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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에고의 팽창
에고의 해체
향상된 앎!
이 길(향상된 앎)의 본질
의식을 통해서
'향상된 앎'으로 나가가는 곧은 길은
형상과 이원성, 지각을 뛰어넘는다.
상충과 오류는
형상으로부터 일어나며,
형상은 또한 위력(force)의 본향이기도 하다.
형상없는 것의 영역에는 힘(power)이 존재한다.
형상없음은
500수준으로 측정되는 의식수준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600수준에 이르면 형상은 형상없는 것 속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형상은 형상없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둘은 같은 것임을 통찰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는
형상 그 자체는 피하는게 제일 좋은 일종의 혼란이요
유예다.
1) 형상의 혼란을 피하도록 하라.
형상으로 표현된
많은 영적 가르침들은
흔히 '의식의 아스트랄계"라는
용어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한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영역들은 무한히 넓고 유혹적이며
즐거울 수는 있으나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형상은
탐구자가 올라가는 발판들과 이정표,
심지어 길 곳곳에 '영적 안내자'들까지
배치되어 있는 길에 서있다는
환상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깨달음의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는
영적인 등정에는 길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실재들도 없다.
아스트랄적 차원들도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측정될 수 있다.
거기에는
낮은 차원들(지옥),
중간차원들(연옥),
좀더 높은 차원들(천국)이 있다.
영혼이나 영적인 몸
혹은 의식의 초점이 갈수 있는 곳은 그것이 전부다.
참고) 도교의 경전에 따르면 천상에는 서른 세 개의 하늘[33천]이 있습니다. 즉, 동서남북에 각각 8천이 있어 횡적으로 32천이 펼쳐져 있고, 그 중앙 최고 정상에 대라천大羅天이 있습니다. 32천에는 각 하늘을 다스리는 천주天主가 있고, 대라천에 있는 하늘나라의 수도, 옥경에는 횡적으로 펼쳐진 하늘과 종적으로 펼쳐진 하늘을 모두 통합해서 다스리시는 대우주의 통치자, 옥황상제님이 계십니다.
그 각각의 차원들은
그 자체의 계급조직, 신들,
거기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실재로 비치는 신앙과 신화와 습속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런 것들은 만
족스러운 기분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즐겁고 감동적이기까지 하지만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심상은
모든 형상을 넘어섬과 동시에
형상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
형상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라.
그 본성을 찾으려 들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형상대 형상없음,
전부임대 공,
충만함대 텅빔의 양극이나
양자택일의 구도속에 갖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고유한 실재를 갖고 있지 못한
서술적인 언어들에 불과하다.
실상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실상과 실상 아닌 것을 선택하려고
고심할 필요가 없다.
참고) 형상없는 것 : 사랑, 헌신, 겸손, 영감, 믿음
형상있는 것 : 관념, 생각, 감정, 기억, 갈등, 이미지
2) 탐구의 방향
그 길에 대한 탐구는
"나"라는 감각에 대한 앎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
점차 내면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상적인 어법에서
이 말은 에고의 성질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자신의 심리, 에고,
그것들의 형상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참나에 대한 앎은
'나 나, 나의 느낌'이 일어나는 자리로서의
에고를 대신하는 실재다.
영적인 발견의 과정에서
우리는 나로서 한정되는 특정한 나가 아니라
나임의 존재나 특성을 자각하고 있고
이러한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려는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신성을 가리키는 모든 용어들과 신은
대문자로 표기되지만
대명사들 중에서는
오로지 "나"만이 대문자로 표기된다는 점에
유의하도록 하라.
개인적인 나는
오로지 더 큰 앎에 의지해서만
그 자체나 존재를 알 수 있다.
더 큰 앎은 그것의 근원이 되고
영적인 탐구의 초점이 되는
신적인 나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러므로
더 큰 앎은
비언어적인 것이며
경험과 목격과 관찰의 근원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금붕어가 헤엄치며 노니는 물이지
금붕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 기초적인 과정 - 내면을 응시하는 태도
내면을 응시하는 것은
테크닉이나 영적인 연습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태도'다.
그것은
마음의 내용물들과
마음이 반영하는 세계에 대한 미혹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초연한 자세는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죽음과 세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의 종말을 체험하기라도 한 듯한
상실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 의욕도 기력도 없는 상태가 올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단지 환상의 죽음에 불과하다.
기쁨은
세상이 안겨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즐기는데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 그 자체의 상실이 아니라
권태(심심함, 지루함)다.
지루한 기분이
'과거나 미래에 대한 어떤 열망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루함은 소멸한다.
오로지
에고만이
지루해하고 따분해 할 수 있다.
에고는 새로운 것들을 먹고 자라며
"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에고는
오로지 지금 안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절대적인 완전함을 체험하는게 아니라
미래의 만족에 대한 기대를 먹고 산다.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것은
권태의 밑바탕을 이루는 권태가
무(공)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망상이다.
무에 대한 환상은
일종의 위협으로 비친다.
이때
영적인 탐구의 길은
마음, 세계의 다채로운 것들의 영역에 대한
망상을 놔버리고
공, 무의 환상을 거쳐
앞의 두 가공적인 상태를 대신하는
전부임에 대한 앎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상태들은 환상이며,
영적인 의지와 점차 진화해 가는 앎이
그 환상들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4) 그렇게 추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모든 행위로부터
나라고 하는 접두사가 제거될 때'
에고의 환상은 소멸한다.
에고가
자신의 행위라 주장하는 것들은
사실 스스로 존재하는 특성일 뿐이며,
자동적이고 국소적인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그 특성들의 기능에는
그 기능들을 가동시키는 가공적인 내가
따라붙지 않는다.
우리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나"의 작용이나
결정에 따라서 생각하고
느끼고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나 느낌은
요청하지 않아도
일어난다.
더 높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내가 아니라
의식 그 자체의 한 측면이다.
이런 측면은
영감이나 헌신, 인내심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의지의 측면들이다.
그러므로
참나를 추구하는 원천은
참나 그 자체다.
참나는 은총이 뒷받침해주는
그 자체의 특성들에 의해 필요한 작용들을 일으킨다.
또 다른 예로서,
호기심은
그것을 일으키는 개인적인 자아나
결정없이 존재하는 한 특성이다.
우리는
호기심이 의식의 독자적이고
비인격적인 특성이며,
동물의 왕국전체에 걸쳐
두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호기심을 갖는 데는
내가 필요치 않다.
결정을 내리는 내적인 나,
독립된 개인적인 나같은 건 없다.
모든 생각과 행위와 느낌에
"나"라는 대명사를 붙이는 건
단지 말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내적이고 개인적인 자아를
그저 그것으로 지칭할수도 있다.
영적인 진화과정에서
'마음과 몸이 한동안 그것들이 되는 듯한 단계'들이 있다.
몸음
마치 사전에 예행연습을 하기라도 한듯이
자신이 할 일을 부지런히 해나가고
마음은 할말을 지시해주는
내면의 개인적인 자아가 없는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말을 한다.
생각의 배후에 생각하는 자가 없고,
행위의 배후에 행위하는 자가 없으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도 없다.
추구하는 일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저절로 일어나고
주의의 한 초점으로서 나타난다.
의식의 모든 측면과 특성은
저절로 가동되며
의지의 전반적인 지시에 따라
서로서로 힘을 불어넣어 준다.
5) 도구로서의 의지
마음의 활동이 보이는 특성은
변덕스럽고 시끌벅적해서
영적인 진화의 효율적인 초점이 될수 없다.
우리는
마음에게 이런저런 일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지만
마음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마음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것은
고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날뛰는 것과 같다.
마음을 통제하려는 것은 이미
통제하려는 자와 통제받는 자,
통제되는 내용과 통제하는 방식 등의
이원성을 낳는다.
마음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의지(will 840)'라고 하는 특성으로부터 주어진다.
우리는 그 의지 영역을 별 어려움없이 찾아낼 수 있다.
마음속에서는
생각과 느낌, 이미지들이 계속 지나가는 반면
'의지(840)'는
비교적 움직임없이 고정되어 있는 편이다.
의지는
좀더 안정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의지는
안달하는 나비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마음과는 달리
단단히 고정될 수 있고
한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고
확고하게 한 곳만을 지향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관점을
의지로부터 발산되는 참나에 대한 느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통해서 얻는다.
의지는 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할때는 깊은 성찰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의지는
앞으로 나아가고
탐구할 수 있는 거점이다.
의지는
생각과 신념, 개념, 관념, 요동하는 감정들을 거느린
평상적인 마음보다 참나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6) 관상
관상은
영적인 노력 중
가장 결실있고 의미있는 활동이다.
우리는 실행적 요소가 거의 없는
약간의 성찰을 하거나
관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실행되는 것인 명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이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종종 사회활동을 접고 은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관상과 성찰은
강도가 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의 끊임없는 영향에 의해
장애들을 점차 사라지게 한다.
그러므로
명상의 한 방식인 묵상은
가부좌 자세의 명상보다
질이 낮거나 열등하지 않다.
7) 영적인 의지의 활성화
의지는
헌신에 의해서 활성화되고 힘이 주어지며
은총에 의한 빛비춤으로 인도되는 영감과 상응한다.
개인적인 의지는
신의 의지로 용해될 것이며,
영적인 추구와 탐구로 이어지는 발심(영적의지)은
신의 선물이다.
그 여행을 떠날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은
강제할 수 없고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런 여행을 떠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미있고
매혹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단계까지
의식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일단
영감의 이끌림을 받은 탐구자들은
흔히 습관화된 모든 편의와 생활방식을 등지고
그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뭐든지 다 버리곤 한다.
에고의 환상들은 끈질기지만
영적인 의지에 종속되면
비교적 힘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에고-마음은
습관에 의해 강화되지만
습관도 그 기반이 제거되면
맥없이 와해되어 버린다.
에고는
정복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습관들의 편집물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의지를 활성화시켜주는
참나는
에고의 사상누각이 버텨낼 수 없는
무한한 힘의 본향이다.
참나는
무한히 강력한 자석과도 같아서
영적인 의지가 동의할 경우에는
에고의 구조를 용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영적인 앎의 진화가 이루어질 때
그 공을 치하받을 자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자도 없다.
영적인 노력을 행할 때
"이렇다, 저렇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용어들은
점차 "...한 듯하다"라는 용어로 대치되는데,
그것은 지각이 진실을 방해하고 가리는 정도를
점차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실상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모든 그럴싸한 지식이나 정보들을
가설에 불과한 것들로 보는 것이 실상에 더 가깝다.
요즘들어
사회에서도 이런 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그것은 예컨대 그 사람은 인지된 위협(perceived threat)에 대해 반발했다는 식으로
사람들이 "인지된"이란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점이
입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통찰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발전이다.
그것은
에고의 한계와 지각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최초의 참된 징후다.
이렇게
에고의 한계에 대한
사회적 자각이 증대하는 경향은
최근들어 DNA테스트 기법을 사용한 결과
사법적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들이 드러난 것에 의해,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신뢰하기 아주 어렵고
중대한 오류를 저지르는 빈도가 대단히 높다는 사실들을 보여주는 연구에 의해
힘을 얻고 있다.
심리학자들 역시
기억이 퇴행적 왜곡을 일으키고
사건과 관련된 시간이나 장소를 바꾸곤 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사회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려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할
믿을만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영적인 의지는
사랑과 헌신, 내맡기려는 자발성에 의해 힘을 얻고
활성화된다.
사랑은 형상없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위치성을
신께 기꺼이 내맡기도록 하는 능력이다.
위대한 종교적 성인들이 썼던 고전적인 방법은,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신을
숭배하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었다.
깊은 헌신과 전념은
모든 저항을 극복해낼 수 있고,
따라서
가슴의 길과 마음,
혹은 의식의 길은 결국 가서
하나로 융합된다.
8) 명상
나 혹은 '참나가
영적인 의지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명상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의지(spritual will)는
비교적 견실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의식을 통해서 자아의 초월적인 앎으로 나아가는 자리가 되어준다.
자아의 초월적인 앎은
절대적인 나로서의 신의 표현이자
실상의 눈이다.
운명 혹은 카르마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영적인 의지다.
의지는
성령과 직접적으로 접하는 영역이며
마음에까지 이르므로
자아의 내재적인 힘이 작용하는 자리다.
의지의 수준에서
형상과 형상없음은 만난다.
사랑과 헌신, 겸손, 영감, 믿음같은 형상없는 것들과
관념, 생각, 기억, 갈등, 이미지의 형상들같은 마음의 세모들은
의지의 수준에서 만난다.
영적인 의지속에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거나 이루기를 바라는 목표들은
사랑과 용서와 헌신이라는
형상없는 영적인 특성들과 접한다.
우리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평화의 선택과 겸손을 통해
우리가 가장 애착해 마지 않았던
앙갚음과 원한, 증오같은 부정적인 특성들마저 버릴 수 있다.
작은 자아는
참나에 의해서 용해된다.
자아에 대한 참나의 치유적인 태도는
연민이다.
우리는 용서함을 통해서
용서받는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일어나는
기꺼이 내맡기려는 자발성은
성령으로 표현된 신의 힘에 의해
이해의 맥락을 새로이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지각의 지배와 그것에 수반되는
모든 고통의 원천이 되는
이원성을 해소해 준다.
이원성의 해체는
그것이 고통의 근원과
고통받을 수 있는 능력을 용해시켜 버리기에
신의 궁극의 선물이다.
비이원성에서는
고통이 가능하지 않다.
9) 도그마(dogma,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의식의 비이원성을 통해
신에게 이르는 길에는
도그마나 신념체계같은 것들은 수반되지 않는다.
비이원성의 길에서
우리는 충분하고 유용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그 정보의 진실성은
자신의 내적 탐구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이러한
내적탐구는
영적 진보에 중요하며
이번 생에서
깨달음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중요하다.
어떤 정보든 간에
그것의 가치는
쉽게 측정할 수 있다.
이 시험방법을 적용할때마다
원래 질문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들까지
알게 된다는 사실도 발견할 것이다.
10) 단식, 의식, 수련, 호흡법, 만트라, 상징
향상된 앎을 위해서
비록 이 중의 어느것도 필요치 않으나
어떤 탐구자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들이
각기 그들 나름의 과제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깨달음에 이르는 영적인 길은
이러한 것들과 그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종교생활과 같지 않다.
종교들은
역사적인 사건들,
그들의 지리적인 위치, 과거의 문화,
정치적인 동맹관계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깨달음은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시간과 역사, 장소를 넘어서 있으므로
그런 것들은 깨달음과는 무관하다.
신학은
400대의 의식수준과 관련된 것이고
깨달음은 600대나
그 이상의 수준들과 관련된 것이다.
11) 음악, 향기, 건축학적인 아름다움
이런 것들은
영감을 주고
영적이고 외경스러운 기분과 자세를 뒷받침해주며,
주의의 초점을 생각의 내용물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아름다움은 의식을 고양시켜주고
500대 후반 이상으로 측정되며
완벽함에 가깝다.
12) 영적인 실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감과 헌신과 의지의 결정에 의해
스스로를 실현하는
의식의 여러 측면들을 점차 활성화하는 것을
뜻한다.
의식의 여러 측면들은
연민과 헌신, 겸손,
절대적인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자 하는
자발성에 힘을 얻으며,
이때 지각은 영적인 비전으로 변형된다.
이런 식의 진화는
세속적인 삶과 지각의 습관들이 지닌
"중력"을 극복하게 해줄 만한 큰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식수준의 가장 높은 수준들로부터
그것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형태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예배드리는 행위는
더 높은 에너지들에게
자신의 영적인 노력을
도와달라는 간청이자 초대다.
13) 나날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세속적인 성취로부터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성취로의 가치 전환이 일어난다.
그러한 변화는
모든 행위를 다른 맥락속에
자리잡게 한다.
무리한 삶의 목표들은 바뀌고,
나날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마치 새로운 차원에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갖게 된다.
결국
그 초점은 덧없는 내용물들이 아니라
내적이고 움직임없고 고요한 앎 그 자체의 현존에
맞춰진다.
갑자기 나라는 감각이
그 내용물에서 맥락으로 바뀐다.
그 맥락은 참나의 보편적인 나다.
14) 영적인 길에서 "작업하는 일"이 왜 필요한가?
에고는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들에 의해
실려가는 것에서 비롯된 '
'철벽같이 굳어진 생각의 습성'들로 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의 습성들은
반복과 사회적 의견일치에 의해
강화된다.
언어 역시 그런 습관을
더욱더 강화시킨다.
언어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프로그래밍의
한 형태다.
나라는 접두사를 주어로 사용하고
그에 따라 내가 모든 행위의 원인임을 암시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오류며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저절로 빚어낸다.
세속적인 생각과 신념들의 중력을 떨쳐 버리려면
의식을 자기프로그래밍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영적인 의지의 결정을
실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에는
에고-마음이 만들어낸 억측과
에고가 마치 실상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진술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포함된다.
더 높은 이해를 고수하려는 노력도
수반된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연민어린 관점들과 친숙해질수록
그런 관점들은
점점 더 힘을 얻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스러운 친구들과 어울리고
좋지 않은 친구들은 피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영적인 충고가 나왔다.
그래야만
좀더 적절한 마음가짐과 생각의 습성들을 가려내는 힘이
점차 강해진다.
15) 기도하는 것은 어떤 효용성이 있는가?
기도 혹은 기원은
겸손에서 나온 행위다.
의식의 낮은 수준에서의 기도는
자신이나 타인들을 위해
새차나 직장, 병고에서의 회복 혹은
특별한 호의같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시도다.
의식이 진화하면
신을 통제하려는 이런 의도를 포기하게 되고
기도는 요청이 아닌
헌신이 된다.
전쟁이 벌어질 때
양측은 서로 자신의 진영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의식이
이기심에서 사심없는 자세로 진화하면
기도의 특성은
그 기도를 통해 무엇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저 주의 종이나 주의 뜻의 통로가 되고자 하는
의지로 전환된다.
이때 기도는
간청이 아닌
내맡김이 된다.
많은 아이들이 간청하는 형태의 기도를 한 뒤
자신들이 부탁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실망함으로써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곤 한다.
16) 기도의 치유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랑은
신에게서 나온다.
의식척도에서 사랑은 500으로 측정되고,
완성되면 540수준인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르는데,
이때 사랑은 치유의 수준이다.
따라서
치유하는 힘이 있는 기도를 할때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540수준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 속하는 에너지 장으로
대치하려는 노력이 행해진다.
어떤 영적인 단체들은
540이나 그 이상의 수준으로 측정되며
따라서 기적들을 성취할 능력이 있는
치유의 에너지 장을 제공해준다.
17) 기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건이
설명이나 선형적인 인과관계의 영역과
뉴턴식 패러다임을 넘어설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것은
부정적인 요소들의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현실화되는 사건이다.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에는
범위를 한정하는 신념체계들,
즉 "그건 불가능해"나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돼"와 같은
생각이나 에고에서 나온 그밖의 관점들을
버리는 일도 포함된다.
더 높은 의식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현상은
평범한 일일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자연스런 흐름이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기적은
인과관계가 아닌
창조로부터 나온다.
영적인 원리들
1) 영적 태도
의식을 통해
영적인 진화를 이루는 길은
사실상 간단하고 단순하다.
그런 길을 갈 수 있다는
으뜸가는 자질은
'삶을 이익을 얻는 장이 아니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장으로 보는 마음자세'다.
그런 기회는
삶의 아주 작은 부분들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영적인 태도는
사람을 우호적이고 친절하게 만들고
모든 생명체를 선의로 대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개미위를 지나갈때도
강요된 의무감이나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더 큰 앎으로 인해
그것을 짓밟지 않으려고
발을 조심스럽게 디딘다.
우리는 실제로
모든 동물이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데 대해
반응을 보일줄 아는 개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식물들 조차도
사랑하고 좋아해주는 것을 안다.
2) 영적 겸손
겸손 역시 하나의 태도요
마음과 현상이 안고 있는 한계들에 대한 앎이다.
이러한 자세를 지닌 이들의 내면에서는
삶이 지각을 통해 여과되어 나오며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적인 실체들이 아니라
태도와 지각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도가 점차 높아진다.
3) 너그러이 봐주고 용서하려는 자발성과 친절함
영적으로 진지한 학생이라면
심판하고 바로잡고 통제하고 지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가 좋아서 떠안은 모든 의무들로부터
물러서야 한다.
그 사람은 이제
그런 골치 아픈 일들을 계속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 일들은
신의 정의에 맡겨야 한다.
마음은
실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므로
그런 과거의 의무들을 놔버리는 것은
일종의 구원이 될 것이고,
많은 죄의식으로부터
놓어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억압받고 짓밟히는 다른 희생자들을 구해내겠다는
대의와 운동, 감상주의들은
깨끗이 버리는게 좋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운명을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다른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도록 하라.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는 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멜로드라마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4) 사람들에 대한 관찰
사람들의 신체적인 겉모습은
엄청난 눈속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으로 보이지만
사실 어른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정서적인 면에서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어린애들이다.
유치원과 놀이터를 지배한 감정과 태도들은
어른의 삶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지만
좀더 그럴싸하게 들리는 용어들로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아이는 사실 어른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주 얘기 들어온
"내면의 아이"는
사실 내면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주 외면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어른의 행동과 스타일이라 여기는 것들과
자신을 여러모로 동일시하고 모방하지만,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목격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이의 눈으로
자기와 동일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과 대본들을
연기하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이미 대부분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호기심과 자기연민, 시기심, 부러워하는 마음,
경쟁심, 성마름, 감정적인 폭발, 원망, 미움, 적대적인 태도,
스포트라이트와 찬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
외고집, 짜증, 타인들에 대한 비난,
책임회피, 남에게 잘못 전가하기,
남에게 잘보이기, 물건들 긁어 모으기, 과시하기
등과 같은 특성들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들은
어린아이의 속성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보내는
일상의 행동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두살배기 어린아이의 특징인
외고집과 저항은
그의 인성을 늙을때까지 지배한다.
이따금 사람들은
인성의 측면으로
어린아이로부터 사춘기 청소년으로 이행해가기도 하며
그럼으로써 끝없이 스릴을 추구하고
운명에 도전하곤 한다.
그런 이들은
몸과 근육, 이성과의 사랑놀음, 인기,
로맨틱하고 성적인 형태의 정복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다.
그들은 재치있고 수줍어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매혹적이며
영웅적이고 비극적이고 연극적이며 극적이고
신파적인 사람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들 역시
그 마음 속의 아이가
사춘기 청소년의 특징적인 행동방식이라 여기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면의 아이는
순진하고 영향받기 쉽고 손쉽게 프로그램되며
유혹에 쉽게 빠지고
쉽게 속아넘어간다.
5) 의식의 본성에 관한 궁금증
의식의 본성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멈추기가 좀 더 쉬워진다.
모든 조건이
최적인 상태에서조차도
인간의 삶은 아주 어려운 것이다.
욕구불만, 바라는 일들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것,
기억의 착오, 여러가지 충동,
온갖 형태의 스트레스가
모든 사람을 짓누른다.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들이
제시되는 경우가 많고
생활은 늘 시간의 압력에 쫒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에고가
거의 다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은 타고나는 것이며,
인간은 유전자들과 염색체들과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인성의 틀에 의해 작용하는 뇌를 갖고 있다.
인성의 주요한 한 특징들의 상당수는
태어날때부터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이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이미 주어진 틀과는
다른 형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스스로를 발전시키거나
영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듯해도
사실 내면으로는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에
아무 하자가 없으며
아마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옳으며
모든 문제들은 외부세계 탓이요,
다른 사람들의 이기심과 부당함 때문이라고 믿는다.
6) 사랑을 받으려 하기보다 주려고 애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얻는 것이자
하나의 감정이고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남에게 주면 줄수록 줄어드는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와 정반대다.
사랑은
일종의 태도로서
그런 태도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변형시켜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
그것에 감사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할 때
그리고 그들이 생명과 우리의 편의에 기여할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한 방식인 동시에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중 하나다.
7) "적들을" 만들어 내는 일을 피하도록 하라
사람들은 앙갚음하는 함정이나
남을 끊임없이 비평하는 함정에 빠진다.
그런 것들은 적들과 적개심을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은
평화롭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
적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복할 수 있으므로
불행한 결과들을 초래한다
.
싸움에서 이긴다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싸움은 진사람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가정 폭력의 대다수는
상대방이 말로 도발한 것에 대한
물리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폭력의 희생자들이
자기가 도발하고 부추기고 모욕을 가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거의 없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항상 책임을 지고
희생자가 되는 덫을 피하는 것은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된다.
더 높은 관점에서 볼 때
희생자란 없다.
현상계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을 일으킬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8) 따뜻한 역할과 인생관을 선택하도록 하라
냉혹한 관점들은
영적인 성장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사
그런 관점들이 옳거나 정당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탐구자는 그런 관점이나 견해를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살인범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처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정의가 구현되었다라고 기꺼워하거나
남에게 앙갚음을 하고 즐거워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기본적인 영적인 원리들을 훼손할 경우
우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영적인 탐구자는
사람들이 지난 그런 환상을 꿰뚫어보고
재판관이나 배심원의 역할을 포기한다.
사람들은
때로 분개하며 아우성치지만
그 누구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죄로 석방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운동역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우주가 어떤 사소한 일도 간과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입증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다 헤아리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참새 한마리도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의식의 장에 영원히 기록된다.
9) 죄의식을 포기하라
죄의식은
구원을 매수하고
신을 속이고
고통에 의해 용서를 매수하려는 시도다.
이런 태도는
신에 대한 거대한 징벌자로 잘못 해석하는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의 괴로움과 고통,
고행에 의해 신의 정당한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쁜 짓을 참회하는 방법으로
딱 하나 적절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변화'다.
부정적인 요소들을 나무라는 대신에
긍정적인 요소들을 선택하면 된다.
영적으로 진보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그것이 좀더 적절한 응답이다.
우리는
의식의 척도를 통해,
신은 의식척도의 최상부에 존재하는데 비해
죄의식은 맨 밑바닥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의식의 장 밑바닥에서
죄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결코 우리를 꼭대기로 데려다 주지 않는다.
겸손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영적인 의식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과거의 그 어떤 행위일지라도
그것들을 바로잡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금언은
"그것이 그 당시에는 좋은 생각같았어"
라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돌이켜 볼 때
그 행위는 새로운 맥락하에 놓이게 되면서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식의 본성이 무구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무구하다면
영적 탐구자의 자아도 무구하다.
죄의식을 버리는 것과 아울러
죄를 실체로서 보는 태도를 버리는 것 역시
큰 도움이 된다.
잘못은 바로잡을 수 있다.
죄는 일종의 실수이므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람들이 죄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내면의 아이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의 일종인 집착이다.
거짓말하고 훔치고 속이고
남의 험담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는
사실상 내면의 아이다.
그러므로
죄는 실상의 참된 본성과 의식의 본질에 대해
무지와 미성숙에 다름 아니다.
영적인 가치들이 세속적인 가치들을 대신할 때
유혹은 줄어들고 오류도 덜 발생한다.
10) 자발성
자발성은
세속에서의 성공과 아울러
모든 영적인 성장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그것은 저항하는 태도를 버리고
'최선 이상을 행동하는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불쾌감은
저항하는 것에서 비롯되며,
저항감을 놔버릴 때
힘과 확신과 기쁨을 감정들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어떤 시도나 노력에서든
장애가 되는 저항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극복할 때 그 시도는 수월해진다.
운동선수들은
이런 사실을 자주 깨닫곤 하며,
육체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는,
거의 깨달은 상태 비슷한 것이 나타나면서
갑자기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나는 상태가 존재한다.
거기에는 평화와 평온함, 고요함이 존재한다.
탈진한 발레리나나 육체노동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신을 발견하는 일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내맡김이 있은 후에
신의 현존에 대한 앎이 뒤따른다.
선불교에서
천국과 지옥의 간격은
극히 미세하다고 한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에고가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써
절박한 위기가 영적인 발견의 기회로
곧바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1) 진실은 맥락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깨닫도록 하라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든 진실은
일정한 의식수준 내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예를들어
용서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용서받을 '다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에고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에고는 하나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각은 실상이 아니다.
12) 무집착
무집착은
세상사에서 감정적인 뒤얽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다.
무집착은
마음의 평온함과 평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어려운 처지와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거부하는 자세에 의해 뒷받침된다.
또한
무집착에는
세상과 세상사로 하여금 스스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도록 놓아두는
자발성도 포함된다.
세상사에
반사적으로 휩쓸리거나 관여하는 일은
자신과는 다른 소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깨달음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는 노력할 책임만 있을 뿐
그 결과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결과는 신과 우주에게 달려있다.
무집착은
무관심과 은둔,
초연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초연함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잘못된 이해는
종종 무미건조하거나 냉담한 자세를 낳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 반대로
무집착은 결과들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일없이
삶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14) 수용(받아들임)
수용은
다툼과 갈등, 혼란을 치유해주는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또한
그것은
지각의 주요한 불균형을 바로잡아 주고
부정적인 감정들의 지배를 막아준다.
모든 것은
다 나름의 목적에 기여한다.
겸손은
우리가 모든 사건들과 일들을
모조리 다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위치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진보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신이 내린 은총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음(수용함)으로써
영적인 에고가 자라난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15) 거짓 구루들을 피하도록 하라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순진한 영적 입문자들은
영적 인물들의 화려한 장신구와 명성에,
혹은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영적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에
지배당하기 쉽다.
이런 영적 탐구자들은
앞선 의식상태에서 나오는
영적인 앎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적절한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수단이 없어서
거짓 스승들의 인기에 넘어가고 만다.
인류 역사의 현재 시점에서
스승이나 단체, 혹은 가르침의 의식 수준을
제대로 측정해주는 운동역학 테스트 말고
우리가 의존할 만한 다른 지침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순진한 입문자들은
가짜 구루들이 과시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특이한 재주, 색다른 칭호나 복장에
혹하곤 한다.
참된 스승들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는
겸손과 소박함, 사랑과 연민, 평온함 등이 있다.
그들은 돈과 개인적 권력, 이익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므로
진리를 전달할때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참된 스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제자가 되든 말든,
혹은 자신의 영적인 그룹이나 단체에 가입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일들은
스승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 영적 단체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참된 스승은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한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휘두르고 싶은 욕구가 없으므로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
그는
본인 자신이 깨달음에 관한 지식을
대가없이 자유롭게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시의 사유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고
또 남들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참된 스승은
태도나 기질면에서 온화하고 너그럽다.
참된 스승에게는
인류전체가 그 제자다.
16) 거짓된 가르침들을 피하도록 하라
영적인 책들을 분류할 때
운동역학적 시험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권장할 만한 일이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책들을
한쪽에 다 모아놓고
강하게 만드는 책을 다른 쪽에 모아 놓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탐구자의 의식이 순진해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것은
그 당사자와는 무관한
비인격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끌기는 하나
영적인 길과 무관한 가르침들은 피하도록 하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아스트랄적 영역들과 우주들,
그리고 그 각 영역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들과 지도자들, 성직자 조직과 신앙체계들이 있다.
개중에는
우리의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
많다.
부주의한 이들은
그런 매혹적이고 비밀스러운 교리의 덫에
걸리기 쉽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상태는
형상의 수준들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탐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복잡한 절차와 의식,
여러가지 요구사항,
희생, 서약, 난해한 책들, 돈,
독단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그 길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어떤 영적인 집단들은 새 회원은 이상한 의식들과 서약과 계약을 통해서 입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일부 사설단체들은 훈련과정을 강제로 이수하게 하고 많은 수수료를 받는다.
실상에는
우리가 가입하고 행하고 연구해야 할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도, 규제도, 요구사항도 없다.
의식이나 이상한 복장,
괴상한 호흡수련이나 자세같은 것도 필요치 않다.
뉴에이지 그룹의 경우에는 요구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나 잘못된 정보의 원천에 의존하는 듯한 그룹들이 많다. 그들은 이상한 복장, 이상한 식사법, 기묘한 머리장식, 온갖 종류의 목걸이, 상징, 카드점, 무당, 신내림, 영매, 염송, 만트라 등을 강조한다.
에너지와 빛의 장,
신비로운 시각적 영상, 색깔, 신비로운 숫자, 암호,
유서깊은 비밀스러운 가르침들을 비롯한
온갖 것들을 다루고 조작하는 집단은
경계심을 갖고 피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은밀히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언자나 깨달은 이로 자처하고 나선다.
우리는 운동역학테스트로
이 모든 사람들이나 가르침들의 정체를
간단히 꿰뚫어 볼 수 있다.
진실에서 벗어난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형상이나 특별한 것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 모두가 우주선, UFO, 외계인, 심판의 날 예언들을 언급하면서 카니발과 같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들은 그런 모든 측면들에 영적이라는 이름을 잘못 갖다 붙이곤 하는데, 그런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아스트랄적인 서커스를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쉽사리 휘말려 든다.
모든 뉴에이지 집단은
수없이 많은 바바나 마스터,
혹은 전설적인 인물들에 매혹되곤 하는데,
그들 모두는 운동역학 테스트에서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이런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영성을 팔아먹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의식을 통해서 향상된 앎으로 나가가는 곧은 길은 형상과 이원성, 지각을 뛰어넘는다. 상충과 오류는 형상으로부터 일어나며, 형상은 또한 위력의 본향이기도 하다. 형상없는 것의 영역에는 힘이 존재한다. 형상없음은 500수준으로 측정되는 의식수준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600수준에 이르면 형상은 형상없는 것 속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형상은 형상없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둘은 같은 것임을 통찰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는 형상 그 자체는 피하는게 제일 좋은 일종의 혼란이요 유예다.
영적인 책들을 분류할때 운동역학적 시험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권장할 만한 일이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책들을 한쪽에 다 모아놓고 강하게 만드는 책을 다른 쪽에 모아 놓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끌기는 하나 영적인 길과 무관한 가르침들은 피하도록 하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아스트랄적 영역들과 우주들, 그리고 그 각 영역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들과 지도자들, 성직자 조직과 신앙체계들이 있다. 개중에는 우리의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 많다. 부주의한 이들은 그런 매혹적이고 비밀스러운 교리의 덫에 걸리기 쉽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상태는 형상의 수준들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