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한국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 1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살기 좋은 만큼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우울과 불안의 증가가 요인이라 말합니다. 자살의 이유는 도움받을 방법을 몰라서(40.9%), 희망이 부족해서(35%) 주변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에 두려움 때문(28.9%)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와 사회과 많이 고민하고 있으나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집니다. 다시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붙잡아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편리와 안위를 추구하여 자신의 방법대로 살려고 합니다. 영적인 은혜를 추구하기보다 육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사도바울의 삶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을 맺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러하기에 보라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고 분명하고 힘있게 고백합니다.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매임을 받아’ devw (1210 데오 VPRPNMXS dedemevno")
묶다. 매이다. 결박하다.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기에 사도바울처럼 심령에 매임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심령(pneu'ma프뉴마)’은 호흡, 생명, 성령을 뜻합니다. ‘심령에 메임’은 숨쉬고 호흡하여 생명있는 동안의 모든 삶이 성령을 의지하는 영적 마음입니다. ‘의지’는 어떤 일을 이루려는 적극적 마음, 누구에게 마음을 붙여 도움을 받는 것, 몸을 기대어 지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은 모두 해당합니다. 메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 마음. 하나님께 마음 붙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음.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기대고 지탱하므로 결박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보라 지금도 나는 심령에 메임을 받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로 구원과 함께 성령에 묶이고 결박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숨 쉬고 호흡하는 모든 순간이 성령으로 함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적으로 부자일지라도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하여 하나님께 묶여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평안과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성령으로 메임을 당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심령(영적 마음)의 메임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구원하심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계속되는 육체의 피곤과 수고로 마음을 빼앗아 심령에 메이지 않게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믿음 생활이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전한 남아있는 세상 욕망과 습관 그리고 육체적 고난과 고통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예루살렘’ @Ierousalhvm (2419 히에루살렘 NAFS) 평화의 땅(도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하였던 장소가 예루살렘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아브라함과 평화를 언약하고 복을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받은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이 된 숫양의 모습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구원과 평안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환난이 사도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사도바울은 심령에 메임 받아 자기 목숨을 지키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 시작하여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한 사명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온 세상에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장면을 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심령에 메임을 받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진 수난과 고통이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령에 메임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의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복음이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친한 목사님이 불교 신자인 식당 주인을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그곳에 목사님들을 접대 후 주인을 위해 기도하기를 반복하다 그 정성에 드디어 식당 부부가 교회로 나오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주일 예배에 부인이 참석하였고, 남편은 식당 정리 후 참석하려는 그 때 느닷없이 30명이 점심 예약을 하였습니다. 남편이 예약 손님을 준비하다가 바쁘니까 교회 문을 열고 예배드리는 부인을 불러갔습니다. 그 후 그 식당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게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이 부부에게 물질의 복은 받아도 구원의 복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봅니다.
행 20:22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알지’ ei[dw (1492 에이도 VPRANMXS eijdwv") 보다. 경험하다. 의식하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앞 으로 일어날 길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뚜렷이 알 수 없음) 의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땅의 누구도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식하여 그 존재를 확신할 뿐입니다. 확신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도 예루살렘의 시련과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으나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의식합니다(23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복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성령의 메임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육에 속한 자가 되어 사탄의 꾐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성령의 메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힘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믿음이기를 축원합니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