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내 삶의 자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우리는 공현 대축일과 주님의 세례 축일을 함께 기념하며 예배를 봉헌합니다. 공현절이 되면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원래 1월 6일인 공현절은 영어로 Epiphany로 그 뜻은 '나타남', '드러남'입니다. 공현절(Epiphany)은 공생애가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이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예수님 탄생 후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주로 기억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성인이 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건을 공현일에 포함시켜 함께 기념합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이 이 모든 세상의 구세주로, 만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현대축일을 맞아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 할 점은 ‘우리 삶의 어느 곳, 어느 지점에 하느님의 신성과 영광이 드러날 것인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 만방을 비추는 빛이며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드러난다면, 언제, 어느 지점에 드러날 것 같습니까? 내가 원하던 꿈이 이루어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두었을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시선>이란 제목의 CCM성가가 있습니다. 많이 알려진 성가라서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노래입니다.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 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들어보셨는지요? 이 곡의 끝부분은 이런 가사를 반복합니다.
“주님의 영광 임하네, 주 볼 때”
이 CCM 성가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김명선이라는 찬양사역자입니다. 그녀가 이 곡을 발표할 때가 2010년이었는데, 이 곡이 발표된 후에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어서 드디어 2015년에 첫 솔로 앨범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두 자녀의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담도암 4기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온몸의 80%에 암이 번져서 항암치료를 해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녀는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 병을 통해 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투병을 통해 분명히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굳게 믿고 항암 과정을 ‘영광 프로젝트’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남편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SNS를 통해 병상일지를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다 2016년 8월에 ‘승리에 대한 갈망’이란 글을 남기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잃고 두 자녀와 함께 세상에 남은 아내는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이게 뭡니까? 하느님께서 분명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남편을 데려가셨나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기도한 끝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죽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 드러나는 것이다.’
비슷한 경험을 저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과 관련된 경험입니다.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2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생 때입니다. 그 당시 학생회 여름수련회에 갔을 때 주제 성구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었는데, 그때 개역성경으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라는 이 말씀이 저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느 날 새벽기도 때에 남몰래 성직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이후 항상 저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새롭게 만난 것은 몇 년 전 피정을 갔을 때였는데, 몇 차례의 큰 수술과 항암치료 받고 공식적으로 휴직을 한 직후였습니다. 북수원에 있는 천주교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하는 중, 어느 날 새벽 피정관 앞 동산을 산책을 할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이사야의 오늘 말씀이 또 다시 강렬하게 제 뇌리를 뒤흔들었습니다.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2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얼마나 큰 은총이던지요! 몇 차례의 수술과 오랜 항암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저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감동이었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다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 엄청난 보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빛이 비쳐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놀랍게도 제가 가장 지쳐있을 때, 가장 밑바닥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저에게 임한 것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성탄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의 빛은 왕궁을 비추지 않고, 또 안락하고 화려한 방을 비추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마구간 위에 성탄의 별이 멈추었습니다. 소와 나귀가 머무는 곳. 짐승들의 냄새가 나는 곳. 더럽고 지저분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 그곳에 하느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러시아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넷째 왕에 관한 전설’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난 사람들은 동방의 왕들이었는데, 원래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왕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한 왕(카스파르)은 황금을, 다른 왕(발타사르)은 유향을, 또 다른 왕(멜키오르)은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넷째 왕(알타반)은 아주 값진 보석 세 개를 들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넷째 왕은 길을 가면서 끊임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거지 여인이 아기를 분만하여 아기와 함께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보석 하나를 주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남편이 죽어 장례를 치르는 아내와 자녀들을 만났는데, 남편이 많은 빚을 지고 죽는 바람에 자식들이 노예로 팔려나갈 처지였습니다. 그들에게도 보석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나 남은 보석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주어서 이제 그에게는 구세주에게 드릴 선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사람들을 돕느라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구세주를 만날 가능성이 아예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주인의 폭력에 반항한 죄로 노예선에 팔려 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 한 노예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보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넷째 왕은 그 노예 대신 자기가 노예선을 타겠다고 자청해 노예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세월이 30여년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그가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한 언덕에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더니, 그곳 언덕에 십자가가 세 개 세워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삼십 년 전에 자기를 인도해주던 별이 나타나더니 가장 밝게 빛을 발했습니다. 드디어 넷째 왕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넷째 왕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과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 전해내려오는 넷째 왕에 관한 전설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삶의 어느 곳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하십니까? 인간이 꿈꾸는 영광의 자리는 엄청난 조명과 찬사를 받는 자리입니다. 월드컵에서 결승골을 넣은 손흥민이나 리오넬 메시에게나 어울리는 자리입니다. 결코 마구간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마구간에서, 십자가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공현절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찬양받으실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벌거벗은 몸으로 죄인들의 행렬에 서시고, 아무 죄가 없지만 고개를 숙이고 죄인들이 몸을 씻는 곳에 몸을 담그셨을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딸이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기며,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네 스스로 너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존재 권리를 얻는 데 네가 스스로 대가를 지불할 필요도 없다. 내가 너를 좋아하므로 너는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네가 내 마음에 든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지금 있는 그대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이뤘을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느님께 숨김없이 맡기며, ‘주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할 때,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영광스럽습니까? 자랑스럽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나의 모습이, 우리 가정의 모습이,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숨기고 싶은 정도로 부끄럽고, 보잘것없다고 느껴진다면, 그래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마구간과 십자가에서 당신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의 모든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의 모든 모습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모든 모습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바로 그곳에서 주님 공현의 빛이 비추어 올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