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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해후
박 완 서
남편이 반신불수라는 건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도 겉으로 드러났다.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회복되면서 왼쪽이 마비될 초기만 해도 움직일 때가 아니면 그의 불수를 눈치챌 수 없었다. 겉으론 멀쩡했었다. 남편은 체격이 크고 당당했다. 하여 그를 의자에 앉혀놓고 바라보길 나는 즐겼었다. 곧 일어나 산책을 나가든지 뜰의 화초를 손보든지 할 것 같은 나의 행복한 착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비가 굳어지면서 차츰 그의 반쪽이 죽어 있다는 게 가만히 있을 때도 옷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불 덮고 잠자고 있을 때도 그의 반쪽이 죽어 있음을 알아볼 만했다. 건강할 때 입던 옷들이 아직도 다 그에게 잘 맞으니 겉모양이 예전과 달라진 건 아니련만도 그랬다. 의족이나 의수가 아무리 감쪽같아도 생명 없음을 숨길 수 없듯이 그를 아무리 옷 잘 입혀 흔들의자에 편안히 앉혀놓아도, 반쪽을 생명 없는 무기질로 접붙여놓은 것 같은 어색함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그를 찾아오는 문병객의 발길이 끊긴 지도 오래건만 나는 구태여 그걸 숨기고자 조바심한다.
남편의 고개가 옆으로 스르르 꺾이면서 성한 손에 들고 있던 한 무더기의 편지가 바스락 낙엽 지는 소리를 내면서 마룻바닥으로 떨어진다. 마룻바닥엔 그가 편지를 보기 전에 떨쿤 신문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일흔다섯에 아직도 등산과 술 담배와 섹스를 즐긴다고 자랑하며 활짝 웃고 있는 어느 명사의 동안도 보인다.
남편은 한쪽이 불수가 되고부터 기억력도 필라멘트가 간댕간댕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전구처럼 깜박인다. 어렸을 적 그를 사로잡았던 연날리기, 제기차기, 쥐불놀이 등을 마치 갓 붓을 뗀 수채화처럼 산뜻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축축한 정감으로 여실히 그려내는가 하면, 때로는 자기 나이도 잊어버렸다. 아까도 그 명사의 노익장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한 십 년만 젊었어도…… 하면서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그 명사가 자기보다 십 년은 아래인 것처럼.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조카딸이 깔깔대며 물었다.
“이모부, 이모부 연세가 몇인 줄이나 알고 그러세요?”
남편은 예순다섯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히이, 하고 한쪽으로 흘러내리는 웃음을 웃었다. 웃음뿐 아니라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그의 입에선 한쪽으로 흘러내리길 잘했다. 또 나이뿐 아니라 자식들에 대한 기억력도 늘 깜박거렸다. 신문에서 미국의 몇십 년 만의 혹서나 혹한, 급증하는 청소년 범죄, 성적 타락, 이혼율 등의 소식을 읽고는 거기 가 있는 아이들 일을 안절부절을 못하고 걱정하다가도 금세 바로 옆집에 사는 자식이 부모를 안 돌보는 것처럼 들입다 역정을 내기도 하고, 아침에 출근한 자식을 기다리듯이 밤늦도록 기다리고 보고 싶어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만리 타향에 가 있다는 걸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편지를 내주었다. 항공우편은 쉽사리 그의 끊긴 기억을, 아이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던 공항과 이어놓았다. 나는 그가 항공우편을 뒤적일 때마다 공항에서의 그를 다시 보는 듯했다. 그때 그는 시선에 대롱이 달린 사람 같았었다. 마치 곤충이 꽃 속 깊숙이 대롱을 박고 꿀을 탐하듯이 아이들의 얼굴에 끈끈한 기대와 갈망의 대롱을 박고 놓아주지 않는 그 때문에 꼼짝 못 하는 아이들을 나는 내 힘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아, 노망이란 뮐까. 기억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기 때문에 무슨 일이고 처음처럼 새로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모, 금붕어가 또 죽었어요.”
마루의 양지바른 곳에 유리를 덮어놓은 돌절구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카딸 영애가 경박한 목소리로 놀라며 죽은 금붕어를 손가락으로 집어냈다. 나는 영애의 손끝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금붕어보다 그녀의 손톱이 눈에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 금붕어는 비늘이 벗겨졌는지, 죽은 채 불었는지 늦잠 자고 난 루즈 자국처럼 흉하게 바래 보였다. 거기 비해 그녀의 손톱의 다홍빛은 너무 진하고 두텁게 반짝거렸다.
“야, 너 손톱을 너무 빨갛게 칠한 거 아니냐? 선보러 갈 애가…….”
“지가 날 손톱 때문에 퇴짜 놓으면, 까짓 거 난 절 발가락으로 차버릴걸. 그럼 될 거 아냐, 이모?”
영애는 선볼 목적이 다만 퇴짜 놓는 데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면서 죽은 금붕어를 대롱대롱 흔들어 보였다. 싸구려 이어링을 고를 때처럼 조금도 심각하지 않게 무심히.
“이런 말버릇하고…… 신랑 자리한테 지가 뭐냐‘?”
“그럼 서방님이라고 그럴까, 이모?”
영애는 이러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분합문을 드르륵 열고 죽은 금붕어를 휙 마당으로 던졌다. 금붕어는 피튜니아 팬지 따위 봄 화초가 어우러진 꽃밭에 가 떨어졌는데도 나는 시멘트 바닥에 패댕이쳐진 그놈을 상상하고 흠칫했다. 아직은 바깥바람이 찼다. 영애가 기지개를 켜면서 뭔가 답답한 듯 심호흡을 하는 동안 잠든 남편의 백발이 풀풀 일어섰다.
영애는 동생이 애지중지하던 무남독녀였지만 동생이 죽자 동생의 남편은 옳다구나 지금부터라도 아들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싶었던지 서른 살 노처녀한테 새장가를 들었다. 그때부터 천덕꾸러기가 된 영애를 내가 데리고 있은 지가 삼 년짼데 그 동안 더러 혼처가 나서긴 했어도 성사는 안 됐다. 한쪽 부모가 없는
편안치 못한 가정환경이 핸디캡이 되고 있었다.
“신랑 자리가 문제가 아냐. 신랑 아버지가 따라 나오신댔으니까 그쪽에 더 신경을 써야지. 내 생각으론 손톱을 아주 지우든지, 흰색으로 다시 칠하든지 하는 게 좋겠다. 화장은 될 수 있는 대로 엷게 하고…… 우선 노인네 마음에 들도록 신경을 좀 써, 알았쟈?”
“그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기도 전에 내가 왜 그 사람들 마음에 들려고 신경을 써요?”
영애가 파르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이번 혼처는 그쪽도 어머니가 안 계시단다. 너야 학벌 좋겠다 인물 좋겠다, 느이 아버지 사업 잘되겠다, 어머니 안 계시다는 것밖엔 꿀릴 게 뭐가 있냐? 하나밖에 없는 흠은 그쪽 역시 마찬가지니까 넌 조금도 주눅들 것 없어야.”
“이모, 내가 언제 주눅이 들었다고 그래?”
영애가 또 파르르 했다.
“너무 주눅이 안 들려고 조바심하는 것처럼 주눅들어 보이는 것은 없다, 너.”
나는 나 하고 싶은 말만 다 하고 나서 시침 딱 떼고 돌절구 속의 금붕어를 들여다보았다. 겨울을 나는 동안 수초는 다 죽고, 금붕어도 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한 마리도 아까 영애 손끝에 매달렸던 죽은 놈처럼 붉은빛의 생기가 바래 사색(死色)이 완연한 게 밑바닥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모로 눕지 않았다는 게 그놈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마당구석에서 이끼를 뒤집어쓰고 엎어져 있는 돌절구에다 금붕어를 기를 생각을 해낸 건 영애였다. 그건 처음부터 영애가 해낸 생각이라기보다는 어디서 보고 들은 흉내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어떤 부자 친구네서 옛날엔 짐승의 먹이통이나 했음직한 돌확을 응접실에 들여놓고 금붕어와 수초를 기르는 걸 보았는데 참 보기 좋더라고 하면서 집 안에서 그와 유사한 걸 찾다가 돌절구를 발견했다. 곧 그 오지게 무거운 걸 힘들여 마루로 옮겨놓고 금붕어와 수초를 사다넣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작보다는 뒤끝이 흐린 편이어서 처음에 신바람을 낼 때와는 딴판으로 곧 관심도 안 가지게 돼, 한겨울을 나는 동안, 열 마리의 금붕어 식구가 한 마리로 줄었다. 돌 사이에 남아 있던 독한 양념 냄새 때문일까? 나 역시 금붕어가 죽어나갈 때마다 그 정도의 관심을 가져보는 것 외엔 달리 어째볼 도리가 없었다. 그 돌절구는 맵고 짜고 양념이 진한 남도김치를 즐기는 남편이 혈압이 높다는 걸 알고 맵고 짠 음식을 삼가게 되면서부터 마당 구석으로 밀려나 잊혀 졌었다.
영애는 돌절구뿐 아니라, 뒷방이나 다락 구석, 마루 밑에서까지 잊혀진 물건들을 쑤셔내서, 본래의 용도와는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써먹기를 즐겼다. 파랗게 녹이 슨 제기접시를 끄집어내서 석류나 유자 따위를 담아서 장식장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향로에다 마른풀을 꽂아서 내 방 문갑 위를 장식해주기도 했다. 다락 구석에 처박혔던 시어머니의 반닫이가 마루 한가운데로 끌려나와 다탁 구실을 하는가 하면 다듬이 방망이가 벽 한가운데 매듭 장식을 달고 매달리기도 했다. 나는 영애가 일으킨 우리 집안의 이런 변화를 좋아하는 척도 싫어하는 척도 않고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루 밑에 오랫동안 버려져서 새까맣게 죽은 놋요강을 끄집어내서 또 무슨 기발한 짓을 하려고 할 때만은 제발 아서라고 말렸다. 외국 사람이 우리의 요강에다 꽃을 꽂아놓았다면 가벼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요강에 꽃을 꽂으면 미친 짓이 되겠기에였다.
구닥다리 물건으로 현대적인 멋을 내보려는 영애의 노력이 기특하긴 했지만 독창적인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요새 웬만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런 복고풍의 집 치장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유행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흉내가 우리 집안 분위기하곤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아서 나는 영애가 하는 짓을 말리지만 못했다 뿐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고 영애가 시집가고 나면 후딱 그런 것들 먼저 치워버려야지 싶을 만큼 눈에 거슬릴 적도 있었다.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이미 한물간 구닥다리 물건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을 만한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짓은 기운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할 짓이었다. 나는 구닥다리 물건이 내 집에서 살아나지 않는 게 우리 부부의 생명력의 결핍 탓인 양 꼴 보기 싫었다.
“이모, 내가 이모 눈화장 시켜줄까?”
영애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그새 손톱을 연분홍으로 바꿔 칠하고 화장도 공들여 한 것 같았다.
“눈화장은…….”
나는 그런 방법으로 나를 재촉하는 영애를 내심 측은해하면서 서둘러서 대강 화장을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남편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는 세든 사람한테 남편의 점심을 부탁해놓고 영애를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저만치 언덕길을 꽃장수 여편네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손바닥만하나마 집집마다 뜰
이 있고, 찻길과 상가에서 한참 떨어진 동네라 봄이면 꽃장수가 줄을 이어도 그런대로 잘 팔렸다. 봄의 빛나는 영광 속에 활짝 핀 색색가지 팬지꽃을 목판 하나 가득 담아 인 꽃장수 아줌마들은 엄청나게 큰 화관을 쓴 것처럼 동화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그들은 아직도 찌든 겨울파카를 입은 채 비지땀을 흘리며 힘겹게 헉헉대고 있었다. 우리 동네 언덕길은 내 나이엔 빈 몸으로도 쉬엄쉬엄 올라야 할 만큼 길고 가팔랐다.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지은 다섯 명이나 되는 아줌마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여봐요, 공연한 헛수고하지 말고 딴 동네로 가봐요. 이 동네에서 그런 꽃 살 만한 집은 벌써 다 사서 심었다우. 우리도 두 목판이나 사서 심은 게 처음엔 비리비리하더니 이젠 땅냄새를 맞고 어찌나 잘 퍼지는지, 더러는 솎아내야 하게 생겼는걸.”
“웬 할머니가 걱정도 팔자야, 자기가 이 동네를 다 맡았나?”
“할머니니까 걱정이 팔자지.”
그들은 숫제 나를 상대도 안 하고 저희끼리 비쭉대며 내 곁을 지나쳤다.
“이모, 이몬 정말 걱정도 팔자야. 그런 소린 뭣 하러 하세요? 괜히 망신만 당했찮아요. 재수 나쁘게…….”
영애까지 나를 이렇게 핀잔주었다. 그녀의 핀잔 중에서도 재수 나쁘단 말이 내 귀에 여간 거슬리지 않았다. 제가 선보는 일을 아무리 장난처럼 대단치 않게 굴려고 해도 애가 단 제 속을 다 아는 나로서는 이번에도 성사가 안 되면 내 탓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듣기 싫은 소리는 꽃장수들한테서 연거푸 들은 할머니 소리였다. 눈화장까진 안 했지만 어제부터 피부 손질에 신경을 쓴 내 얼굴은 아직도 코왔고, 더구나 연분홍 비단 치마저고리에 레이스 숄을 살짝 걸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말은 안 했지만 영애하고 자매끼리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대가 스멀대는 걸 느꼈었다. 그런데 아이들도 아니고 나이도 알 수 없이 굴신스럽게 찌든 여편네들한테 할머니 소리를 듣다니. 우리는 둘이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다소 일그러진 얼굴을 펼 새도 없이 목적지에 당도하고야 말았다. 신랑 아버지가 그 흔해빠진 호텔 커피숍 다 마다고 우리 동네 버스 종점에 있는 허름한 인삼찻집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미리 이 동네 염탐을 왔었나? 그 영감이 그렇지 않고서야 이 대폿집 같은 인삼찻집을 어떻게 알았을까. 안 그래요, 이모?”
영애는 인삼찻집 옆에서 갑자기 기가 꺾인 얼굴로 나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우리도 모르고 있는 우리 동네 인삼찻집을 상대방이 알고 있었다는 게 기분 나쁘긴 나 역시 영애 못지않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누가 내 오장을 뽑아본 것처럼 억울했대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보다 적대감을 잔뜩 곤두세우고 인삼찻집의 삐걱대는 계단을 올랐다.
“송여사 여기야, 여기.”
이번 혼담에 중매격인 김여사가 창가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김여사는 남편의 회사 동료의 부인이어서 부부동반의 망년회나 결혼식장 같은 데서 어쩌다 만나면 아는 체나 하는 정도였으나 그녀의 남편이 먼저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연전에 작고하고부터 급속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김여사가 일어나 서더니 옆자리에서 의자를 하나 들어다가 보태면서 우리에겐 편한 자리를 권했다. 자연히 나는 신랑 아버지, 영애는 신랑을 마주 보게 되고, 새로 보탠 모퉁이 자리 차지는 김여사가 하게 되었다. 나는 신랑 아버지의 잘 닦은 놋대접처럼 반짝이는 대머리가 면구스러워서 눈길을 비스듬히 창우로 돌렸다.
“인사들 나누셔야죠. 이분은 신랑 조재민군 아버님, 이쪽은 색시 윤영애양 이모님. 너무 간단한 것 같지 않아, 송여사?”
“간단하지 않으면 뭘 더 어떻게…….”
나는 김여사가 중매 같은 일에 익숙지 않다는 데 어줍잖게 동정심마저 동하는 걸 느끼면서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 다음은 당사자끼리 인사들 해요. 당사자 소개는 좀 길게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여기서 다 해버리면 이따가 둘이서만 할 얘기가 없을까봐 그것도 그까짓 거 생략해버릴 테니까. 송여사, 난 말야 글쎄 걱정도 팔자지, 중매로 맞선 보는 젊은이들이 중매쟁이랑 가족들이 슬슬 꽁무니 빼고 둘만 남았을 때, 무슨 할 얘기가 있을까 생각만 해도 괜히 진땀이 난다니까. 별안간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
“정말 김여사는 걱정도 팔자네.”
김여사가 부자연스럽게 떠드는 수다 속엔 양가가 비슷하게 별 볼일 없는 집안이란 비아냥거림 같은 게 포함돼 있는 것 같아 나는 새침해지면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십대로 보이는 주인 여자가 옥색 저고리에 남치마를 잘잘 끌고 와서 차는 뭘로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머, 인삼차 말고 딴 차도 있어요?”
김여사가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떨었으나 잔뜩 움츠러든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넣을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쌍화차, 생강차, 당귀차, 잣죽까지 있습니다요. 잣죽으로 통일하시면 어떠실는지. 이 집에선 그게 제일 맛도 있고 비싸답니다.”
주인여자 대신 앞에 앉은 대머리 노인이 이렇게 긴 말을 했다. 선을 보면서 죽이라니, 나는 그 촌스러움에 대한 역겨움으로 입술이 마르는 걸 느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자세히 뜯어보고 뭐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도 보고 그래요.”
김여사가 딴전만 보고 있는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신랑은 머리숱이 많고 장발이었다. 부자의 우스꽝스러운 대비에 나는 을씨년스럽게 웃었다.
“조선생님은 색시보다 색시 이모님한테 더 관심이 있으신가봐. 아까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니…….”
김여사가 천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소리로 킬킬대면서 말했다. 나는 그 여자를 그렇게까지 주책으로 보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지 몰랐다. 그 여자도 뭔가 아구가 안 맞는 분위기에 에라 모르겠다, 지레 포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귀띔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처음부터 노인의 강한 눈길을 의식하고 있었다. 찻집에 들어서자마자부터였다. 지금은 숫제 그의 염치없는 눈길이 끈끈한 손가락이 되어 나의 볼을 후벼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여직껏 똑바로 보지 못한 것도 그의 시선에 몰려 내 눈의 자유를 잃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 고퉁스러운 건, 우리들의 기이한 분위기에 밀려난 정작 당사자들의 비난하는 듯 탐색하는 듯한 눈길까지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곧 잣죽이 오고 우린 일제히 그것을 소리내어 훌쩍이기 시작했다. 신랑감도 색싯감도 이미 얌전 뺄 의욕을 상실하고 있음이 완연했다. 중매를 통해 보는 맞선이라는 게 그랬다. 될 듯 될 듯 하다가도 안 되는 데만 이골이 난 영애는 퇴짜 놓을 생각부터 하면서 그 자리에 임했지만, 틀어지고 난 후에 어느 쪽에서 퇴짜를 놓았다는 거나마 분명히 드러나는 일도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핑계와, 제삼자에겐 내 쪽에서 퇴짜 놓았다는 허세가 따르는 게 그 짓이었다. 어쩌다가 연애 한 번 못 하고 그 치사한 짓을 통해서 시집을 가보려고 애쓰는 동안에 무슨 소모품처럼 마모돼가는 영애가 불쌍해서 나는 멀건 짓죽이나마 잘 넘어가지 않았다. 동생이 어떻게 기른 딸인데…… 곧잘 내 친딸로 남들이 보아줄 만큼 나를 많이 닮은 조카딸한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연민과 애정을 느꼈다. 그건 내 자식들에게 충분히 못 쏟은 채 내 속에 억압된 거여서 고르지 못하고 변덕스러웠다.
“입가를 닦으세요.”
신랑이 냄킨꽂이를 영애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거겠지만 소리내어 그릇 바닥을 긁을 만큼 맛있게 잣죽을 먹고 난 영애는 입가에 보얀 잣죽 테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 유의 지적은 친한 사이에도 불쾌감을 주기 쉬운데 청년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을 조금도 거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청년의 꾸밈없이 소탈한 태도에 신선한 놀라움을 느꼈다. 영애는 다소곳이 콤팩트를 꺼내 보면서 입 언저리를 닦아냈다.
“송여사, 우리 엑스트라들은 이제 물러날 시간이 된 거 아냐? 맞선의 각본상. 그렇지 않습니까, 조선생님?”
김여사도 뭔가 될 성부른 꼬투리를 발견한 양 괜히 싱글대면서 두 사람에게 동시에 물었다. 노인이 대답 대신 부리나케 카운터 쪽으로 갔다. 나는 비로소 청년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우리 영애 데리고 아무쪼록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 보내고 일찌거니 집으로 돌려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청년은 준수했다.
“우선 이 촌스러운 인삼찻집부터 면하는 거야. 분위기가 사람을 지배하는 거 니까.”
김여사도 이렇게 거들었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잠시 삼각형으로 서서 나는 김여사를, 김여사는 노인을, 노인은 나를 보았다. 뒤통수를 세게 당기는 듯 괭괭한 삼각형이었다. 마침 빈 택시가 우리 곁에서 속도를 늦추는 걸 본 김여사가 뭐라고 화급한 핑계를 둘러대더니 혼자서 냉큼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나는 그 동네가 우리 동네라는 걸 잠깐 잊고 같이 가자는 시늉으로 몇 발짝 뜀박질로 택시 뒤를 쫓았다.
“저어, 고향이 송도(松都)시죠? 중부 숫전골에 사시지 않았습니까?”
조노인이 쫓아오면서 이렇게 물었다. 처음으로 어미에 잠깐 드러난 그의 사투리에 나는 결정적으로 덜미를 잡혔다. 나는 시침 떼기를 단념하고 노인을 바로 보았다. 놋대접처럼 번들대는 대머리와는 딴판으로 눈썹은 여전히 숱이 짙고, 코는 우뚝하고, 턱은 완강했다. 하지만 정결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던 파르스름한 구레나릇 자국은 곰팡이 빛깔로 지저분하게 변색돼 있었다. 나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선생님은 시접골 사셨죠?”
시접골 그의 집은 바깥채는 초가고 안채는 기와집인 전형적인 송도 가옥이었다. 안뜰은 희고, 마루는 길이 잘 들어 거울처럼 번들댔다. 화강암이 부서져서 된 그 고장 특유의 토질은 도시 전체를 조용하고 정결하게 보이게 했지만 그날 그 집 안뜰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마치 송악산에서 몇날 며칠 마련한 당목을 길길이 펴놓은 것 같았다. 부엌 앞 긴 돌엔 치자나무 화분이 놓였었고 동쪽 담장 밑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기둥 서까래까지 매일 기름걸레질을 하는가 싶게 손이 골고루 가 보였지만 꽃밭만은 되는대로 내버려둔 양 국화가 마구 덤불을 이루고 엉클어져 피어 있었다. 송이가 꼭 교복 단추만하면서도 꽃잎의 숱이 많아 도톰하고 빛깔이 담백한 토종국화는 그 집뿐 아니라 그 고장에 지천으로 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날까지도 토종 국화 하면 그날 그 집 마당의 국화 덤불을 떠올리곤 했다.
그날 그와 나는 선을 봤다. 왜 그의 집에서 선을 보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지금처럼 다방이 흔한 세상이 아니었고 그의 누이와 내가 호수돈고녀 동창이어서 무관하게 드나들던 집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서울 가서 보성전문을 다니고 있었지만 정식 인사만 없었을 뿐 서로 얼굴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선은 우리보다 부모들끼리 보고 있었고, 우리한테는 그날부터 내외할 것 없이 사귀어보라는 허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런 자리이고 보니 새삼스럽게 부끄럼을 타는 척하느라 그를 마주 보지 못했지만 속으론 제법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 멋있다고 생각한 그의 구레나룻 자국이 내 볼을 부비면 얼마나 따가울까? 그건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모닥불을 담아 붓는 것 같았고, 그걸 행여 누가 눈치챌까봐 더욱 쌀쌀하니 새침을 떨고 있었다.
양가의 허락이 떨어진 그와 나의 교제가 그후 얼마나 오래 계속되고 또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날도 역시 국화꽃을 보았던 것으로 미루어 한 달 남짓 교제한 게 아닌가 싶다. 그날 그와 나는 남성병원의 긴 담을 지나 초가가 드문드문 있는 들판까지 나갔었다. 그는 그 길이 그가 마음이 쓸쓸할 때 잘 다니는 산책길이라고 했다. 어떤 때 남자들도 마음이 쓸쓸할까, 나는 그게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이미 들판엔 겨울이 시작돼 있었고 그 광활한 쓸쓸함이 나를 압도했다. 되돌아오다가 우린 양옥집이 몇 채 있는 텃밭머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서양 사람들이 살던 집이야, 남성병원 의사들이었을 거야. 그가 말했다. 텃밭도 비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채소가 서리를 맞고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게 보였다. 일 년감 먹어보았어?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기긴 꼭 연시같이 생겼는데 맛은 고약해. 욕지기가 나서 뱉어버렸어. 훔쳐먹은 벌을 톡톡히 받았지. 어렸을 때 일이야, 서양 사람들이 쫓겨가키 전의 일이니까. 알고 보니 서양 사람들도 과일로 먹는 게 아니라 채소처럼 요리를 해 먹는다더군. 요새도 나는 토마토 철이면 문득 그때 그의 말이 생각나서 미소지을 적이 있다. 여기서 조오기까지는 일년감밭, 조오기서 저어기까지는 양배추밭, 저어기서 저만치까지는 홍당무밭…… 그는 이렇게 손가락 끝으로 빈 밭을 마름질해 보여주었다. 저만치 텃밭머리에 아직도 한 무더기외 토종국화가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잎과 줄기가 누렇게 시든 후에도 서릿발처럼 희고 차게 피어 있는 국화는 싱싱하다기보다는 섬뜩해서 나는 가만히 몸서리를 쳤다. 그가 춥냐고 물었고 곧 귀가를 서둘렀다.
그후 그와 나는 만나지 못했다. 궁합이 안 맞으니 혼담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통고가 그의 집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도 궁합을 몹시 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쪽 말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름난 사주쟁이집을 몇 군데 돌고 와서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고, 혼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걸 다행스러위했다. 몇 군데서 한결같이 두 사람 사이에 공방살(空房殺)이 들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듬해 그가 학병으로 끌려감으로써 점괘의 영검함이 생생하게 입증까지 되고 보니 그 사건은 집안 어른들에게도 나에게도 별로 큰 상처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일을 초조(初潮)의 기억처럼 평생 동안 지우지 못 했다. 비록 상처는 아니더라도 젊은 날을 긋고 지나간 굵은 획이었다.
당사자끼리 선을 보는 걸 일본말로 미아이(見合)라고 하면서, 가장 발달된 신식의 혼인방법인 양 너도 나도 써먹되 궁합의 세도 또한 만만치 않던 때 있었던 일이다.
“자아, 타시죠.”
어느 틈에 조노인이 택시를 불러놓고 나를 그 안에 밀어넣었다.
“전 이 동네 사는걸요. 바로 저어기…….”
나는 차창으로, 버스 종점이 있는 구질구질한 상점거리에서 한참 떨어진 양지바르고 잘 정돈된 언덕바지의 주택가를 내다보면서 말했다.
“점심을 대접하고 싶어요. 옛날 얘기나 하면서……”
옛날 얘기란 소리에 나는 나잇값도 못 하고 그만 가슴이 울렁거렸다.
“경실이는 못 내려왔다죠? 동창회에서 들었어요.”
“그러니까 서울에 호수돈 동창회가 있다 이 말씀이죠? 해마다 있습니까? 다달이 있습니까? 많이들 나오나요? 말해봐요.”
그는 누이동생에 대해선 말하려 들지 않고 호수돈 동창회에 대해서만 안타깝게 캐물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크고 들뜬 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개중(開中) 때 호수돈 여학생만 보면 왜 그렇게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댔던지…… 하여튼 하나같이 미인이었어요. 똑바로 보지를 못했으니까 그럴 수밖에요. 서울 가서 보전(普專) 들어가던 해 봄이었어요. 곤색 쓰메에리 입고, 사각모 쓰고 내려와서 부모님께 절하고 나서 어딜 제일 먼저 갔는 줄 아세요?
내 장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호수돈 아가씨들한테 보이고 싶어 내려온 거지 부모님은 그 다음이었다구요. 시쳇말로 폼 재면서 호수돈 둘레를 지치지도 않고 뱅뱅 돌았조. 벚꽃이 만말한 호수돈은 참 아름다웠어요. 내가 열아홉 살 때였으니까 아름다운 시절이었구요.”
그가 아름답던 시절에 연모한 건 호수돈 전체였을 뿐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모음갚을 느꼈다.
“어디로 가시는 거 예요?”
나는 아까 그가 운전사한테 말한 행방이 마땅한 음식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데였다는 걸 상기하고 물었다.
“용수산 아시죠?”
“용수산이라뇨?”
“아, 용수산도 몰라요? 송도 사람이.”
그가 벌컥 역정을 냈다. 그럼, 송도 남쪽에서 북으로 송악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 용수산으로 지금 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말 같지 않은 말을 따질 생각보다는 그가 혹시 노망이 난 게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송악산이야 송도 안 가본 사람들이 치는 산이고, 송도 사람들한테야 송악 말고도 명산이 좀 많아요. 사람마다 제각기 제 산을 갖고 있대도 틀린 말이 아닐걸요. 내 산은 용수산이에요. 용수산 기슭의 도덕정 약수터 알죠? 매일 아침 그 약숫물로 속을 씻어내고 송도 장안을 굽어보면서 한바탕 악을 쓰고 나면 속속들이 맑고 시원해졌죠. 지금까지 건강한 게 다 도덕정 약수 덕이랍니다. 그뿐인가요, 한창때는 겨울에도 벌거벗고 계곡물에서 미역을 감았죠. 하루도 안 빼놓고 말예요. 아마 개중 때였을 거예요. 그 한창때가. 그때는 웬놈의 불뎅이 같은 게 허구한 날 어찌나 지랄같이 치미는지 그렇게 식혀주지 않으면 꼭 뭔 일 저지르고 말 것 같았거든요. 용광로 같은 시절이었죠. 용광로도 식으려니까 잠깐입디다. 보성전문 시절만 해도 겨울방학에 내려가 그 짓 하려니까 도저히 안 되더군요. 고뿔만 된통으로 얻어걸려서 겨우내 콜록거렸으니까요.”
나는 그의 용광로란 소리에 성욕을 연상했고, 자신에게 아직도 그런 외설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게 혐오스러워서 짐짓 냉담하게 바깥만 내다봤다. 차는 낡은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네로 접어들었다. 조노인이 상체를 앞자리 쪽으로 길게 빼고 운전사에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곧장 하면서 갈 길을 지시하다가 아이들이나 강아지가 튀어나와 차가 급정거를 하면 유리를 내리고 밖에다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쩡쩡 울리게 우렁찬 소리로 나무라기도 하고 욕도 했다. 그의 뒤통수엔 귀 뒤로부터 목덜미에 걸쳐 호(弧)를 그리며 부드럽게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털이 남아 있어 대머리가 더욱더 놋대접을 쓴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용광로처럼 아름답던 젊음과 길이 잘 든 대머리 사이에 끊긴 세월만큼이나 아득한 위화감을 그에게서 느끼면서 헛기침을 했다.
용수산은 주택가의 깊숙한 골목 속에 있는 한정식집 이름이었다. 주위의 집들이 퇴락을 막을 정도의 간수만 했을 뿐 벽에 타일을 붙이거나 기둥에 니스칠을 하지 않아 기품을 살리고 있는데 반해 용수산은 기둥이고 벽이고 들창이고 온통 번들대서 눈에 띌 뿐 집의 규모는 스무 평 남짓한 고만고만한 집들과 다르지 않았다.
“송도 사람이 하는 집이겠군요?”
나는 들어설 때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아 으쓱한 그에게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대(代)가 갈렸으니까 송도 사람이랄 것도 없조 뭐. 개중 선배 형님이 하시던 건데 작년에 작고하시고 지금은 따님이 경영한답니다. 여기 넘어올 때가 세 살적이었으니 송도 사람이랄 수 있겠어요? 대가 갈리더니 분위기부터 확 달라졌어요. 우선 집수리부터 대대적으로 했으니까요. 원, 송도 사람 살림은 외빈내부(外賓 內富)가 근본이 아닙니까?”
그가 으스댈 때와는 딴판으로 심란하게 말했다. 나는 시접골 그의 집의 나지막하고 조촐한 바깥채의 초가와 드높게 올라앉은 안채의 기와침을 어제런 듯 선명하게 떠올렸다. 금지된 쾌락을 훔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덧없는 젊음에의 향수는 짜릿했다.
“그래도 송도 음식 맛은 따님이 물려받았겠죠? 그러니까 조선생님 같은 분도 이 구석까지 찾아오시는 거구.”
“어디가요. 그 맛은 선배가 할 때 이미 없어진걸요. 사람들은 말로는 송도 음식을 찬양하지만 입맛은 안 그렇다는 게 선배님 생각이었어요. 서울이란 데가 팔도 사람들이 모여서 들끓는 데니 만치 음식 맛도 팔도음식 맛을 한데 골고루 섞었다가 나눈 맛이라야 한다나요. 한마디로 입맛 버렸다는 얘긴데 장사를 해먹으려니 어쩌겠어요. 버린 입맛이라도 맞춰줘야지, 그걸 끌어올리는 게 장사꾼의 소관은 아니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송여사?”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그러나 몹시 우울하게 웃었다. 한눈에 틀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빛나는 앞니와 분홍빛이 부자연스러운 잇몸과 그가 처음 부른 송여사라는 호칭이 함께 징그럽도록 싫어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허나 낄끔하고 맛깔스러워요. 시속따라 달라지긴 했어도 그 깊은 맛 속엔 아직도 송도 맛이 남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죠.”
그는 애써 명랑을 가장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환각을 부추기기도 위로하기도 싫었다. 그가 나의 환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듯이, 그저 모르는 척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
한정식 상이 들어왔다. 보통 한정식보다는 가짓수가 적고. 때깔이 고운 자기그릇에 반찬을 조금씩만 담아 정결함이 돋보였다.
“귀한 손님 모시고 왔는데 주인아주머니 좀 나오시라고 하렴.”
조노인이 호텔 웨이터처럼 정장을 한 청년에게 말했다.
“꽃꽂이 배우러 가셨는데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청년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럼, 이런 장사 하려면 꽃꽂이도 배워놓아야구말구.”
나는 젖빛이 나게 진한 곰탕국물을 먼저 떠먹으면서 빈정거렸다.
“오래간만에 장뎅이(된장에다 찹쌀가루와 갖은 양념을 넣고 떡처럼 만든 개성 특유의 밑반찬)나 호박김치를 먹을 줄 알았더니 겨우 이거예요.”
“장뎅이? 송여사 장뎅이 만들 줄 알아요? 만들 줄 알면 나 그것 좀 만들어줘요. 집사람한테 그걸 가르치다 못 했어요. 지금은 가르칠래야 가르칠 집사람도 없지만서두. 장뎅이 땜에 싸운 적도 있었죠. 집사람 음식 솜씨가 좋았고, 그걸 칭찬받고 싶어했는데, 난 그런 칭찬엔 영 인색한 편이었고, 가끔 장뎅이도 못 만든다고 핀잔을 주기가 일쑤였으니까요. 실물을 한 번만 보여주면 그대로 해주겠노라고까지 했지만 어디 장뎅이 실물을 구할 수가 있어야죠. 돈이 많이 드는 용미봉탕도 아니겠다 돈 안 들고 맛 좋은 제 고장 음식을 어쩌면 그렇게들 몰라라 하는지 그게 다 송도 여자들의 책임이에요. 딴 고장 사람들 좀 봐요. 어디 막국수다 어디 비빔밥이다 어디 김밥이다 해서 그 고장 이름까지 꼬박꼬박 붙여가며 제 고장 맛을 퍼뜨리는데 송도 여자들은 뭐예요? 한마디로 못됐다니까요.”
그가 장뎅이 소리에 반색을 하고 이어 비분강개까지 할수록 나는 냉담해지고 있었다.
“저도 서울로 시집오고 나서 그런 걸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어요.”
“왜요? 장뎅이가 어때서 그걸 서울서 못 만듭니까?”
“장뎅이 탓이 아니라 남편이 서울 사람이라 그런 걸 먹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요.”
“참, 그렇겠군요. 우리 집사람이 서울 사람이라 그걸 만들 줄 몰랐던 거나 피차일반이 되나요?”
뜻밖에도 없어진 장뎅이에 대한 그의 비분강개는 뜬 숯 사위듯이 쉬 가라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숟갈질만 했다. 그러나 입맛 없는 걸 억지로 먹는 것처럼 고역스러워 보여 나도 덩달아서 시장기가 가시었다. 그도 그걸 눈치채고 변명처럼 말했다.
“많이 드세요. 전 틀니를 해넣고 나서 통 입맛을 모르고 지낸답니다. 송여사는 아직 치아가 좋으시죠?”
“아, 네.”
나는 부끄러움과도 모욕감과도 같은 기묘한 느낌으로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고 더욱 입맛이 없어졌다.
“아드님을 잘 두셨더군요? 막내시라구요.”
장뎅이나 입맛보다 훨씬 중요한 용건이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는 게 구원처럼 떠올라 나는 한결 생기 있어졌다.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다 쓸 만하게 두었죠. 큰애는 종합상사 간부사원으로 일 년의 삼분의 이를 외국에서 보낸답니다. 김포공항을 여느 사람 고속버스 터미널 드나들 듯하죠. 둘째는 신문기잔데 유능한가봐요. 그애 이름이 뒤에 붙은 기사가 자주 나죠. 난 그걸 일일이 오려두고, 말씨나 고증 같은 게 잘못됐을 적엔 즉각 전화를 걸어서 일러주기도 하죠.”
나는 그도 의당 한마디쯤 영애 칭찬을 해주려니 했는데 자기 자식 자랑만 했다.
“그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참 보기 좋은 한 쌍이던데 서로 마음에 들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치사한 걸 무릅쓰고 슬쩍 이렇게 그의 속을 떠보았다.
“제까짓 게 뭘 아나요?”
그가 성난 듯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안정(眼睛)에 무분별한 짓궂음 같기도 하고 잘 계산된 노회(老獪)함 같기도 한 게 얼핏 스쳤다. 나는 발끈하려는 걸 용케 참고 은근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식이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건 어머니 쪽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버님도 마찬가지신가보죠? 특히 막내라 더하신 것 같아요.”
“그앤 효자예요.”
그가 심술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영애를 선택할 권리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려는 건가? 그렇담 애저녁에 틀린 혼담이었다. 구는 여태껏 영애에 대한 호감은 커녕 의례적인 관심조차 나타낸 적이 없었다. 계산된 무시는 거부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모르면 너무도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딴 일도 아니고 혼사에 눈치 빼면 될 일도 안 되거니와 체면까지 잃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단념하기가 아쉬웠다. 마치 영애의 마음을 잠시 내 마음으로 한 것처럼 청년의 아름다운 젊음이 감미롭고 애틋한 설렘으로 떠올랐다.
“우린, 우린 이제 늙었어요. 자식들이 제 짝을 찾아갈 때의 불효는 용서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 영애, 아시겠지만 그앤 제 딸이 아니라 조카딸이지만, 구김살 없이 자랐고, 심성도 착하고, 인물도 빠지지 않고 몸도 건강하답니다. 한 가지 흠은 한쪽 부모가 없다는 건데 그게 그애 잘못은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상처하신 게 아드님 잘못이 아니듯이 말예요. 버릇없이 자랐으리란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애 엄마는 그앨 다 길러놓고 세상 떠났으니까요. 그때부터 제가 쭈욱 데리고 있었구요. 제 딸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몹시도 더듬거렸고 그 더듬거림은 내 귀에도 비굴하게 들릴 만큼 간절한 것이었다.
“나도 그 정도는 미리 알고 선을 본 겁니다. 김여사하고 죽은 집사람하곤 보통 각별한 사이가 아니어서 김여사가 선 중매니까 믿거라 한 거조. 앞으로의 문제는 당사자한테 달린 거지 이 늙은이야 무슨 상관 있나요.”
“그럼, 당사자끼리만 좋다면 아버님은 허락해주시는 거죠?”
나는 조바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다급하게 따졌다.
“혼인이란 인륜대산데 당사자가 좋아한다고 어떻게 당장 허락을 할 수야 있겠어요. 아무리 부모 권리가 없어진 세상이라지만 부모의 할 도리는 남아 있는 건데…….”
“부모님의 도리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우렁이 딱지처럼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늙은이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물었다.
“최소한도 궁합은 봐야 할 게 아닙니까.”
“궁합이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죽은 우리 집사람이 아들 혼인을 주장할 때도 꼬박꼬박 궁합을 봤거든요. 에미 없다고 궁합도 안 보고 장가보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아주 용의주도한 올가미에 결려 넘어진 것처럼 비참했고 걷잡을 수 없이 분통이 터졌다.
“지금 와서 또 그 수를 쓰다니, 비열하게시리…….”
“송여사, 왜 이러십니까? 누가 무슨 수를 썼다고…….”
“시침 떼지 말아요. 우리 때 생각 안 나요? 그때도 선보고 실컷 교제까지 하다가 궁합을 핑계로 간단히 끝장내지 않았던가요?'”
“그때 그렇게 됐던가요? 자세한 사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핑계는 아니었을 겁니다. 정말로 궁합이 나빴겠지요.”
“궁합이 나쁜 게 사실이었다고 해도 어떻게 단지 궁합이 나쁘단 이유 하나로 대사를 그렇게 간단히 그르칠 수가 있어요?”
나는 지레 이번 혼담이 끝장났다고 판단하고, 영애가 받을 상처까지를 미리 아파하면서 궁합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내 원망이 그 옛날 그 일의 파탄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자아내선 안 된다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잃고 있었다. 그는 민첩하고도 음흉스럽게 나의 이런 순간적인 실수에 파고들었다.
“대사를 그르쳤다뇨? 궁합이 안 좋은 혼처를 피하고 그후 제 각기 좋은 사람 만나 여직껏 행복하게 살아왔으면 된 거 아닙니까? 내가 비록 상처를 하긴 했지만 중년 상처도 아니겠다, 아무리 의좋은 부부도 한날한시에 죽을 수는 없는 바에야 그걸 가지고 잘못 만난 부부랄 수는 없죠. 혹시 송여사가 나 같은 사람 놓친 걸 아쉬워했다면 또 모를까. 하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농담입니다. 흉허물 없는 사이니까 한번 해본 우스갯소리 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도 그 흉물스러운 틀니를 분홍빛 잇몸까지 드러내고 허허댔다. 나는 또 한번 올가미에 결려 넘어진 것처럼 아차 싶었지만 산산이 부서진 체면을 수습할 길은 없었다. 내가 나잇값도 못 하고 그 번들대는 대머리 위에 사각모를 환상하는 동안 그가 내 발밑에 악랄한 올가미를 던지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노여움과 부끄러움보다 배반감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잘 먹었어요. 가봐야겠어요.”
나는 발딱 일어서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용수산을 나와 골목길을 종종걸음쳤다.
“송여사, 송여사, 나 좀 봐요, 송여사.”
그가 뒤에서 숨차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 하고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열아홉 살 먹은 처녀처럼 앙칼진 앙심이 그를 다시 사각모 쓴 청년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정말 열아홉 살 적처럼 날쌔게 달렸고, 열아홉 살 적처럼 붙들릴 꼬리를 살짝살짝 날름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나는 꼬리를 밟혔다. 우린 다시 마주 보았다. 그의 대머리는 아직도 놋대접처럼 견고하게 빛나고 틀니가 버텨주는 입가와 턱은 완강하건만도 얼굴 한가운데가 무너져내린 것처럼 비참하고 무력해 보였다. 나는 그의 늙음을 직시했다. 환상은 사라지고 그의 늙음이 어쩔 수없는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부탁이 있어요. 제발 거절하지 말아요. 시간을 좀 줘요. 오늘로 끝날 수 있는 일이니까. 한 군데만 더 꼭 같이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그래요.”
“그게 어딘데요?”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임진각에 같이 가고 싶어요.”
또 송돈가? 나는 그 고장에 대한 그의 병적인 집착에 벌써 넌더리가 났지만 차마 싫다고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애걸하는 눈빛과 추하게 드러난 늙음은 사각모의 환상보다 한결 기분 나쁘게 한결 집요하게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다시는 속되고 어리석은 꿈을 꾸지 않으리란 안도감 같은 것도 구태여 그의 애걸을 모른 척할 것 없다는 쪽으로 기울게 했다.
나는 내외할 적의 동부인처럼 말없이 서너 발짝쯤 처져서 그의 뒤를 따랐다. 한길에서 임진각 가는 손님을 소리내어 불러모으는 관광버스에 올라타고 나란히 자리잡고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고맙다고 한마디 했다. 그뿐 버스가 임진각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고 나 역시 그의 말없음에 신경 쓰지 않고 창 밖을 흐르는 통일로의 봄경치에 떠내려가듯 무심히 몸을 맡겼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자유의 다리’ 쪽으로 다가가기도 하는 동안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하기로 작정하고 그의 눈치만 봤다. 그는 곧장 ‘개성, 26.5k㎡ 라고 써 있는 팻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송도가 너무도 가깝다는 걸 감개무량해한다고 짐작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신하게 나의 공감을 표시하려 들었다.
“저렇게 가까운 데를 못 간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육십 리 쯤이면 수유리에서 화곡동 가기만한 거리밖에 안 될 텐데.”
팻말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휙 돌아다보면서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육십 리는 무슨 놈의 육십 리나 된다고 그래요? 바로 요 강 건너서부터 시작해서 예성강 이남을 고려 문화권의 중심지로 보는 게 옳아요. 바로 강 건너부터라니까요.”
그는 안정이 흐린 눈을 부릅뜨고 강 건너를 힘차게 삿대질했다. 그대로 하나의 동상으로 굳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염원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임진강 건너가 바로 개성땅이란 그의 주장엔 긴가민가했지만 그가 손끝으로 고향땅을 바로 강 건너까지 끌어당기고 있다는 건 믿을 만했다. 나는 그가 하고 있는 그 일이 너무도 힘겨워 보여 몇 번이나 거듭 달랜 끝에 가까스로 개나리가 만발한 꽃그늘에 앉아 쉬도록 할 수가 있었다. 쉬면서도 그의 억지는 계속됐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문화의 연구가 가장 뒤떨어진 것 같아요. 백제 신라 문화의 연구는 자료 정비다 고적 정비다 해서 수십 억씩 들이부으면서 고려사만은 도외시하고 땡전 한푼 들이길 꺼리니 어떤 문화가 더 우수하냐 우열을 따지기 전에 분통 먼저 터진다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학계나 정부에서 특별히 고려사를 박대해서가 아니겠죠. 우선 고려 문화의 중심지가 우리가 갈 수 없는 땅인데 어쩌겠어요?”
내 반박은 꽤 조심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기가 죽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고 꽂이 흔들리고 멀리 강줄기가 잔잔하게 일렁였다.
“문화가 뭐 고적이나 고분이나 땅 속에만 있는 줄 알아요. 그 문화를 사랑하고 그 문화와 숨결을 같이했던 사람의 기억이나 마음속에도 그것은 있을 수 있어요. 비록 그 가치가 티끌만한 것일지라도 없을 땐 그거라도 모아야지 어떡해요.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있잖아요? 내 말은 바로 그거예요.”
그는 매우 늙은이답고 고집스럽게 그러나 자신 없이 말했다. 그리고 별안간 명랑해지면서 꽃그늘을 벗어나 아스팔트가 매끈한 찻길가로 주춤주춤 나앉더니 나를 손짓해 불렀다. 나도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그는 어디서 주웠는지 벽돌 깨진 조각으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송악산·용수산: 남대문을 그리고, 시가지를 북부·남부·서부·동부로 나누고 나서 싱그나무골·시접골·모락재·열두골·장작재·핼래다리·당성다리·고리고개·큰용굴·작은웅굴·시우물골·궁골·마하리골·합적골·가재다리·기생골·항명사골·감전골·메주물골·큰각삿골·작은각삿골·모락재·장작재…… 등등 그 고장 특유의 골목과 고개와 다리의 이름을 줄줄이 끝도 없이 써넣기 시작했다. 남의 아이라도 아이의 영민한 기억력을 보면 귀엽고 신통한데 늙은이의 지칠 줄 모르는 기억력은 왜 그렇게 싫은지 그만, 제발 그만두라고 들입다 소리치고 싶은 걸 참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때 뜻하지 않은 작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는 송도의 동네방네 골목 골목, 재와 고개, 냇물과 다리와 우물까지 이름은 물론 거기 얽힌 설화까지 다 살려냈을지도 몰랐다. 사건이라야 별것도 아니었다.
저만치 일본인 관광객이 한 떼 안내원 뒤를 따라 임진각 근처를 한 바퀴 돌고 나서였다. 안내원이 뭐라고 우스운 소리를 했는지 일제히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돌연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져서 박살이 난 유리조각처럼 생급스러우면서도 투명하고 눈부셨다. 근심 없음의 눈부심이 쏘는 것처럼 아프게 와 닿았다. 그때 그는 우푹 일어서더니 그들에게 크게 외쳤다.
“아니, 저것들이 보자보자 하니 해도 너무하잖아. 이것들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웃고 지랄이냐 지랄이. 해도 정말 너무들 한다.”
목소린 우렁찼지만 아까 강 너머를 가리킬 때의 동상 같은 위엄은 어느덧 사라지고 정당한 분노조차 감당 못 해 가냘프게 떠는 노구가 거기 있었다. 나는 그를 부축해 버스로 데리고 갔다. 돌아갈 시간이 아직 삼십 분쯤 남아 있는 관광버스엔 아무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는 탈진해 보였고, 무안한 듯 시무룩했다. 나는 그를 위해 아무런 위로의 말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에게서 방금 전수받은 그 고장의 유별난 이름들을 기억했다가 언제고 필요할 때 그 고장 문화에 티끌만큼이라도 보태게 하겠다는 거짓말 같은 걸 할 생각은 더군다나 없었다. 나 역시 늙었고, 그건 단순한 기억력이 아니라 유별난 애정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와 같은 노인들과 함께 그 고장에 대한 유별난 애정 역시 미구에 사라져갈 것을 술퍼할 일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문을 따준 건 영애가 아니라 세든 여자였다. 영애는 그때까지 안 돌아왔노라고 했다. 영애가 돌아와서 저녁을 지어놓고 이모부를 돌보고 있으려니 믿고 있던 나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한편 맞선 본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나의 불안을 알아차린 세든 여자가 할아버지 점심 저녁 다 잘 챙겨드렸으니 염려 마시라고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허둥지둥 안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슴푸레 어둡고, 창문은 열려 있고, 남편은 요도 안 깔고 모로 누워서 곤히 잠자고 있었다. 나는 불 먼저 켰다. 남편은 꼼짝도 안 했다. 성한 쪽을 아래로 하고 모로 누운 남편은 영락없이 죽은 사람 같았다. 나는 황급히 남편의 몸을 만져보았다. 보통 때도 성한 쪽보다 온기가 덜한 불편한 쪽은 밤바람에 섬뜩하도록 차게 식어 있었지만 성한 쪽은 따뜻했고 숨소리도 평온했다. 나는 요를 깔고 그를 안아다 눕히고 포근한 명주이불로 감쌌다. 그래도 불편한 쪽의 죽음이 온몸으로 퍼질까봐 불안해서 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평소엔 한 이불 속에서 살만 잠깐 스쳐도 질겁을 하게 싫던 불수의 반신을 온기가 돌아올 때까지 정성 들여 주물렀다. 그 반신이나마 있음으로 해서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눈물겨웠다.
조노인으로부터 받아들이길 한사코 거부한 잃어버린 것, 부재(不在)하는 것에 대한 슬프디슬픈 사랑법이 어느 틈에 나한테 옮아붙은 것처럼 느꼈지만 그게 그닥 기분 나쁘진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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