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열오빠와 풀꽃 반지
서 영 복
40분간의 수업을 마치고 잠시 쉬려고 내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혜미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내 앞에 쫙 펴 보이며 자랑하듯 말했다.
“선생님, 이것 봐요!”
분홍 보석이 자잘하게 박혀있는 예쁜 반지가 그나마도 작은 새끼손가락에 끼어 있었다.
“어머나! 예뻐라. 누가 사줬니?”
“어제 집에 갈 때 정훈이가 이 백 원 주고 사줬어요”
“약혼반지구나.”
내 말에 혜미는 생글거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일 학년에 들어 온 지 겨우 두 달째다. 이 나이 또래의 꼬맹이에겐 ‘약혼반지’라는 뜻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으니, 그저 자기 나름대로 ‘예쁜 반지’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듯하였다.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저만치 뛰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운 혜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깐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30년도 더 묵어 낡은 필름이지만 언제나 생생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내가 어릴 때 살던 고향 집은 뒤쪽에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우리에게 학교 외에는 놀이터란 곳이 따로 없었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산으로 올라가 놀곤 했었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았던 종열이 오빠는 북쪽에서 온 피난민이었다.
동네에는 피난민들이 여러 가족 함께 살던 ‘양학당’이란 곳이 있었다. 피난민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그곳에서 살던 종열이 오빠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열이 오빠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아니면 피난길에서 사고를 당했는지 다리를 심하게 절었었다. 그 때문에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뒷산에서 종열이 오빠는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했지만 아무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다.
그는 요즈음에 흔히 볼 수 있는 상품화된 목발이 아닌, 집에서 대충 다듬어 만든 나무 지팡이 두 개에 몸을 맡긴 채 가까스로 걸어 다닐 정도였다. 그만큼 오빠는 마구 뛰고 내닫고 하지 못했다. 우리가 신나게 소리를 꽥꽥 지르며 노는 모습을 멍하니 혼자 앉아 구경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재미였다. 저녁때가 되어 엄마들이 밥 먹으라고 하나, 둘 이름을 불러대면 우리들의 놀이는 끝이 나곤 하였다.
그날도 우린 여느 때처럼 ‘무덤 뺏기’라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 종열이 오빠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재미있게 놀다가 끝이 났다. 그때였다.
“얘들아, 너희들 이것 가져.”
종열이 오빠가 내민 것은 한 움큼의 꽃시계와 꽃반지였다. 우리가 놀고 있는 동안 그는 토끼풀의 하얀 꽃을 탐스럽고 예쁜 것으로 골라 수없이 많은 꽃시계와 꽃반지를 만들어 놓고는 우리들의 놀이가 끝나길 기다렸다. 우리는 한꺼번에 몰려가 종열이 오빠 앞에 놓여있는 꽃시계와 꽃반지를 서로서로 손목에, 그리고 손가락에 매면서 좋아했다.
“종열아, 고맙다.”
우리 중 그래도 착한 향자만이 유일하게 고마움의 말을 하였을 뿐이었지만 종열이 오빠의 표정은 너무나 밝아 보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울하고 심심해 보였던 그를 우리들의 놀이에 가끔 끼워주었다. 놀이에 끼워줬대 봐야 기껏 가만히 앉아 지팡이를 휘두르며 집을 지키는 역할이 전부였지만 그는 손뼉을 치며 응원하기도 하고 큰소리를 내며 웃기도 하였다. 설혹 그가 집을 잘못 지켜 우리 편이 지는 일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이를 하곤 하였었다.
오늘은 혜미 덕분에 그동안 메마르고 삭막했던 내 삶에 아름다운 동심의 꽃을 한 송이 피울 수 있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견딜 수 없다”라며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삼십 대 여류 작가의 유서 내용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은 하루 중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야 한다고 하던데 나는 하루 중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고 싶다. 오늘 내 반 아이가 보여준 반짝반짝 빛나는 이 백 원짜리의 보석 반지는 그때 종열이 오빠가 만들어 주었던 풀꽃반지를 생각나게 하였다. 비록 하루 만에 시들고 만 것이었지만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여고를 다닐 때쯤 하늘나라로 떠났다. 종열이 오빠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그곳에서 많은 풀꽃반지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릴 때의 우리들처럼 신나게 펄쩍펄쩍 뛰면서 원 없이 무덤 뺏기 놀이를 하고 있을까?
새삼스럽게도 오늘은 종열오빠가 만든 풀꽃반지를 매어보고 싶다. (19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