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
칼빈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은 "양의 시장"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한 사본들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 고데이는,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드릭센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 칼빈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한 사본들에 나와 있을 뿐이다.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요 5:5]"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