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13.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갈 5:1
*제목; 종려주일,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다!
프롤로그. 인간행복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신의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나님은 “아버지”(아빠, Abba, 마 14:36, 갈 4:6, 롬 8:15)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그래서 목사인 나는 그 인간행복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다. 이것만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인간행복의 조건이 있다고 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삶의 의미를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돈이 많아도, 마누라가 이뻐도, 남편 능력이 하늘을 찔러도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게 가치롭고 의미가 있어야 우리는 행복하다.
그 의미를 발견하고 추구하라. 또 이를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리추얼”이 필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행복을 추구하다가 지치면 “인간을 떠난다.” 이것이 나의 리추얼이다. 인간을 떠나보면 바로 인간이 그리웠다. 그러면 다시 인간을 사랑하고 행복을 위해서 노력할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나의 “삶의 의미와 리추얼”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의미도 행복이다. 다만 영원한 행복, 천국에서도 누릴 수 있는 행복, 내가 죽어도 여전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나름의 영적 리추얼이 각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기도하러 간다. 그리고 무작정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산책한다. 그리고 “아~”하고 감탄하며 돌아온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살아보라. 삶이, 믿음이 행복해진다.
인간행복의 조건은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자유”이다.뭐든지 얽매이기 시작하면 인간은 불행하다. 사랑하다가 얽매이면 갑자기 불행해진다. 대부분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유를 추구하다가 결혼이라는 구속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자유연예주의자나 결혼반대자로 생각하지 말라. 결혼도 서로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기 위해 노력하면 더 큰 행복이 온다. 이를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돕는 베필”(창 2:18)이다. 구속하기 위해서 나랑 묶기 위해서 결혼하지 말라. 그러면 결혼이 감옥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지옥이 된다. 결혼을 통해서 더 나은 자유를 찾으려고, 그리고 그 자유를 찾게 하려고 “돕는 배필”을 자원하는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free from”(~으로부터의 자유)과 “free to”(~을 향한 자유)이다. 전자는 회피와 방종이다. 후자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자유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바로 후자이다.
자유하라. 어떤 이의 좌우명이 “아니면 말고!”이다. 이는 자유함, 즉 망설임 없는 도전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모든 것에 자유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한 가지를 더 포함한다. 결과에 대한 쿨한(?) 수용이다. 내가 좋아서 망설임 없이 했으면, 그 결과가 좋든 싫든 감사하게 받는 것이다.
어쨌든 “삶의 의미”와 “자유”. 이 두 마리를 토끼를 잡아야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1. 종려주일의 이야기, 죄에 대한 자유
오늘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바로 이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행복 조건이 자유함이 부담스러워졌다. 뭔가 지시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편한 생각 같지만 이것이 바로 “노예의식”이요, 정작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죄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단코 노예 삼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예수님은 이 죄악와 죄성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자유(앞에 나온 단어 “자유”, “엘류데로오”)하게 하시려고(죄에 대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자유(엘류데리아, 선과 악을 모두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억지로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사랑이 자유를 만날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아닌 것은 다 “욕심”이다. 욕심은 서로를 상처내고 결국 서로의 관계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이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보혈로 바꾼 자유(엘류데리아)를 주셨다. 이제 제발 그 사랑의 자유를 더 죄를 짓는 데 쓰지 말고, 의를 행하는 데에 쓰자.
2. 종의 멍에
그런데 하반절에 보면 죄의 독특한 특성이 나온다. 바로 “종의 멍에”라는 단어이다.
“종”은 ‘둘레이아’(헬)로 노예를 뜻한다.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의 습성과 맞아떨어진다.
“멍에”는 ‘쥐고스’(헬)이다. ‘짝짓기, 예속’을 의미한다. 즉, 항상 내 안에 있는 무엇으로 연결하려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죄의 짝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죄에게 빌미를 제공해서 결국 나를 망치게 한다. 이 ‘싹’을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
3. 정리
삶의 의미의 리추얼, 그리고 자유함을 회복하라!
자유함을 깨는 죄의 종이 되지말라.
내 안에 죄와 짝할 만한 멍에를 제거하라.
그러면 진정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첫댓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엘류데로오) "자유"(엘류데리아, 완전한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종의 멍에"를 매는 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고난 주간에는 내 안에 있는 죄와 짝하려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진정한 고난의 길을 가는 한 주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