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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흑백다방. 가보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학림다방이 있다면 진해엔 흑백다방"이라 하신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해군들의 로맨스와 추억이 묻어 있다는 그 공간에서 커피 향을 타고 클래식을 만끽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 문이 닫혔네요. 간판도 바뀌었습니다. 흑백다방을 운영하던 화가 유택렬 선생님이 작고한 뒤 따님 유경아 씨가 피아노 학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네요.
건물 모양은 그대로인데 더이상 커피 향기가 흐르지 않는 건 안타깝지만,,,
이곳을 추억하는 이들을 위해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 오후 6시에는 음악감상회와 피아노 연주회를 갖는다 하니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요. 관련 글과 기사 덧붙입니다.
1. 경향신문 칼럼
[이종민의 음악편지]흑백다방의 추억 한 자락 2010-04-22 17:57:37 ㆍ앙드레 가뇽의 ‘미완성 전주곡’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슬픔과 하나의 고독도 함께 깊어져야 한다.” 김병종 화백이 진해 흑백다방과 그 주인장, “허명(虛名)에 허기진 적 없던” 자유인 유택렬 화백을 기리며 맺은 말입니다. 요즘 천안함 침몰 여파 때문인지 진해 시절의 모습들이 소용돌이로 떠오르곤 합니다. 그 중심에 ‘진해 문화의 등대’ 흑백다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55년 출생연도가 같아서일까, 폴 매카트니의 ‘흑과 백’(Ebony and Ivory)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고전음악만 들려주던 그곳이 그런 음악에 아직 익숙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도 정겨웠습니다. 고전음악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곳은 만남과 휴식의 장소였습니다. 뭉그적거리며 ‘한 건’을 노리는 꾼들의 사냥터이기도 했고요. 월요일 해군사관학교 교수휴게실은 그곳에서의 주말 무용담으로 항상 시끌벅적했습니다. 1980년 해군장교 훈련을 받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5월18일 새벽 “너희 놈들 모두 광주에 침투한 무장공비의 총알받이야!” 난데없는 으름장마저 비웃으며 연병장에 나뒹굴기를 거듭하던 몇 주 후, 드디어 첫 면회가 있었으며 그 뒤로는 주말마다 상륙(외출)이 허용되었습니다. “너희 놈들이 대학교 대학원 나온 놈들이야?” 끝없는 언어폭력과 야만적 훈련방식에 단련이 되어서일까, 얼마 안되는 소위 월급, 영어과외로 충당하면 된다며(과외금지령으로 헛된 꿈이 됐지만) 겁 없이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이 다방에서 데이트를 즐겼었죠. 처음 그곳에 들렀을 때 다이아몬드 대신 속이 빈 육각형 모양의 계급장(‘벤젠’이라고 불렀던)을 단 채 걸음마저 어색했습니다. 그때 그곳에 귀에는 익은데 제목은 알 수 없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애인에게 차마 묻지는 못하고 다른 볼 일이 있는 척 DJ 박스에 다가가 슬쩍 확인해보니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습니다. 미완성의 벤젠을 위한 특별한 배려였나! 그 이후로 이 곡은 최고의 애청곡이 되었으며 미완성이라는 말 자체도 주술처럼 안겨왔습니다. 미완성의 아름다움. 그것을 채우기 위한 슬픔과 고독의 노력. 그곳을 오랫동안 지킨 화백의 “두 눈이 짓무르도록” 멈추지 않던 붓질이 바로 이것과 이어질 것입니다. ‘하면 된다!’의 군대식 구호 대신 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오히려 그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북극성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꿈이 아니다!’ 오기를 부리는 여유도 미완성의 묘미에 취한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흑백다방 자체가 미완의 터였습니다.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고유의 예술세계를 지켜낸 유택렬 화백, 그 뒤를 이어 이곳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온 피아니스트 유경아, 이들 부녀 또한 오늘에 안주하지 않는 미완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곳에 “숨어들”어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로 싸우는 가운데 시마(詩魔)와 부단히 씨름하던 정일근 시인이나 제대로 된 짝을 찾기 위해 몸을 사리고 기다리던 많은 청춘 사냥꾼들도 완성을 꿈꾸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미완은 꿈이 그만큼 드높기 때문이며 완성은 오히려 자만과 게으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 항상 부족함을 인정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해온 높은 꿈의 이들 모두를 위해, 응원가 하나 띄웁니다. 앙드레 가뇽의 ‘미완성 전주곡’이라는 매우 서정적인 곡입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만나 만들어내는 풍성한 화음, 그 아름다운 비애에 젖다보면 섣부르게 완성을 자임하며 안주하는 일도 미완을 탓하며 한숨짓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 곡의 슬픈 아름다움을 빌려 날벼락으로 미완의 삶을 강요당한 천안함의 젊은 후배들의 명복을 삼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빌어봅니다. 이종민 | 전북대 교수·영문학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221757375&code=990000
======================================================================================================================== 2. 한겨레 '진해 걷기여행' 소개 기사 인터넷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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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삶따라] 벚꽃 도시의 숨은 얼굴은 꽃그늘 안쪽에
2011/02/24 16:38
진해 도심 걷기
일본에 의해 일본을 위해 지어 일본인들만 살아
연인 단둘이 사랑 싣고 ‘1년 계단’을 모노레일로
벚꽃과 해군의 도시 경남 진해. 지난해 7월 행정구역 통합으로 창원시 진해구가 됐다. 해마다 3월 말~4월 중순이면 만개한 벚꽃 감상 인파가 거리를 메운다. 진해의 진면목은 꽃그늘 속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35만 그루의 벚나무와 해군부대 그림자 안쪽에 진해의 볼거리들이 숨어 있다.
진해는 1912년 일제가 건설한 군항 도시다. 애초 일제는 조선시대 ‘진해현’에 속하던 마산 외곽지역의 진전·진동·진북 일대에 군항 배후도시를 계획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는 ‘세계 최대 최고의 전략적 군항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현 장복산 자락(옛 완포)에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이 때 애초 계획지였던 ‘진해’ 이름을 그대로 갖고와 새도시 이름으로 삼았다. 진해(鎭海)가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이니, 더 좋은 이름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이 지역 중심 주거지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웅천이었다.
중공군 포로 출신이 연 중국집 영해루의 운명
일본에 의해 일본을 위해 건설돼 일본인들만 살던 도시다. 진해 옛도심을 둘러본다. 일제 야욕도, 치욕도 세월이 흐르니 문화유산이다. 진해 공설운동장에서 출발해 중원팔거리(중원로터리)와 제황산(부엉산·두엄산)·여좌천(한내·큰내) 거쳐 다시 팔거리로 돌아온다. 깔리고 널린 일제 흔적에 숨이 막혀올 무렵, 백범 선생과 이순신 장군이 나타나 발걸음을 다잡아준다.
진해공설운동장은 군항제 때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이다. 주변 도로변 주차장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운동장네거리에 차를 대고 중원팔거리를 향해 걷는다. 도로도 주택지도 모두 일제 때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다. 겹처마 지붕의 2층 집들이 즐비한데, 모두 일본식 가옥의 흔적들이다. 이 집들에 든 상점은 대개 해군 군복집, 선체 재료집, 부대 마크·명찰집, 군복 전문 세탁소 등 부대 관련 가게들이다. 복개된 여좌천에 조성된 조각공원을 둘러보며 하류 쪽으로 걷는다. 뾰족집 누각이 남아 있는 식당(새수양회관) 건물은 1920년대 지어진 중국식 건물이라고 한다. 남·북으로 두 채가 지어져 요정으로 쓰였다고 하나, 지금은 한 채만 남아 있다.
길 맞은편에 오래된 중국집 원해루가 있다. 육이오 때 중공군 포로 출신 장아무개씨가 1950년대 중반, 영해루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중국음식점이다. 그뒤 지금의 주인(화교)이 인수해 같은 이름으로 운영해오다 6년전 이름을 원해루로 바꿨다고 한다. 바꾼 연유를 물으니 안주인 박재기(76)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한때 식당을 세를 줬어요. 근데 세입자가 몰래 상표등록해서 갖고 나가 영해루를 차린 거예요.” 그러나 그 영해루는 얼마 뒤 망했고, 시민들은 다시 ‘원 영해루(원해루)’를 찾아와 얼큰한 짬뽕과 탕수육을 즐긴다고 한다.
백범이 쓴 이충무공 우국시 친필 빗돌
거리엔 온통 벚나무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일제는 도시를 만들 때 10만여 그루의 벚나무를 군항과 시내 거리에 심었다. 광복 뒤 일제 잔재라 하여 대부분을 베어냈으나, 진해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임이 알려지면서 1976년 이래 다시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남원로터리 쪽으로 걷는다. 복개된 여좌천 좌우로 이어지는 집들 사이에서 어렵잖게 일본식 집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여좌천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실개천이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일제는 군항의 배후도시로 진해시를 건설할 당시, 일본 해군 군함기를 본떠 방사상 거리를 구획했다고 한다.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여덟개의 도로를 건설하고 남북에 남원·북원로터리를 만들었다. 이 때 굽이치며 흐르던 하천을 직선화해 깃대를 형상화했다고 알려진다. 진해구 문화관광해설사 한수익(76)씨는 “당시 새도시엔 일본인만 살도록 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화동 등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났다”고 말했다.
남원로터리 한가운데 우뚝 선 돌기둥을 만난다.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을 새긴 빗돌이다. 이충무공이 지은 우국시 ‘진중음’의 한 대목인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천에 맹세하니 초목이 뜻을 아는구나’를 새겼다. 백범이 광복 뒤 귀국해 남부지역 순시 때 첫 방문지로 진해를 찾아 해군 장병을 격려하며 남긴 글이라고 한다. 애초 북원로터리에 세워졌는데, 이승만 대통령 재임기간에 진해역 앞으로 옮겼다가 하야 뒤 이곳으로 옮겼다.
옛 도심의 중심, 중원팔거리로 간다. 일제 때 이 회전교차로를 중심으로 지어졌던 경찰서·우체국 등 관공서와 금융기관들 흔적이 남아 있다. 1913년 개점한 한국상업은행 진해지점 터(우리은행 자리)와 진해경찰서 터를 보고 옛 시립중앙도서관(현 진해문화원)을 만난다. 문화원 앞에 기념물이 하나 있다. 한때 전국에 세워졌다가 거의 철거된 ‘10월 유신 탑’(1973년)이다. 이런 것도 살아남아 유산이 돼가고 있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온다. 우체국 건물은 1912년 세워져 2000년까지 진해우체국 청사로 쓰인 러시아 양식 건물이다. 우체국이 들어서면서 주변 동 이름은 통신동이 됐다.
북쪽을 가로지르는 장복산 줄기는 백두대간 정기가
제황산으로 오르는 계단 옆엔 일제 때 판 방공호(입구 폐쇄)가 있다. 진해탑(높이 28m)이 솟은 제황산공원(해발 90m)으로 오른다. 주민들이 ‘1년 계단’으로 부르는 365개의 계단이 있는데, 요즘은 모노레일(길이 174m·2009년 설치)을 타고 오르내린다. 편도 2000원. 군항제 땐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한다지만, 평소 주말엔 쌍쌍의 젊은 남녀가 주류다. 예약하면, 하루 1건(겨울 19시·여름 21시)에 한해, 연인 단둘이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 ‘사랑의 프러포즈’ 이벤트를 이용할 수 있다. 실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케이크도 주고, 축하영상도 틀어준다. 5만원.
젊은 짝들은 진해탑에서 진해 발굴 유물들과 옛 지도 등이 전시된 2층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전망대로 올라 장쾌하게 뻗은 장복산 줄기와 시가지, 바다쪽 전망을 감상하며 재잘거린다. 진해탑 자리엔 일제강점기 러일해전 승전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광복 뒤 이를 헐고 군함을 상징하는 9층짜리 탑을 세웠다. 밤엔 색깔이 수시로 바뀌는 조명을 쏘아 멀리서도 잘 보인다. 탑 현판 ‘진해탑’은 박정희 글씨다.
제황산은 부엉이산 또는 두엄봉으로도 불린다. 해설사 한수익씨는 “부엉산은 부엉이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 형상으로, 풍수지리학상 산 왼쪽에서 황제가 나타날 산으로 알려져 왔다”며 “부엉이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일제가 그 머리를 쳐버리고 자기들 승전 기념탑을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씨에 따르면 진해 북쪽을 가로지르는 장복산 줄기는 백두대간 정기가 흐르는 길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남남정맥의 주봉인 무학산(마산)을 거쳐 장복산으로 뻗는데, 이 정기는 다시 동쪽 천자봉으로 흐른 뒤 김해와 가덕도를 거쳐 거제도까지 갑니다. 그리고 거제도 계룡산에서 바다 밑으로 정기가 이어져 대마도까지 가지요. 지맥으로 볼때 대마도는 한반도 땅입니다.”
육이오 땐 230명이나 되는 고아들 돌본 희망원
철봉도 하고 훌라후프도 돌리는 주민들 체육공원 거쳐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내려간다. 열린 철문 두 곳을 지난다. 일제 때부터 해군 통신기지가 자리잡은 곳으로, 최근에서야 산길의 일반 차량 통행을 허용했다고 한다. 마을길로 접어드니 바람은 잠잠하고 햇살은 따스해 벌써 봄기운이 느껴진다. 남산초등학교 옆 산자락에서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어르신을 만나 잠시 쉰다. “상추 심글라꼬. 날이 이래 따시모 (싹이) 대번에 올라오구마. 인자 3월 넘어가모 사꾸라도 몽우리질끼요.”
‘큰 꿈을 가꾸는 창의적인 어린이’를 키우는 남산초등학교 지나 무학맨션 옆에서 진해 희망의 집(희망원)으로 들어간다. 1946년 이약신 목사가 꾸린 고아원으로, 육이오 땐 230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이곳에서 돌봤다고 한다. 진해의 근대문화유산에 애착을 갖고 역사문화 관광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는 김현철(57·진해구 웅동 김씨박물관 관장)씨는 “현재 비어 있는 희망원 옛 예배실을, 육이오 당시 자료와 물품들을 전시하는 ‘피난살이 박물관’으로 꾸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희망원 옆 세종어린이집 주변은 일제 때 신사와 관리사가 있던 곳이다.
진해남부교회 쪽으로 길 건너, 건물과 정원 등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일제 해군병원장 사택을 만난다. 원형이 잘 보전돼 근대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집이다. 지금은 식당(선학곰탕)으로 쓰인다. 일본식 2층 집들이 7~8채 이어지는, 미화머리방·황해당인판사를 지나 길 건너 다시 모노레일 매표소 앞을 걸어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주말이라 여기저기서 제복을 입은 해군 사병들 모습이 눈에 띈다.
중앙시장은 진해 서부지역 상권을 대표하는 상설시장이라지만, 옷상가도 지하 횟집들도 분위기는 썰렁하다. 옛 진해시청(현 진해구청)과 행정기관들이 동부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상권이 쇠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피시방·노래방·당구장과 휴대폰 판매점만 즐비한 화천상가 거리를 지나 진해역으로 간다. 진해역사는 1926년 진해~창원선이 개설되면서 지은 건물. 당시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옛 역전 여인숙 느낌이 나는 ‘심야온돌 주야온수 충무여인숙’ 간판을 뒤로 하고 여좌천 상류 쪽을 찾아간다.
문화사랑방 옛 흑백다방, 딸이 이어받아 피아노연주회
상류 쪽은 벚나무 우거진 일직선 실개천 모습은 중·하류쪽과 마찬가지되, 복개를 하지 않고 물줄기를 따라 나무판을 깔아 산책로를 만들었다. 난간을 따라 이충무공 시들과 진해 옛모습 사진, 지명유래 설명판 등을 걸어놨다. 여좌천이나 여좌동 이름은 여명리와 좌천리가 합쳐지면서 나온 것이다. 여좌천 상류로 나무데크 산책로를 따라 10여분 오르면 내수면환경생태공원이 있다. 봄·가을 호수에 비친 꽃과 단풍이 매혹적이라고 한다.
드라마 ‘로망스’ 촬영장소(2002년)라는 로망스다리를 보고 돌아내려와 진해여중고 앞을 지난다. 90년 역사를 가진 진해여고 운동장에선 학교 양궁선수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과녁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매가 매서운데, 지도 선생님은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이다. “그기 아이다. 첫사랑에 필이 꽂힌 듯이 과녁에 집중하면서 부드럽게 손가락을 끌어당기라 말이다.”
벚나무 도열한 학교 앞 거리를 걸어 ‘미 고문단’ 부대 앞을 지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선 북원로터리에 이른다. 1952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이충무공 동상이라고 한다. 장군은 의연하게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섰는데, 동상 뒤 편의점 앞엔 한 어르신이 앉아 쉬신다. “이 길도 로타리도 다 왜눔들이 맨들어논 기요. 나쁜 눔들이지만 딴건 몰라도 왜눔들이 길 하나만은 잘 닦아논 기라.” ‘왜눔들’이 닦아놓고 오가던 길을 걸어 다시 ‘왜눔들’이 만든 여좌천을 건너 중원로터리 쪽으로 걷는다. 여전히 벚나무들 행렬 사이로 군인용품 가게, 군복세탁소 등과 식당들이 이어진다.
중원로터리에서 걷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옛 흑백다방이다. 과거 흑백다방 하면, 어르신도 젊은이도, 해군 병사도, 가정주부도 나그네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는 진해의 명소다. 1955년 개업한 칼멘다방을 류택렬 화백이 인수해, 60~70년대 진해의 문화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낸 고전음악 다방이다. 지금은 차는 팔지 않지만, 딸 유경아씨가 피아노 레슨·연주공간으로 꾸며 개방하고 있다. 매달 첫째·셋째 토요일 저녁 6시에 각각 음악감상회와 피아노 연주회가 열린다.
중원팔거리 가운데 잔디광장엔 일제 때 600년 묵은 포구나무(팽나무)가 한그루 있었다고 한다. 나무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섰던 분수대도 철거됐다. 지금은 군항제 행사의 중심 무대로 쓰인다. 여기까지 4.5㎞쯤 걸었다.
진해(창원)/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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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맛있는 여행' http://foodntrip.hani.co.kr/board/view.html?board_id=fnt_trip1&uid=220 |
첫댓글 얼른 돈 모아서 찻집하면서 우아해지고 싶습니다. 아직은 롤 모델이 뚜렷하지않지만 생각해보니 흑백다방에 가까울 듯 하네요 ^^ 저도 예전에 문 닫은날 간 기억이 나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