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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게임>: 미로 안으로 들어 간 두 사람. 한 사람은 미로를 잘 빠져 나온다. 얽히고 설킨 길들을 잘 살피고 요리조리 열린 통로를 잘 찾아내면서.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이상하다. 물론 그도 밖으로 나오는 길을 찾아 헤멘다. 하지만 그럴 수록 점점 더 깊이 미로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상한 건 그러나 뻔히 찾을 수 있는 길도 놓치고 마는 그의 아둔함이 아니다. 이상한 건 그가 계속 헛짚는 실수 때문에 처음에는 불안해 하다가 어느사이 그 헤메임을 즐기는 모습이다. 마치 미로 안에서 헤메이다 보니 자기도 몰랐던 어떤 목적지를 발견한 것처럼. 헤메임이 그 곳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그리하여 이제 중요한 건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인 것처럼.
<비빔밥>: 나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점에서도 원해서 비빔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들 비빔밥을 주문하면 혼자만 유난 떨기 싫어서 ‘그럼 나도...’라고 따라 주문할 뿐이다. 비빔밥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비빔밥 먹는 모습을 요즈음 자주 보게 된다. 일 때문에 자주 만나는 한 여자가 비빔밥 매니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꽤 미인이어서 비빔밥 먹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은밀히 즐기는 편이다. 처음에 나는 그 여자가 비빔밥을 좋아한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대단히 쿨하고 분석적이며 선별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빔밥이라는 게 어떤 음식인가? 이것저것 다 비비고 섞어서 개성을 다 무시하고 으깨어버린 무취향과 무개성의 음식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날도 점심식사를 하러 간 음식점에서 그녀는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다. 하얀 밥 위에 고사리, 숙주, 콩나물, 상추, 홍당무, 잘 갈은 고기 한 줌이 잘 분리되어 얹혀 있었다. 여자는 숟가락을 들더니 그 많은 구성분자들을 마구 헝클고 이겨서 섞어 버린 다음 맛있게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던 여자가 마침 후식을 가져온 종업원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숙주나물이 참 맛있네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저 여자는 그 아수라의 뒤죽박죽 속에서도 숙주나물의 고유한 맛을 선별하고 있었다는 건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혼자 곰곰 생각했다: 그러니까 비빔밥을 먹는 건 비개성적인 취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구나. 오히려 가장 개성적인 입맛이구나. 나물 하나하나의 맛은 각각 먹을 때가 아니라 마구 뒤섞여서 혼용되었을 때 오히려 보다 또렷하게 구분되고 음미되는 거구나... 그러자 나는 그녀가 언젠가 말했던 한 사진작가에 대한 분석이 기억났다: <이 작가의 사진 안에는 주인공이 없어요. 개개의 요소들이 전체 안에서만 비로소 개성이 되고 자아가 되죠. 우리들 속에서의 나, 뭐 그런 자아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원래 자아라는 게 그런 거 아닐까요?>
<나이에 대한 명상>: 고민하다가 내 나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나이는, 비겁하게 살고자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이미 죽어 있었을 나이일 것이다. 나는, 분명 비겁하게 살아 왔으므로, 지금 여기에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나의 남은 생은, 산자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니라, 죽은 자에게 주어진 시간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비로소 모든 일들이 아주 자명하고 확실해 졌다.
<옛 집 생각>: 내가 살았던 옛 집들은 모두 셋이다. 어린 시절의 신설동 한옥, 사춘기를 거쳐 유학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불광동 양옥, 귀국 후 수년간 살았던,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셨던 불광동 다세대 주택... 그러나 이 집들은 그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아파트가 되고 고급 빌라가 되었다. 지금은 찾아가도 흔적 한 점 찾을 수가 없다. 어젯밤 꿈 속에서 나는 이 사라진 집들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리운 사람들과 만났다. 아직도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 오래만에 새벽까지 달고 깊었던 잠. 그 행복한 잠은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꿈꾸기>: 우리는 스스로 꿈꾸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대신 꾸어줄 수 있을 뿐이다. 나의 꿈을 꾸어 줄 수 있는 건 타자뿐이다. 타자의 꿈을 꾸어줄 수 있는 건 그의 타자인 나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꿈도 꾸지 않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 - 그건 우리가 서로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징후다. 어젯밤, 너무도 미워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꿈.
<내가 좋아하는 자세>: 침대 위에 눕는다. 천정을 바라보고 사지를 다 펼친다. 팔다리만이 아니라 입도 다 벌리고 귀도 다 열고 찢어지도록 눈을 부릅뜨고... 그럴 때 나는 마음껏 다 벌어진 상처처럼 편하다.
<꿈>: ...나는 가방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철교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가방이 아니라 잿빛 담요로 둘둘 말아 싼 사각형의 무엇이었다. 다리 한 가운데 왔을 때 걸음을 멈추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심연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나는 들고 있던 담요 덩이를 다리 아래로 던져 버렸다. 빠르게 추락하며 점처럼 작아지는 잿빛 담요 속에서 얼핏 흰 속살 같은 것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저게 뭐지? 묻는데 갑자기 무언가 나를 세게 끌어당기고 나는 다리 밑으로 내던져졌다... 화들짝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세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깨달았다: 까마득한 심연은 우물 속이었다는 것, 내가 던진 건 막 낳은 갓난아이라는 것, 그리고 그 갓난아이와 나 사이에는 탯줄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연금술>: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본다. 아우의 사진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잠든 아이들을 바라본다. 죽은 사람들. 오래 바라보면 그들은 왜 모두가 나의 자식들 같은 걸까.
<이 은주>: 아도르노 8주 강의가 끝났다. 끝나고 학생들과 동동주를 마셨다. 헤어질 때 한 친구가 CD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Scardanelli - 사십년을 미쳐서 살았던 F. 횔덜린의 말년을 그렸다는 독일 영화의 OST였다. 돌아와서 음반을 들었다. 한때 그의 서정시들에 골몰하면서도 또렷하지 않았던 횔덜린의 정체가 순식간에 자명해졌다. F. 횔덜린 -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는 ‘더러운 곳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손을 타면 금방 죽어버리는 담수어처럼.
이 은주가 죽었다. 자살했다. 심한 베드신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풍문도 있다. 포르노 시대의 은막을 처소로 삼았던 직업 여배우가 그깟 베드신으로 우울증에 빠지다니? 분명 풍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풍문을 믿겠다. 횔덜린이 그랬듯 이 스물다섯 살의 고운 처자 또한 조금만 손때를 타도 죽어버리고 마는 담수어였다는 풍문을 나는 진실로 믿겠다. 믿을 때에만 풍문은 진실이 되니까. 이 은주는 정말 조금만 때를 타도 죽어버리는 담수어가 되니까. 그녀의 죽음이 오염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잘만 살아가는 폐수어같은 삶들을 심한 부끄러움으로 강타할테니까.
수수께끼는 자살이 아닌지 모른다. 아무리 때에 절어도 안 미치고 안 죽는 그 건강함이 캄캄한 수수께끼일 뿐.
<아침 산책>: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아침 산책을 했다. 사차선 차도를 건너서 천변 길로 들어섰다. 길은 공장들을 안고 휘면서 이어졌다. 공장들이 끝나는 곳에서 논밭들의 들판이 이어졌다. 논두렁길을 꼭꼭 눌러 밟으면서 걸을 때 하늘 위로 한 떼의 새들이 날아갔다. 새들은 하강하다가 빠르게 상승했다. 이름 모를 새들의 날개는 빛나고 날개가 긋고 지나간 허공 위의 포물선도 얼핏 빛난 것 같았다. 자동차가 있는 학교 앞으로 돌아오니까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돌아와서 청소를 하고 커피를 끓인다. 책상 앞에 앉아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다. 크레센도가 정점을 지날 때 갑자기 주변이 한없이 적막하다는 걸 발견한다. 아직 햇빛이 들지 않은 방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푸른 물 속 같다. 책상 앞에 앉아서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이마가 점점 넓고 깊어진다. 텅 비인 그 이마 안으로 물 속에 빠지듯 걸어 들어가는 착각에 빠진다. 몸속이 조금씩 비어가는 걸 느낀다. 몸 안이 또 가득 차오르는 걸 느낀다. 이 이상한 신체의 환기 - 그래, 나는 지금 완전히 행복한 것이다. 이 완전한 행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병적인 강박감만 없다면...
<행복한 동시성>: ...이 돈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가거라.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렴... 임종의 침상에서 시어머니는 전쟁미망인이 되어버린 며느리에게 유산을 남기며 충고한다. 새로운 인생은 불확실하기만 해서 그녀는 망설이지만 마침내 결심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배를 탄다. 그녀의 여객선이 오스트렐리아의 어느 항구를 향해서 출발하는 바로 그 시간, 화면은 반전하고,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한 남자도 일자리를 찾아서 오스트렐리아의 그 어느 항구로 출발하는 배에 오른다. 이제 그들의 불확실한 새 출발은 신대륙의 어느 낯선 항구에서 못 이루었던 사랑의 해후로 실현될 것이다. 헤어졌던 두 개의 시간이 저마다의 미로를 지나 하나의 시간으로 다시 만나는 행복한 동시성이 영화 속에는 있다.
행복한 동시성은 아내의 유년 속에도 있다. 어린 시절 아내는 배밭집 딸이었고 그래서 유년의 기억 안에는 하얀 배 밭이 있다. 아내는 자주, 사는 일이 고단해지면, 유년의 배 밭을 즐겨 기억한다. 배를 따는 철이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어...라고 아내는 금세 소녀가 되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동그란 배들이 자꾸만 커지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배 밭으로 갔어요.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은 점점 따뜻해지고...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눈앞에서 두 장의 떠도는 사진을 본다. 한 장은 배를 따기 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어린 아내의 모습. 또 한 장은 아내를 기다리며 마지막 단물을 익히는 배 밭의 노란 배들. 하지만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떠돌던 두 장의 사진이 서로를 향해서 흐르기 시작하고 마침내 짝을 찾은 퍼즐 조각처럼 하나로 겹칠 때, 조그만 손을 내미는 어린 아내와 아내의 작은 가슴으로 굴러 떨어지는 농익은 노란 배들의 사진... 아무도 모를 거야, 아내는 꿈을 꾸듯이 말한다,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러나 행복한 동시성이 영화 속에만 있고 유년 속에만 있는 건 아니다. 불확실한 일상의 지층 밑에서도 동시성의 시간은 지하수처럼 흐른다. 깊은 바다 밑에서 역저류가 흐르듯 일상의 시간 밑에서 몽상의 시간은 흐른다. 일상의 시간이 불확실성의 시간이라면 몽상의 시간은 그 불확실한 시간의 밑에서 흐르는 확실성의 시간이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미래는 불안이지만 몽상의 시간 속에서 미래는 이미 실현된 행복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벌써 뜨거워진 사랑으로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몽상은 내가 소망하는 그것이 내가 바라는 그것으로 이미 실현되어 미리 존재하는 동시적 시간의 체험이다. 몽상은 미혹이지만 고래로 사람은 미혹의 힘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몽상은 정말 미혹일까? 아니면 몽상이야말로 ‘진짜현실’일까?
<연>: 어린 시절 나도 연을 날렸다. 연이 하늘 높이 오를 때 나는 연이 자랑스러웠다. 그때 사나운 연 하나가 날아와서 내 연을 감았다. 내 연은 허리가 끊어져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손 안에는 외로운 연줄만이 남았다. 날아간 내 연이 산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는 혼자 남은 연줄을 땅에 버렸다. 한나절 놀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황혼이었다. 보리밭 사이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빈손을 펴고 들여다보였다. 빈 손 안에는 마지막 연줄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 나는 울기 시작 했다. 이후 내게는, 혼자 있는 깊은 밤이면, 램프 아래서 주먹을 펴고 하염없이 빈손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첫댓글 김진영선생님이 비빔밥을 즐기시지 않는다니 이부분만은 저와 유전자가 비슷한거 같습니다.
어찌할 수없이 비빔밥을 먹을때면 그냥 비비지 않고 나물들 먼저 먹고 그다음 계란, 그리곤 남은
밥을 고추장찍어 먹곤 합니다.
이런 글을 쓰시는 걸 접할 때마다 김선생님이 사상가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깊은 감성의 미로를
들어내 보이는 문인이시라는것이 새삼 느껴집니다.
깊이 공감 하지만 저는 절대 표현할 수없는 유전자의 한계...
저두요... 학교식당 메뉴가 비빔밥이면 학교앞 분식집에서 라면을...
책!!! 책!!! 책!!! 저는 꼭 삽니다~적어도 학교 도서관에 구매신청합니다~ *.^
우리집은 비빔밥 천국입니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골고루 먹이는데 비빔밥처럼 좋은게 없는지라.. ㅋㅋ 채소는 거의 1mm로 채를 썰어 넣고.. 냉장고를 뒤져 나오는 넣을 만한 모든 재료를 생으로, 혹은 볶아서 넣고.. 남은 우엉조림의 남은양념이나, 씀바귀 무침의 양념 등.. 찌꺼기의 재탄생에.. 참기름과 참깨는 필수고.. *.^
ㅎㅎㅎ 개성이 강한 둘째는 정말 비빔밥을 싫어하더군요.. 그런데, 세월이 감에따라 ...하는수 없이 먹기 시작하더니(저역시 골고루 먹이는데..) 지금은 그 안에 있는 맛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논평하는 바람에 그 바쁜 아침에 엄마는 때로 짜증이 납니다. [예]오늘 소스에 후추를 넣은거야? -아니 생강즙맛이 후추 비슷하게 느껴지는 걸거야.
미로게임---두번 째 사람은 다름아닌 본인을 말하는 듯...
나이에 대한 명상---죽은자에게 주어진 시간이므로 마누라 말을 잘 듣는 듯..ㅎㅎ
이은주---내가 좋아하는 배우인데 이렇게 또 생각나게 해 주네요,,,이유야 어쨌든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건 지..
행복한 동시성---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몽상을 함부로 우습게 여기지마라...이런 뜻 인가요?
연-----걍 슬프네요..가끔 생각없는듯 손바닥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그게 생각이 없는게아니었군요..이런 심오함이?ㅎㅎ
이런 글엔 댓글도 조심히 달 수밖에 없군요. 서툰 감정 표현이 분명 나의 무지함을 초라하게 만들것이기에.. 김진영선생님 저 진짜 부탁인데요. 사석에서는 형님이라 부름 안될까요?
ㅎㅎㅎ
글은 서툴수록 심오 합니다..미로 에서 정해진 길을 찾지 않고 자신만의 심오한 길로 가듯이..
너무 다른 삶의 궤적,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김진영 집사님 표현)두분.. 그러나 비빔밥 처럼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창조 하는, 그 가운데 개성이 더욱 뚜렷 해 지는 두분의 이야기 같습니다..소년 시절 철학자가 꿈이 였습니다..언제 막걸리와 함께 한 수 지도 받고 싶습니다.
저도 낑겨 주십쇼. 장소는 故 이은주씨가 주연했던 영화 '오 ! 수정'에 나왔던 종로 피맛골 고갈비집이 어떠신지요.. 답글 | 수정 | 삭제
너무 다르죠ㅎㅎ..저는 음식물 잔량에 엄청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김진영씨는 음식도 미학이니..ㅠㅠ ㅋㅋ
피맛골, 거기 없어지지 않았나요? 감자탕집, 똥그랑땡 집 다 없어진 것 같던데... 그 옛날, 이유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 시계 맡기고 학생증 맡기면 술 주고 안주 주던 집들...
고갈비 전봇대집은 올해 초에도 갔다 왔습니다. 지난번에 가 보니까 주인 할머니께서 김진영선생님 학생증 찾아가라고 전해 달라시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무교동 쪽은 헐리고 종로 쪽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글에 대한 느낌은 달 용기가 안납니다. 근데, 댓글중 막걸리에만 눈이 갑니다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
현실을 잠시 접고, 몽환의 세계로 갑니다.~
몇 년전에 세상을 갑자기 뜬 지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뜬 후에 그의 웃는 모습 걷는 모습 등이 너무 생생해서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더군요. 내 마음속에 이렇게 살아있는데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좀 긴 이별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몽상이야 말로 진짜현실이 아닐까하는 대목에서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아침산책하며 일빠로 댓글 쓸 기회를 모기밥이되어서 이제서야 올립니다
1편보단 쬐끔더 이해가 가소그런지 더 재밌어요, 3편 아~3편 ㅎ
한 권의 수필집이네요~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