원균의 "내가 삼도
수군 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고 일본군 재상륙을 막았다" 는 보고가 도착했다.
1월 23일 김응서의 보고에 1월 13일에 요시라가 "가토가 도착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놔두었는지
모르겠다" 고 원망하니 선조는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끝났다" 고 극언
하며 격노했고, 1월 27일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탄핵을 논의했다. 원균을 전라병사
에서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은 유지시킨다.
2월 1일 이순신의 보고는 1월 19일 선조의 출정명령에 대해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이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습격을 받을 것이다" 라고 출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 사헌부는 통제사 이순신을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2월 4일 이덕형이 이순신의 "원균이 조정을 속였다. 열두살 아이를 멋대로 군공에 올렸다" 던
주장의 확인 결과, 원균의 자식의 나이는 12세가 아닌 18세고 활쏘고 말타는 재주도 있어
군공에 올리기에 적합했다. 이순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니 이순신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의 압송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모른채 2월 9일 도원수 권율,
경상우병사 김응서, 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은 200척(판옥선 63척,
나머지는 소선) 의 조선 수군을 한산도에서 출발시켜 거제도 장문포로 이동시켰다.
권율이 올린 장계에, 거제도 장문포에서 배를 띄웠다. 안골포는 왜적 1천명, 선박 40척이
있었고, 가덕도는 왜적 5백명, 선박 20척이 있었으나, 이들을 패싱했다.
부산 다대포에 도달한뒤,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3명의 군관을
보내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부산포로 유인하여 조선군 + 고니시군이 함께 그를 참살하자.
그가 오지 않는다면 고니시가 가토의 처소로 조선군 사신을 안내한 뒤, 조선군
사신이 그를 엄습해 죽이는 걸로 하자. 조선 수군은 부산 초량목
에서 대총통 1발을 발사해 도착했음을 알리겠다" 라고 정보를 미리 전달했다.
오후 2시경 200여척의 조선 수군은 초량목도 지나 부산포로 진입해 1,000척에 달하던
일본 배들과 마주했다. 이후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이순신은 "열병(閱兵)
했다" 고 표현하고, 원균은 "진퇴 (進退) 하며 병위 (兵威) 를 과시했다" 고 표현한다.
원균이 올린 장계에, 이순신 통제사의 대장선이 썰물 때 부산포 쪽에 밑창이 땅이 닿아 하마터면
일본군 에 사로 잡힐뻔 했다. 안골포 만호가 빠르게 노를 저어 배를 붙여 연결해 끌고
나왔다. 밤중에 나주판관 어운급이 불조심을 하지 않아서 적진 코앞에서 기계와 군량을 태웠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부산에서 함대가 돌아오는 길 웅포 근처에 물을 구하러 정박하자,
왜군 19명이 기습해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안골포로 잡혀갔다. 이순신은 대노해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상륙 공성전을 벌였다.
원균은 이 가덕 전투를 '우리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고 별로 이익이 없는' 전투였다고
보고한다. 이 소식이 부산포에도 알려지자 협상파 고니시가 급히
요시라를 직접 가덕도까지 보내 사과하고 협상하여 양측의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선조- 김명원- 윤근수의 대화에, 가덕도에 선전관이 새 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을 대동하고 도착하였고,
통제사 직의 인수 인계를 시킨뒤,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했다. 원균은 통제사
이순신의 판옥선 134척, 거북선 3척, 병력 17,000명, 군량미 9,914석, 벼 500섬, 화약 4,000근,
전선에 탑재된 총통외 여분 총통 300자루, 건조작업이 진행되던 새 판옥선 48척 을 인수인계 받았다.
일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가토 기요마사 군이 많이 온다고 알려왔다. 원균은 한산도 통제영으로 후퇴 결정
하였다. 원균은 제해권이 압도적이고, 안골포/가덕도/부산포의 일본군까지 조선에 친화적이니 부산 절영도에
적이 없어 주둔을 검토한다고 하니 선조와 김명원은 부산 절영도는 안골포/가덕도/부산포 일본군이 배반해
울산의 가토와 협공하면 포위되기 쉽다며 계획은 반대고 요시라는 우리 조선군 포로들을 견내랑에 보내주었다.
1597년 3월 9일 거제도 기문포에 일본군 3척이 정박하자 원균이 첫 출정하여 이들을 몰아냈으나 18명
을 죽인데 반해 140명이 죽은데다가 처음으로 판옥선도 빼앗기는 등 엄청난 졸전의 승리(?)니,
원균과 도원수 권율은 '승전' 이라 보고했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는 '졸전' 이었다고 장계를 올렸다.
4월 1일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시작했고 순천에 이르자 권율이 이순신
을 각별히 대우하고, 이억기도 서신을 보내오고 각 군관들은 원균의 '망녕
되고 전도된' 수군의 실시간 상황을 인수인계 및 전달하면서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다.
4월 19일 원균의 장계에, "안골포- 가덕도, 죽도, 부산포 4곳에 일본군이 있다. 안골포-가덕도 2곳은 3- 4천
도 되지 않아 육군으로 치면 섬멸이 쉽다. 그 뒤에 우리 군사가 전진해 장수포(長藪浦 용원) 에
진을 치면 거제 내해는 우리 것이 된다. 그뒤 날마다 부산포를 때리면 일본은 지쳐 철군할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대치 상황해서는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고, 부산- 울산을 일본 영토로 영원히 넘겨줘야 할수도 있다.
나라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리면 정병만 30만은 될수 있다. 날이 가물어 땅도 단단해 말이 달리기도
쉬운 4~ 5월 중 안골포- 가덕도를 육해군이 동시에 때려야 합니다. 7- 8월 장마철엔
육전도 해전도 힘들 것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요시라는 거짓으로 속여 시간을 끄니 무시해야 합니다"
4월 22일 비변사는 "안골포는 육군이 포위협동이 쉬우나, 가덕도는 상륙전이라 피해가 클 것", "30만을
4~ 5월까지 소집하는 것은 불가능", "다만 안골포를 치자는 것은 타당한 요구로 보이니,
도체찰사 (이원익) 와 도원수 (권율) 에게 판단을 일임해 가능하면 진격하라고 하는게
좋겠다" 라고 분석해 올렸다. 선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시험하여 보는 것은 허락한다" 고 했다.
4월 30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부산에 도착했으며
5월 초 도도 타카토라의 수군이 부산에 도착했으며 5월 8일 권율의 보고에,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 때문에 조선 수군이 고단한건 원균의 주장과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5월 12일 권율은 조선 수군의 공격 장계를 올렸는데 수군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원균은 육상에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선제공격을 전제로 했던만큼, 수군 단독의 공격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원균의 역량 문제이기도 했으나 수군은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군 역시 대응책을 준비했던만큼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으니 비변사가
전략을 제시했는데, 수군을 3등분해 절영도까지 오가며 계속 강습 타격하는 것인데
한산도~부산포 사이 중간 정박 지점이 일본 육군의 습격을 받을수 있는지라 무산 되었다.
6월 10일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이 전략을 제시하니 수군을 2등분해 절반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키고, 절반을 이끌고 부산포를 강습하면, 안골포- 가덕도가 부산포로 나간
조선 수군 배후를 치려해도 한산도의 군세가 이들을 압박할수 있다는 것.
조정은 병력을 5천명까지 지원하겠다며 압박했고 이원익과 권율 등이 부산포를 강습하라 명했다.
6월 12일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권율에게 보고하길, "부산의 일본군은 창원으로, 서생포의 일본군은 경주
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는 것. 6월 17일 권율이 원균이 올린 장계를 이순신에게 보이며 불만
하길 "수군과 육군이 함께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후에야 부산으로 진군하겠다" 고 뻗대고,
수군 장수들과 불화중인데, 원수사는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 고 평했다.
6월 18일 권율이 원균에게 독촉해 수군 단독 출전하게끔 했다. 조선 조정은 육군 5천 지원을
약속했으나, 이날까지 이원익이 주도해 진주 제석산성에서 보내 온 육군은 1만이 아닌
1천에 불과했다. 이를 수륙병진까진 아니어도 상륙전 등으로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원균이 한산도에서 함대 100척을 이끌고 2차 출정을 나섰다. 저녁에 거제 장문포에서 숙박했다.
6월 19일 작성해 29일 도달한 이원익의 장계에 안골포를 학익진으로 입장했으나, 해안 절벽에 적들이 잠복
하고 암석들 사이 기계를 설치했으며 일본군 배 2척이 나와 싸움을 걸어왔고, 조선 수군이 포탄과
화살을 쏟았음에도 물러나지 않는지라 전진하니 일본군은 헤엄쳐 해안으로 도망갔고 2척을 빼앗아 가져왔다.
곧 가덕도로 공격을 갔으나, 안골포의 적들이 앞질러 도우러 왔다. 조선수군이 적선을 포착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눌지도로 숨어 들어갔다. 오후에 돌아가려 하자 안골포 방면에서 일본 수군이
나오니... 부산쪽에서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다카하시 무네마스의 원군인지라 아군이 다시 돌아서 접전했다.
일본군은 배꼬리를 둘러싸고 좌우를 협공하기도 하며 비처럼 조총을 쏘아댔다. 판옥선을 1척 빼앗겼으며 조선
수군은 방패에 의지해 화살을 쏘며 퇴각했다. 일본군이 지휘관들만 집중 공격해 평산포만호 김축은 눈
아래 탄환을 맞았고, 보성 군수 안흥국은 뇌에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칠천량에서 1박하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6월 26일, 비변사는 수군을 원균의 본대, 배설의 경상우도 부대, 이억기의 전라우도 부대,
최호의 충청도 부대 넷으로 나누어, 한산도- 견내량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서로 관측- 교대하는 전략을 제시했으며 6월 29일
대마도에 일본군이 6- 7월 동남풍이 불 때 재상륙을 노리고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7월 4일 원균이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3차 출정을 나서 7월 5일 칠천도에서 1박했고
7월 6일 옥포에서 1박후 7일 새벽에 가덕도를 돌아 다대포에 이르니 일본 수군
배 8척이 있었는데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니 8척을 불사른후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했는데..... 때마침 대마도에서 일본의 보급선 1,000척이 오던 중이었다.
조선 수군은 외해로 추격했으나 일본 배들은 빠른데다 흩어져 달아나기에 섬멸할 수 없었으며
외해에 적합하지 않은 평저선인 판옥선들이 풍랑에 표류하여 판옥선을 무려 12척
이나 상실하는데, 5척은 두모포 (기장군 죽성리) 에서 전멸했고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해
전멸했으며 부산포에서도 500여척이 나와 저 1,000척에 호응하려 하자 조선 수군은 퇴각한다.
7월 8일 중간에서 숙박을 했고 7월 9일, 숙박지에서 전투가 발생했는데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도 쏘지 못 했으니 전투 결과 8척의 배가 손실되었으며 10일 원균이 한산도에
도착한후 도원수 권율에게 가니 분노하여 곤장을 치는지라.... 원균은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온뒤, 그 날로 전군을 4차 출정시키니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언했지만 묵살하고 진행했다.
7월 12일 3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칠천량에서 1박 했고 13일 옥포에서 1박 했으며 7월 14일
정오에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는데..... 조선 수군 보다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이 슬슬 피하며 대결을 회피하니 홧김에 추격하였으나 노군들이 탈진되니 결국 복귀한다.
7월 14일 저녁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 도착해 물을 싣기 위해 400명을 보냈는데..... 가덕도에 있던
타치바나 나오츠구 군의 기습을 받자 원균은 그 병사들을 전부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7월 14일 이른밤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했지만, 해소실기에 따르면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즉 정박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본군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 수군은 또다시 노를 저어 칠천량으로 이동한다.
7월 14일 늦은밤, 조선 수군은 꼬박 24시간을 노를 젓고 이제야 칠천량에 도착해 휴식(오침) 을
취하는데 3차 출정 때부터 따지면 장장 11일간 330km 나 노를 저은 것이다.
배설은 "칠천량은 육지로 움푹 파인 형세에다, 양 옆이 산등성이로 시야가
차단되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정박하면 안 된다" 고 간언했으나,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
7월 15일 아침, 전날밤 전투를 치른 거제 영등포와 가덕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긴급보고한 것이
창원의 일본 육군 좌군, 부산의 일본군 수군에게 닿았다. 이 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달전부터
요시라를 통해 조선군에 흘려왔듯 일본군 전군이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하려던 날이라 출병하려던 참이었다.
일본 육군 좌군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등) 5만 6천은 창원에서 고성 방면
으로 상륙 차단을 위해 진격을, 수군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등)
은 김해 죽도/ 부산/ 가덕/ 안골포에 흩어져 있던 전군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향했다.
7월 15일 오침(낮잠)을 자고 일어난 원균은 지금까지의 경과로 의욕을 잃고 좌절하여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밤 10시경 일본 수군의 야습이 시작되었으니, 희득의
해상록에 따르면 작은 배 2척이 조선 수군 한복판에 접근할때 까지 조선 수군은 경계 체계가 전무했다.
이렇게 피곤한 때야말로 지휘관은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으니,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수군 지휘부는
몰랐는데 즉 일본군 배가 조선 수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몰랐으니 초병을 세우거나 정찰을 게을리 했다는....
노를 젓는 격군들이야 불쌍하게도 무려 11일이나 힘들게 노를 저었으니 대다수가
잠에 취해 있었다고 쳐도.... 병사들은 전날 하루종일 전투를
치렀다는 이유로 경계근무의 교대체계 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어이없는 일이었다.
일본 수군이 대포 2발을 쏘니 군량선 4척에 불이 났고, 당황한 주변 선박들이 닻줄을 끊어 분리
하려 우왕좌왕 함대 간 충돌이 일어났으니, 김완의 해소실기에,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는 원균이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는데..... 하지만
김완은 기습해 온 적선이 단 2척뿐이라며 거부했으며 곧 도착한 3척 합쳐 적선은 단 5척이었다?
7월 16일 오전 0~ 3시경,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면, 일본 수군이 추가 도착했으니 비거도선
(작은 선박) 10척이 전선 사이를 뚫어 휘젓고, 병선 5~ 6척은 진 바깥 복병선을
둘러싸서 불을 지르자 원균은 놀라서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게
하며 변을 전군에 알리는데, 적의 배가 충돌하고 총탄이 날아드니 군사들이 놀라 실색했다.
7월 16일 오전 3~ 5시경, 김완의 해소실기에, 일본 수군이 대거 도착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토도 타카토라의 선발대로 50척 가량이었으니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수군은 어찌할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 (溫川) 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주장(主將) 은 명령체계를 잃어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넜다.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 만호 강응표,
회령포 만호 민정붕, 조라포 정공청, 해남대장, 강진대장 등은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 (軍官), 사부 (射夫), 노자 (奴子) 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 이 사례하며 말하길 "영공(令公) 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 라고 했다.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한다" 라고 했다. 적선
2척이 50보 이내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은지라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라고 불렀다.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군관 김대복(金大福) 이 편전 10여발을 쏘았을 뿐이다- 『해소실기』《용사일록》
7월 16일 오전 4~ 6시경, 일본 측 정한휘보 권4 30면에,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가 뒤이어 도착해
거함에 뛰어올라 몇 사람을 참수했고 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배를 빼앗았다. 요시아키는 다른 별선에
뛰어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떨어졌다. 즉 일본 수군은 돛대를 사다리로 백병전을 발휘했다.
새벽의 분전 중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김완은
함선이 점령당하자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많아 밀리니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전력을 유지했는데....
7월 16일 오전 6~ 8시경, 조선 함대가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원균을 따르지
않은 절반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으니 배설이고, 원균은
주력 함대를 막다른 골목인 진해만과 춘원포로 지휘한뒤 배를 불사르고 지상으로 도망친다.
7월 22일, 당시 현장에 있던 선전관 김식에 따르면, 토도 타카토라의 선봉대(50여척) 가 3- 4
겹으로 에워쌓으며 형도 (刑島 견내량 입구) 등 여러 섬에도 일본군을 배치해 위협했다.
즉, 도도는 원균에게 견내량이 막혔다고 착각하게끔 하여.... 일본 본대가 와서 전멸하느니
배를 버리도록 속이는 것이 목적이었고 원균은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배설 등은 견내량
이 막혀있을지 모름에도 강행돌파를 결정했으나, 의외로 견내량은 막혀있진 않았던 것이다.
7월 22일 병조판서 이항복에 따르면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로 패인을 분석했다.
원균이 정상이라면 경계 근무에 실패했더라도 새벽까지 기습해 온 상대는 소수임을 파악하고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로 후퇴했을 것이다. 반대로 지휘권을 완전히 상실한 지휘관
이었다면 중간 지휘관들이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 지휘관들의
재량은 빼앗아 놓고 본인은 군대 과반을 사지인 진해만/춘원포로 몰아넣어 배를 버리도록 지휘했다.
7월 16일 오전 7~ 9시경, 원균이 스스로 판옥선들을 없애버린 이후에야 1천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 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일부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수군 본 함대는 진해만/ 춘원포로 진격해서 육지로 도망중이던 조선 수군들을 학살했다.
일본군은 14만 중에 1만을 부산에 주둔시킨후 모리 히데모토와 가토기요마사등 7만 4천명 우군은 500명
조선군이 지키는 황석산성을 함락했고..... 우키다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등 5만 6천 좌군은
남원에 도착해 명군 양원의 3천과 전라병사 이복남등 조선군 1천 합계 4천명이 지키는 남원성을 함락합니다.
그리고 우군과 합류해 북진하니 권율등 경상도 조선군은 바짝 엎드려 일본군을 피해버렸고 전주에
주둔한 진우충의 3천 명군은 도주했으며.... 일본군은 전주와 공주를 무혈점령하니 충청도
조선군이 산으로 숨어버린 가운데, 죄군은 전라도로 남하하고 우군은 갈라져 가토 기요마사가
충북으로 진격하나 충주의 오유방 4천 명군이 도주하니 가토는 발길을 돌려 경상도로 내려 옵니다.
한편 모리 히데모토 3만과 구로다 나가마사 1만은 북진해 천안을 점령하니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기도
남부 조선군이 달아난 가운데.... 평양에 있던 양호는 한성으로 달려와 마귀를 시켜 해생과
파새에게 명군 기병 4천으로 직산에 주둔시키니, 9월 7일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5천 (1만?)
과 전투가 벌어지는데 후방에서 모리군 3만이 나타나 포위하려고 하자 명군 기병은 수원으로 달아납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안성 등을 사흘간 약탈하다가 9월 11일 남쪽으로 물러가니 조선은 임진왜란 처럼
한성을 공격할까 보아 전전긍긍하다가...... 물러간다는 보고에 임진강에서 가토 기요마사
처럼 또 간계를 쓴다며 경기도 동부지방에 경계령을 내렸는데, 진짜 물러가자 추격해 낙오병
몇명을 죽이고는 마치 권율의 조선군이 저 직산전투에 참가한 것처럼 슬쩍 숟가락을 하나 더 얹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