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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구봉산을 다시 밟게 됐다. <윗양명~1봉~8봉~구봉산 산행기 ☞ http://blog.daum.net/bok-hyun/139>
필자가 소속된 산악회의 정기산행계획이였고,중책을 이어받은 산행 책임자의 당연한 역할이였다.
그러면서도 구봉산 재답사의 묘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건 산꾼의 본능쯤으로 어쩔 수 없는 셈이였다.
그런데 덜컥 탈(?)이 났다.
구봉산 4~5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건설되면서 통제(1~8봉)를 한단다.
이항로 진안군수는 “구봉산 구름다리는 산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국내 최장의 무주탑 보도 현수교로 조성하며 아름다운 산행의 새로운 지표를
제시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공사가 시작되는 7월부터 완공이 완료되는 내년 4월까지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구봉산 등산로를 폐쇄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역코스로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속으론 헛기침 두어 번으로 표정관리를 하며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쾌재를 불렀다.
이는 깊어가는 가을날 고찰 천황사 탐방과 소문난 전나무숲길을 걸어보기 위함이였다.
천황사 전나무숲길은 오대산월정사,부안내소사 전나무숲길에 견줄 만큼 크게 알려져 있다.
또한 구봉산의 아홉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마침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리던 가을비도 멎었다.
거기다 구봉산(9봉 1,002m)의 어느 등로보다도 경사도가 완만하여 등행하기에 수월하다.
앞으로 맞닥드릴 골산의 암릉미는 우선 시각적으로 즐겨도 충분하다.
산행코스: 천황사-지댕이재-바랑재-구봉산(천왕봉)-돈내미재-8,7,6,5봉-5봉 6봉 잘록이-천황암터(址)-저수지-윗양명주차장(5시간)
참고 개념도
장수IC에서 '익산장수고속도로'를 갈아탄다.
진안IC에서 내려 795번 도로를 타고 용담호 상류를 지나서 윗양명 못미쳐 천황사 입구(수암마을)에서 차를 댄다.
'천황사전나무' 안내판과 '천황사(天皇寺)'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수암마을.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류를 좌측 겨드랑이에 끼고 들어간다.
천황사로 들어가는 길목은 울긋불긋 가을빛이 농익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전나무숲과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사찰 진입로.
불과 5분여 만에 구봉산 들머리 이정표를 우측으로 만난다.
천황사 100여 미터 전방의 이정표를 지나 우선 천황사 탐방을 하고 이 자리로 돌아나와야 한다.
하늘을 찌를듯 위풍당당한 일주목(一株木) 전나무가 우리를 맞는다.
전나무 오른쪽에는 부도 한 기가 외로히 서있는데...
가까이 들여다 보니 '명봉대종사(明峰大宗師)'부도탑이다.
근세의 학승이자 '금강경' 강설로 유명한 명봉(明峰)스님의 부도인 명봉대종사탑(明峰大宗師塔).
높이 200㎝의 중형부도로 장방형의 기단 위에 석종형 부도를 얹힌 20세기 초기의 양식이다.
천황사 경내에는 이 외에도 두 기의 부도가 더 있다.
사진으로 담지는 못하였는데,다른 두 부도는 천황사 초입의 산기슭에 자리하며 정돈된 축대 위에 나란히 있다.
두 부도 중 오른쪽은 애운당(愛雲堂)이라는 호를 가진 승려가 활동했던 조선 현종~숙종 무렵에 세운 것으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3호
'애운당대사탑(愛雲堂大師塔)'이고,왼쪽의 것은 임자없는 부도이다.
모두들 노랗고 붉은 원색의 단풍에 취하고 만다.
그리고는 낙엽을 즈려밟으며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들어간다.
800년이 넘은 전나무는 그 밑둥만 보아도 연륜을 짐작할 수가 있다.
200여 미터 떨어진 천황사의 부속암자인 남암의 전나무는 천년기념물 495호로 지정된 높이 35m의 국내 최고 수준의 전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불심(佛心)으로 뿌리를 내려 무심(無心)을 가르치는 나무- 천황사 전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한껏 자태를 뽐내는 귀품있는 은행나무. 마치 첫눈을 밟는 것처럼 자글자글 은행열매가 밟힌다.
다녀간 이가 별로 없는 고찰 천황사의 가을정취는 우선 나그네의 가을심사를 들쑤셔 놓기에 충분하다.
낮은 산자락을 배경으로 가만히 돌아앉은 천황사 대웅전.
천황사에선 청아한 예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우리는 가만가만 그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기만 한다.
천황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계신 곳. 그래서 그런지 절집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져 보인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 17호인 '진안 천황사 대웅전(鎭安 天皇寺 大雄殿)'은 천황사의 중심 법당으로 조선시대에 지었다.
천황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년)에 무염스님이 처음 세웠으며, 그 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각 의천스님과 혜명스님이 다시 세웠다.
이 대웅전은 자연석 받침부 위에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반듯한 기둥을 세웠다.
건물 정면에는 정(井)자 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로 짠 문짝을 교대로 달아 다채로움을 더하였으며,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
기둥 위에는 복잡한 구조의 처마를 짜 올렸으며, 단청은 많이 퇴색하여 빛 바랜 자연목 색조를 띠고 있다.
다포식 서까레와 공포엔 단청이 벗겨져 오히려 목재 건축물의 멋이 살아나는 듯하다.
고개를 든 나그네의 눈에 비친 풍경(風磬).
대웅전 앞에 우뚝 선 괘불대
없어진 당우의 흔적인 자연석 주춧돌.
전북 유형문화재 제 17호인 천황사 대웅전 안내문.
일행들은 이미 떠나고 없다.
헐레벌떡 절문 앞으로 뛰쳐나와 산길입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 낀 제단 앞에 섰는데...
조포마을 황단(皇壇)이다.
황단은 수당 이덕응선생(1866~1949)이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해 정안수 4배 통곡한 후 삼년간 초하루와 보름에 제자들과 화양산에 올라
망곡(望哭)한 후 날로 쇠퇴해가는 민심과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 하고자 황단설단(皇壇 設壇)을 조정에 상소해 윤허를 받아 삼극사로 임명되면서 그 증표로 고종임금의 어진을 모셔 세운 단이다.
고융희황제추모비(故隆熙皇帝追慕碑)가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다.
답사후에 여러 자료를 뒤적여 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는데...
정천면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는데...
본래는 현재 제단이 있는 곳에서 500m쯤 더 들어간 곳에 있던 것을 1976년도 마을에서 비(碑)를 건립하면서 마을 가까이 현재위치로 옮겨 세웠다.
제사는 매년 3월 14일 정오에 지내는데,다른 일반 제사와 다를 바 없지만 생쌀 자체를 올린다.
황단제(皇壇祭)는 융희황제 즉 순종(純宗)황제가 일제압박에서 승하하신 날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를 올리는 것이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이신 융희황제가 1910년 한일합방이 국치의조약에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1926년 승하하면서 백성들이 나라와 황제를 잃게됨에 따라 각종 조직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나라를 이끄는 임금과 그에 따르는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민족정신을 지키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요약>
황단은 전라 충청지방을 중심으로 주천면 대불리 화양봉, 무릉리 선암봉, 신양리 제천봉, 정천면 갈용리 천황봉, 충남 금산군 두문봉, 파초봉, 유제봉 등 7곳에 산재돼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이곳 화양산(華陽山) 황단만이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고 한다.
* 화양산은 진안군 주촌면의 복두봉 자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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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호조참판 묘를 지나면...
이내 '산신지위' 제단이 나오는데,누군가 산신제를 올리는가 보다.
더 진행하면 범상치 않은 석물로 치장한 분묘가 나오는데,봉분이 없는 이장한 묘이다.
석물로 가서 글자를 확인해 보지만 아무런 글귀가 없다.
정욱씨와 의견을 나누었는데,임자없는 무덤이라 누군가 도굴하였든지,아니면 못된 후손이 조상탓을 하며 이장을 하였든지...
산하엔 이제 가을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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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 올라서자 구봉산의 자태가 드러난다.
왼쪽의 구봉산인 어미오리를 따라 오른쪽의 세끼오리 여덟마리(여덟 봉)가 쫄망쫄망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는 모양세다.
더 트인 구봉산.
조금 당기자 추색으로 물든 구봉산을 오롯이 볼 수 있다.
조금 더 당기면 우측 4봉과 좌측 5봉을 잇는 구름다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게 보인다.
우리는 나중에 작은 중장비가 있는 5봉에서 돌아 내려와 5봉 좌측의 계곡으로 조심스레 내려왔다.
산 아래엔 용담호가 마치 용의 모습으로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어미오리와 여덟 아기오리.
호가 구봉(九峰)이고 자가 운장(雲長)인 송익필은 이곳 구봉산과 운장산(서봉과 오성대)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하였지.
산행(山行) -송익필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산길을 가다가 앉아서 쉴 것을 잊고,
앉아서 쉬다가 가는 것을 잊었어라
소나무 그늘 아래 말을 매어 쉬게 하고
계곡의 물소리를 가만히 듣노라니
내 뒤를 따라오던 몇몇의 사람들은
내 곁을 지나쳐서 저만치 가는구나
저마다 그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려니
또 어찌 그네들과 더불어 다투리오.
송익필을 두고 ‘중상모략의 대가’라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문이다.
이때 1,000여명의 동인들이 제거되었고 송익필의 형제들은 양반 신분을 회복했는데 당시 이 사건을 맡아 처리한 이 중 한명이 그였다.
기축옥사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정치세력은 피를 부르는 정쟁으로 치닫게 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붉게 물든 가을산에 취하여 훠어이 훠어이 걷는데,어느새 바람재다.
바람재 이정표
세상이 달리 보이는 건 내가 이만큼 나이를 먹어서일까? 가을이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건 내가 딱 그만큼 늙어서일까?
계절을 나이에 견주어보며 실없는 웃음을 웃는다. 어느날 산을 함께한 친구는 나더러 겨울이랬는데...ㅠㅠ
아름다운 山河에 취하여 갈 길을 잊는다.
구봉 암릉 아래로 용담호가 너르게 펼쳐져 있고,그 뒤로 지난번에 다녀온 지장산 자락이 용담댐에 목을 축이고 있다.
가파른 경사구간을 올라서면...
구봉산의 잔등에 오른다.
예전의 작은 정상석이 아니고 자연석 커다란 정상석이 섰다.
산 이름도 천황봉이 아니고 천왕봉이다. * 천황(天皇)은 일제 잔재이니 천왕(天王)을 썼겠지만...
진안군지에 산 정상이 장군봉으로 기록돼 있음에도 최근 진안군에서는 엉뚱하게 정상에 천왕봉 표석을 세웠다.
이는 정상의 남쪽자락에 위치한 천황사에서 따온 이름이 아닌가 싶다. 천황봉은 진안군지에 나온 장군봉으로 바로 잡아야 될 듯...
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암괴석의 아홉 개 암봉 때문에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조선 중조 때 호가 구봉(九峰)이고 자가 운장(雲長)인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이가 운장산 서봉과 오성대에서 유배생활하며 풍류를 즐겼다 하여 운장산과
구봉산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이 산에서 산삼을 많이 캔 신비의 산이라고 한다. <새전북신문>
예전의 작은 표석이 초라한 모습으로 정상 한 켠에 비켜서 있다.
정상의 지도를...
구봉산만 키워보면...
정상에서 조금더 진행하면 만나는 복두봉 갈림길 이정표
다른 방향에서...
복두봉 갈림길에서 잡목사이의 복두봉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여덟오리세끼에게 고정시킨다.
비온 뒤의 미끄러운 급한 내리막을 조심조심 내려서니 앞으로 불쑥 우람한 암봉이 가로 막는다.
8봉이다.
협곡을 데크계단으로 건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예전의 등로를 따라 채 가시지 않은 빗물방울이 마치 비가 내리듯 떨어지고 있다.
돈내미재 산죽밭으로 내려섰다.
돈내미재에선 8봉~1봉 구간이 잠정폐쇄되었다고 막아놨다.
돈내미재의 이정표.
탁 트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여덟 연봉들은 마치 밀려드는 파도와도 같이 역동적이다.
가까이 보이는 아치형 다리는 8봉에서 7봉을 이은 구름다리.
그 너머 4봉엔 구름다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우리 버스가 대어 있는 윗양명과 우리가 내려갈 저수지가 보인다.
단풍 벨트는 이미 산자락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게 확연히 보인다.
돌아서 본 천왕봉 정수리엔 이미 대머리독수리를 닮은 듯 앙상하게 벗겨져 있다.
秋思 (추사) 가을 생각 -馬致遠(元) 마치원 (1250~1321)
枯藤老樹昏鴉(고등노수혼아)
小橋流水人家(소교유수인가)
古道西風瘦馬(고도서풍수마)
夕陽西下(석양서하)
斷腸人在天涯(단장인재천애)
마른 등나무, 오랜 고목, 황혼녘의 갈가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인가
오래된 길, 서풍, 파리한 말
석양은 서쪽으로 지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람은 하늘끝에 서 있다
8봉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7봉으로 연결된 구름다리가 볼거리를 제공한다.
다리위에서 아래를 쳐다보니 7봉과 8봉 간의 협곡이 현기증을 일으키고 협곡을 따라 수놓아진 단풍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계단이 없었던 예전엔 7봉과 8봉은 접근금지 였었는데...
다시 진입금지 현수막이 길을 막는다.
7봉을 내려서는 일행들.(계단이 없었다면 언감생심 7봉 오를 念을 하였을까?)
그리고 6봉.
6봉에서 중장비가 버티고 선 5봉을 바라본다.
일행들중 몇몇 분이 자꾸만 돌아서자고 한다. 그들은 아마도 소싯적 모범생이었음이 틀림없을 것.
나는 일단 5봉을 올라서 보자고 하였다.
철조망 휀스와 밧줄 바리케이트를 넘어 5봉을 접근하는데,안전로프는 더이상 안전하지가 않고 풀어져 있다.
그리고 가파른 5봉을 올라 서려는데, 다시 잡목더미 바리케이트가 앞을 가로 막는다.
이윽고 올라선 5봉.
팔각정자가 있는 4봉엔 폭발음이 들리고,바위를 깎아내는 듯 굉음이 산자락을 울리며,이따금 낙석들도 와르르 쏟아진다.
모범생들은 거의 절규하듯 돌아서자고 한다.
그렇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4~5봉 구름다리의 조감도를 감상하며 욕심을 삭인다.
그리고는 먼지와 굉음과 낙석이 난무하는 공사현장을 돌아서서 5봉을 내려선다.
그 사이에도 가을은 더 깊은 가을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5봉을 내려선 잘록이에서 6봉 계단을 오르지 않고 좌측 좁은 협곡으로 길을 찾는다.
이 길은 어느 가이드에도 나오지 않는 비상 탈출로이다. 이 비상 탈출로는 너덜지대로 돌들이 모두 살아있어 밟으면 꿈틀거린다.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왜냐하면 낙석의 위험으로 부터 안전을 담보하기 위함인데,일행들이 일렬종대로 붙어서 내려가자고 하였다.
조심조심 25분여 만에 천황암지에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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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인가 하였더니...
경고 현수막이 붙어있다.
계곡 지류의 맑은 시냇물로 땀을 씻고 내려서는데 구봉산교회가 보인다.
구봉산교회 앞자락엔 바람재로해서 구봉산 정상이 2.0km라고 한다.
돌아서 본 바람재 들머리.
교회 지붕너머로 구봉산의 암봉이 솟아 있다.
살짝 당겨보니 8봉에서 7봉을 연결한 구름다리.
세멘트 포장도로를 내려오다 좌측으로 우리 차가 대어 있는 주차장을 바라본다.
그리곤 좌측 농로를 따라 질러 간다.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올려다 보는 구봉산.(정자가 있는 봉이 4봉이고 그 좌측이 우리가 돌아선 5봉이다.)
주차장 제일 상부에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는 <1봉~8봉> 들머리가 밧줄로 휘휘 감겨 있다.
우람한 근육질의 암봉은 1봉이고 그 뒤로 8봉까지 연봉이 이어져 있다.
마른 목구멍 허기진 뱃속으로 두 모금의 하수오酒를 삼킨다.
30도 싸아한 알콜도수가 전신을 휘감고 아홉구비 암봉을 따라 나의 영혼도 부활한다.
맡겨진 나의 일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