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년의 하루/ 에메랄드
말만 서울이지 버스에서 내려서 얼마를 걸어가야 집이 나오는지 까까머리 중학교 일학년 소년은 힘이 들었다. 교복은 크고 몸집은 작아 교복이 걸어가는지 소년이 걸어가는지 얼핏 보면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언덕배기는 작은 산 하나는 족히 넘지 싶게 높았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사실 먹은 거라고는 아침부터 물밖에 없어서 뱃속이 시냇가처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좀 어지럽기도 하였다. 안색은 하얗고 눈썹은 송충이 같은 것이 못사는 집 아이 같지 않은 외모가 더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민망하게 아침부터 도시락 못 싸오는 사람은 손들어보라는 반장의 말에 지레 자존심이 상해서 속으로 들까말까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점심시간에는 아예 운동장에 나가서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안돼는 반 아이 하나는 밥을 다 먹고도 매점에 갔다 오는 길에 손에 쥔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꼴까닥 침을 넘겨야 했다.
소년은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말썽하나 안 피우고 책만 읽고 싶은 소년은 책 한권 사기도 힘들고 하고 싶은 공부조차 쉽지 않았다. 달랑 방 한 칸 작은 부엌이 있는 셋집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오면 불을 켜고 책을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막걸리 냄새하며 노동일을 하며 흘린 땀 냄새와 발 냄새는 코를 찔렀다. 불을 꺼야 잠이 드는 아버지 때문에 불을 키고 책을 본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불을 키고 책을 보고 싶었지만 밀린 방세 때문에 집주인 잔소리가 무서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밤에 오줌 누러 마당을 가로질러 한 쪽 귀퉁이 암모니아 냄새에 코를 막고 들어 가야하는 화장실에 갔다 올 때면 하늘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하늘에 달을 보면 엄마 얼굴도 같이 떠올랐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내 새끼 이쁜 내 강아지 금세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엄마 냄새는 항상 좋았다. 엄마가 그리워서 숨죽이고 울었다. 아버지가 알면 바로 사내 녀석이 찔찔 짠다고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발뒤꿈치 살살 들고 아버지 뒤쪽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누우면 꿈속에서 엄마 만나기를 기도하며 잠이 든다.
왜 나를 낳았냐고
아버지한테 때론 묻고 싶어진다. 무능한 아버지가 싫어진다. 노동일 하는 아버지가 싫어진다. 다른 친구 아버지는 새까만 차에 눈부신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양복을 입은 모습이 멋있게 보였다. 무엇보다 친구가 아버지에게 보이는 환한 얼굴은 너무 부러웠다. 친구 아버지는 왕자처럼 보였고 내 아버지는 창피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버지가 뭐하냐고 적는 란에 늘 망설였다. 말도 함부로 하고 아무데나 침 뱉는 아버지가 싫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이 학비 못 냈다고 지휘봉으로 책상을 탁 탁치며 가서 돈 가져오라고 말할 때는 아버지가 미웠다.
말썽부린 것도 아닌데 돈 때문에 이래저래 창피했다. 나는 이다음에 결혼 따위는 절대 안할 것이다. 아니 해도 돈 때문에 아이가 울게 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소년은 다짐한다. 이를 앙다문다. 아니 돈만 밝히는 어른들이 싫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있을 때는 그래도 아침은 굶지 않았다. 엄마는 절대 소년을 굶게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없어도 소년의 밥은 꼭 챙겨 주었다. 남자는 힘이 세야 하고 공부도 잘하려면 아침은 먹어야 한다고 반찬이래야 계란말이 하나라도 챙겨 주었다. 쌀이 떨어져도 소년의 밥은 어떻게 해서든지 챙겨주었다. 소년은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처럼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 돈이 없을 때도 식당일을 해서라도 소년을 굶기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소년에게는 없는 집 아이 같지 않게 차려 주었다.
아버지 앞에서 엄마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집을 돌보지도 않고 생활비를 주지도 않고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인생이 마치 엄마 탓인 모양 폭력을 한번 씩 행사하기 일쑤였다. 퍼런 엄마의 눈두덩을 보면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지켜주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너무 미웠다. 힘이 세면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텐데 한번 대들었다가 더 심하게 맞는 엄마를 보면서 다시는 대들지 않았다. 그렇게 심하게 맞던 어느 날부터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었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미쳤다고도 했다. 소년은 믿지 않았다. 언젠가는 웃으면서 나를 안아주시리라 믿었다. 소년은 마음속에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 가난한 환경을 향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려고 여기저기 가보았지만 써주는 데도 없고 무슨 책 외판원 밖에 없었는데 어른들의 일이지 할 수가 없었다. 빨리 커야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 같았다. 공부를 일등하면 되는데 말이 일등이지 참고서도 있어야하고 환경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운동을 똑 부러지게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년은 이 궁리 저 궁리 하였다
하루는 하교 길에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오는데 새로 높은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쳐다보니 어디서 많이 낯이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혹시 친구들이 눈치 챌까봐 모른척하고 뛰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하필이면 학교 근처에서 일을 하실 게 뭐람 소년은 심장이 큰 소리를 내서 힘이 들었다. 건축일한다고 했는데 너희 아버지 노동일 하는 구나하고 놀릴까봐 달렸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뛰었다.
술만 마시고 욕하고 말하면 주먹이 아무 때나 날라 오는 아버지. 코만 드르릉 드르릉 골고 언젠가 술집을 지나치며 보니 빨간 립스틱 칠하고 머리를 꼬불꼬불하게 한 여자 허리에 팔을 휘감고 술 마시던 아버지.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빨간 눈을 하고 학교 댕겨 오냐 하고 아는 척을 하는데 싫었던 아버지. 엄마한테는 못 하면서 다른 여자하고 웃는 아버지. 살갑게 말 한번 붙여주지 않고 밥상을 엄마한테 던지던 아버지.
집에 와서 양말 빨고 방청소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라면 끓여서 한 젓가락 먹고 있는데 아버지랑 같이 일하는 김씨 아저씨가 급하게 뛰어왔다. 라면 먹다말고 소년은 아저씨가 뭐 하러 이 시간에 술 안마시고 왔을까 싶어 쳐다보았다. 김씨 아저씨는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을 차마 하지 못 하였다.
그만 먹고 급히 갈 데가 있어야. 하루 종일 굶어서 배가 고픈지 아픈지 모르는 소년은 달콤한 라면이 먹고 싶은 생각에 짜증이 났다. 어데를 요.
어쩌냐. 니 아부지가 떨어졌단다. 물건 지고 올라가다가 떨어졌어야. 어쩌면 좋냐. 그 자리서 죽었단다 아가야. 니가 얼른 가야 안돼냐. 젠장 그렇게 살다 죽어 부릴 라면 뭣 하러 세상 나왔 다냐 어째 참으로 술을 좀 많이 쳐먹드라 싶더니만 쯧쯧 이를 어쩐다냐......
소년은 뭔 소리가 뭔 소린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미운 아버지가 높은데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긴가. 아까 뜀박질에 얼핏 등만 보고 온 아버지가 이제 볼 수 없다는 건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만 훔쳤다. 소년은 미쳐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몰랐던 것이다.
소년의 입에서 외마디가 나왔다.
아 아버지....... 잘못 했어예
뭐를 잘못했다는 말인지 어미 잃은 새끼강아지처럼 짐승소리를 내고 있었다.
첫댓글 시도 일기도 편지도
아닌
꽁트가
있슴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