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수 바라지 말고 자력 기도해야 / 일타 스님
올바른 기도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수십년을 절에 다닌 신도들조차도
요행수를 바라며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같은 햇빛 아래에 있다고 할지라도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가 바르고,
형상이 길면 그림자도 길고,
형상이 짧으면 그림자도 짧은 것입니다.
이처럼 불보살의 광명정대한 자비는
언제나 중생의 정성과 함께 하지만,
중생은 요행수를 바라고 기도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 “측신(厠神)에게 기도를 하면 재수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변소에 밥을 가져가서 기도를 하고,
아무개가 쪽집게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곳을 찾아가 점을 보기도 합니다.
사실은 신(神)이 내린 용한 점쟁이라 할지라도
찾아가는 ‘내’가 아는 것 이상은 모릅니다.
하다못해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야지,
점을 보러 가는‘내'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알아 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넘겨짚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에 의지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불자라면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자기 속을 차리고 자력(自力)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행수를 바라고 하는 기도는 마음에 잔뜩 때를 끼게 하고,
언젠가는 사도(邪道)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진실한 불법은 10만 8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업장이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성연기의 뜻을 바로 알아서 요행수를 떠난
자력의 기도를 하고 자력의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업장은 저절로 맑아지고 복은 저절로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불가에 전해지고 있는 중국 당나라 때의
무착문희(無着文喜 : 820~900) 선사와 문수보살(文殊菩薩)과의 일은
자력의 기도, 자력의 참선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무착스님은 출가하여 문수보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님은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하기 위해
항주에서부터 오대산(五臺山, 일명 淸凉山)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몸을 내던지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하며 갔습니다.
마침내 오대산 금강굴(金剛窟)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소를 거꾸로 타고 오다가 말을 걸었습니다.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무엇 하러 이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가?”
“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가히 친견할 수 있을까?”하는 말끝에 노인은
그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네 밥 먹었는가?”
“안 먹었습니다.”
“순 생짜로군.”
그리고는 소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착스님은 노인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느껴 뒤를 따라갔습니다.
얼마쯤 가니 금색이 휘황찬란한 절이 나타났습니다.
“균제(均提)야.”
노인이 시자를 부르자, 시자는 뛰어나와 소를 받아 매었습니다.
잠시 뒤에 차가 나왔는데 다완(茶椀)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차를 마시니 몸과 마음이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상쾌해졌습니다.
‘세상에 이런 차가 있다니.’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노인이 물었습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노인은 찻잔을 들고 다시 물었습니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 가”
“없습니다.”
“이런 물건이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먹는가?”
“말법비구(末法比丘)가 계율을 지켜 유지합니다.”
“대중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혹 3 백명도 되고 5 백명도 됩니다.”
무착스님은 노인의 질문에 웬지 싱거운 생각이 들어 되물었습니다.
“여기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합니까?”
“범부와 성현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있느니라.”
“여기의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
대중의 수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니···
무착스님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럭저럭 날은 저물어가고
무착스님은 노인에게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염착(染着)이 있으면 잘 수 없다.”
마음에 번민과 집착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쉬어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자네 계행(戒行)을 지키는가?”
“예,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염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네는 여기서 잘 수가 없네.”
닦아도 닦음이 없고 지켜도 지킴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도 애써 지켜야 하는 단계에 있으니 염착이라고 한 것입니다.
노인은 시자인 균제를 시켜서 무착스님을 배웅하게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면서 절 이름을 물으니 ‘반야사(般若寺)’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삼삼 후삼삼이라고
한 노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동자여, 내가 대중의 수효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 하셨으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대덕(大德)아!”
“예”
“이 수효가 얼마나 되느냐?”
무착스님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어 법문을 청했습니다.
“동자여, 나를 위해 법문을 해주시오”
面上無嗔供養具 口裡無嗔吐妙香
心內無嗔是珍寶 無垢無染卽眞常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莫妄想 好參禪 不知終日爲誰忙
若知忙中眞消息 一孕紅蓮生沸湯
쓸데없는 생각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날마다 하루 종일 누굴 위해 바쁠건 가.
바쁜 중에 한가로운 소식을 알면
한 그루 연꽃이 끓는 물에 피리라.
이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크게 깨달은 무착스님이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보이던 절은 씻은 듯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오대산에서 돌아온 뒤에 공(空)과 색(色)이
화합되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여 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젊은 스님들이 도인이 되는 것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공양주(供養主)를 자청했습니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다가 죽을 끓이는데 갑자기 솥에서
상서로운 광명이 나타나더니 문수보살이 연꽃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이전에 꿈에도 그렸던 문수보살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이 절을 하면서 경탄하였지만,
무착스님은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후리치면서 소리쳤습니다.
“문수는 네 문수요, 무착은 내 무착이니라.!!”
그러자 죽의 방울방울로부터 천만의 문수보살이 나와
허공을 가득 채웠고, 무착스님은 닥치는 대로 주걱으로 쳤습니다.
이에 문수보살은 자취를 감추며 일러 주었습니다.
爾三大劫修行 還被老僧嫌疑
苦瓠連根苦 甘菰徹대甘
내가 삼대겁을 수행하였건만
오늘 노승이 혐의를 입고 돌아가는구나.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무착선사는 진성연기를 알아서 완전히 공(空)과 더불어
상응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 이외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사(邪)임을 알고
허공 속의 문수보살을 주걱으로 치면서 물리쳤던 것입니다.
진정 수행인이 온전히 공을 체득하게 되면,
그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는 아무런
조작도 없게 될 뿐 아니라 아무런 걸림도 없게 됩니다.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와 더불어 한 뿌리를 이루고
천지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 되어서,
천진난만한 세계로 그냥 돌아가게 됩니다.
또 이런 경지에 들어가면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세계가 그대로 진여(眞如)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참 마음자리의
공무(空無)를 체득하여 어떠한 걸림도 없게 되는 것!
이것이 기도를 비롯한 각종 수행의 끝입니다.
부처님을 돌로 만들었든 쇠로 만들었든
나무로 만들었든 기도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지극정성을 드리면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복은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신앙심, 곧 타력(他力)에 너무 깊이 의존하면
마침내는 자기의 속까지 빼주게 되므로,
타력신앙을 통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인은 반드시 자력(自力)을 가지고 타력(他力)을 믿어야 합니다.
곧 타력에 의지할 지라도
진성연기의 도리를 분명히 알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비결이요,
기도를 통하여 해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요긴한 가르침입니다.
- 일타 스님 법문 중에서 -
출처: 鳳德寺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