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유기미(狐濡其尾) - 여우 꼬리가 물에 젖다, 시작은 쉬우나 마무리가 허술하다.
[여우 호(犭/5) 젖을 유(氵/14) 그 기(八/6) 꼬리 미(尸/4)]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거들먹거리는 狐假虎威(호가호위)에서 보듯 여우는 교활의 대명사다. 교활한 사람을 비유하는 대명사이기도 한데 九尾狐(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로 살살거리는 여성을 지칭했다. 꼬리에 관한 성어는 龍頭蛇尾(용두사미)나 狗尾續貂(구미속초)처럼 보잘것없는 마무리를 뜻한다. 다른 동물의 속담도 보자. ‘개 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 되지 않는다(三年狗尾 不爲黃毛/ 삼년구미 불위황모)’, ‘노루 꼬리가 길면 얼마나 길까(獐尾曰長 幾許其長/ 장미왈장 기허기장).’ 그런데 몸매가 날씬한 여우는 주둥이가 길고 뾰족한데 비해 꼬리는 굵고 길어 그럴 듯해 보인다.
꾀주머니 여우라도 꼬리는 거추장스럽다. 여우의 꼬리가 물에 젖는다는 이 성어는 크고 탐스러운 모양으로 거창하게 일을 벌였다가 낭패를 당하는 것을 말한다. 여우는 머리가 가볍고 꼬리가 무겁기 때문에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꼬리를 얹고 건너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건너는 도중에 힘에 부쳐 꼬리가 젖게 되면 몸 전체가 가라앉게 된다. 모양 좋게 일을 떠벌여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까지 마무리를 잘 하기는 어렵다. 재주가 별로 없으면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맡아 끙끙거리다가 중도 포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됐다. ‘史記(사기)’의 春申君(춘신군) 열전에서 인용하는 말이 나온다.
戰國四公子(전국사공자)의 한 사람인 楚(초)나라의 춘신군은 본명이 黃歇(황헐)로 유일하게 왕족 출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학하고 담력이 있으며 변설에도 능해 초왕은 그를 중용했고 주변국에 위력을 떨치는 秦(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알아챈 춘신군은 진왕에게 글을 올렸다. 위력을 믿고 주변국을 차지하려는 마음을 억제한다면 仁王(인왕)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후환이 두렵다며 이어진다.
‘시경에 시작하는 자는 적지 않으나 끝이 좋은 자는 드물다고 했고(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시왈 미불유초 선극유종), 주역에는 여우가 물을 건너려면 그 꼬리를 적신다(易曰 狐涉水 濡其尾/ 역왈 호섭수 유기미)고 했습니다.’ 靡는 쓰러질 미.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비유였다. 옳다고 여긴 진왕은 출병을 중지시켰다.
여우가 물에 들어가기는 쉬워도 빠져나올 때는 큰 꼬리에 물이 많이 묻어 힘이 든다. 큰일을 시작하려면 자신의 능력을 먼저 알고, 주변에 미치는 영향까지 세밀히 분석한 다음 착수해야 실패하지 않는다. 인기만 믿고 그럴 듯한 명분으로 섣불리 달려들었다가 나중에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 나온 용의 무서운 머리가 뱀의 가느다란 꼬리로 변한다는 것이나, 태산이 울리더니 쥐 한 마리 나온다는 泰山鳴動鼠一匹(태산명동서일필)이나 모두 시작을 잘못하여 생겨난 일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