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재외동포문학상 수상작
외교통산부 재외동포재단에서 실시하는‘제14회 재외동포문학상’선정 작품, 청소년 글짓기 부문 중고등부 최우수상 박준상(북경한국국제학교12년)군의<'저격능선 전투' 보다 먼저 알아버린 '상감령'>과 초등부 최우수상 조선족 어린이 신유니 양의 <중간선>을 특별게재한다.
중고등부 최우수상 - 박준상
'저격능선 전투' 보다 먼저 알아버린 '상감령'
살다보면 누군가를 만나고, 어떠한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그러한 평범한 일상가운데서 발생한 만남이나 사건이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이나 가치관, 인생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5월, 4살배기에 불과한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고, 아버지 홀로 계시던 중국 북경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위해 부모님이 대만에서 유학 할 당시 사용했던 소품까지도 꼼꼼히 챙기셨다.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인 천진항에 도착한 여객선에서 옮겨 실은 이삿짐은 우리가족을 태운 미니버스를 가득 채웠고 북경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던 자그마한 집을 발 디딜 틈도 없게 만들었다.
나의 중국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북경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단 한마디의 중국어도 못하는 상태에서 중국 유치원으로 보내졌고, 매일같이 울었다. 한없이도 서럽게 울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을 중국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호소할 방법이란…그저 목청껏 울어대는 것뿐이었다.
울보라는 별명으로 중국생활을 시작한 내가 3년 뒤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 무렵까지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 당시의 기억들로 인해 새로운 초등학교 환경을 접하는 것이 매우 두려웠다.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에 중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고 중국 아이들과 중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그렇게 중국 초등학교를 다니는 와중에, 유일하게 나의 흥미를 유발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어문(중국어, 한국의 ‘국어수업’에 해당)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주는 암송숙제였다. 어문 시간 때 선생님은 어문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암송해오라고 숙제를 내주곤 했다. 이러한 숙제를 내주는 시점이 암송숙제를 내준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 수업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굳이 수업시간에 열심히 듣는다는 티를 내지 않아도, 급우들과 교류를 하지 않아도 암송 숙제는 얼마든지 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열심히 외워간 내용을 수업시간 때 선생님과 급우들 앞에서 멋지게 연출해냈을 때, 그들의 놀란 듯한 표정을 보며 자리에 새침하게 앉는 순간 전해지는 카타르시스는 중국어로 된 문장을 외우느라 고생한 나의 노고를 충분히 보상해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어문시간, 황지광(黃繼光)이란 인물에 대한 작품을 접했다. 비록 실력이 충분하지 않아 작품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까지 배웠던 여러 항일전쟁 혹은 중국의 내전과 관련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은 극적이었고 등장인물의 희생정신과 영웅적 행위는 용맹무쌍했다. 그리고 나는 황지광이란 ‘영웅’이 작전성공을 위해 온몸을 내던져가며 ‘적군’벙커의 기관총 총구를 막아서는 내용을 열심히 외웠다. 일말을 감동까지 느껴가며…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께서 나를 지목해 일으켜 세우기를 기대하며 오른팔을 높이 들고 선생님을 쳐다보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선생님은 나를 외면하셨다.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을 집어 던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신 아버지가 물으셨다.
“오늘은 어문교과서 암송 숙제가 없니?”
“있는데 하기 싫어요.”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어문 책을 펴보시고 중국 교과서에 소개된 항미원조(抗美援朝: 6ㆍ25 전쟁 때 미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지원하던 중국의 외교 정책) 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을 지칭하는 것이며, 상감령(上甘嶺) 전투는 휴전을 앞둔 1953년 여름 동부휴전선 부근의 치열했던 전투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다.
꿈에도 몰랐다. 그날 배운 텍스트에 나온 ‘상감령 전투’가 우리 한민족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때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텍스트에 나오는 ‘포악하고 극악무도한 적군’이 대한민국 국군이라는 것을…수업시간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암송을 함으로써 흡족해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감탄하는 급우들의 얼굴을 보고자 애썼던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황지광이란 ‘영웅’이 등장하는 텍스트에는 ‘항미원조’ 혹은 ‘지원군’이라는 정확하게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용어만 나왔지 초등학교 3학년짜리 한국 학생이 알만한 ‘북한’, ‘남한’, ‘6‧25전쟁’ 등의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나 자신을 위로해보려 했지만,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나의 알량한 허영심과 자존심에 대해 깊이 반성했고, 그날의 사건을 ‘상감령의 굴욕’이라 명명하는 동시에 굳게 다짐했다. 중국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다양한 지식을 쌓아 다시는 무지함으로 인한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였지만, 이러한 사건을 겪고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예전과 같은 태도로 중국생활을 하기에 나의 정체성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북경으로 왔을 때부터 거실 벽면에 자리 잡은 가족사진 옆에 걸어둔 액자 태극기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온 가족이 국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함께 불렀던 하루하루가 모여서 내 마음 한 구석에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건이 있고부터 중국 아이들을 이기겠다는 마음이 상승함과 동시에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한국 동화책은 물론 한국역사책을 읽기 시작했다. 토요일 마다 한글학교 도서실에 들려 책을 빌리는 습관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우리 가족에게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유럽여행을 드디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기대감과 흥분에 부풀어 유럽 여행 계획을 세우던 무렵 한국의 한 교회에서 한국 동부휴전선 일대로 안보견학을 갈 청소년들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문제는 안보견학 일정이 우리의 유럽여행 일정과 제대로 겹쳐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동부휴전선 안보견학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나를 설득하려 하는 형의 회유를 뿌리치고 안보견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확고한 의지를 보자 형도 끝내 설득을 포기했다. 오랜 기간 빈틈없이 세워온 유럽여행 계획도 함께…
우여곡절 끝에 철원으로 떠나게 된 안보견학. 군부대가 즐비한 철원 시내로 들어선 순간부터 정신적 충격은 시작되었다. 4살 때 떠난 나의 조국에, 평화롭기만 한줄 알았던 나의 조국의 한 자락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철책과 평화전망대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북한 초소; 동식물에게는 최적의 자연생태계이지만 사람에게는 바라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야 하는 황량한 비무장지대;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야욕과 그들의 음모를 간파한 자랑스러운 호국 선열들의 충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제2땅굴; 분단의 아픔과 역사가 피부로 와 닿았던 월정리역…
그러나 나에게 정수리에서 발끝까지의 전율을, 한동안 나를 쇼크 상태에 빠지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반항기 가득하던 나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의 발단인 문제의 어문교과서 텍스트, 그 텍스트에 등장했던 ‘상감령 전투’가 바로 내가 견학한 철원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는 ‘저격능선 전투’로 불리는 ‘삼강령 전투’가 55 년 전에 발생한 곳에서 나는 숙명적인 필연을 경험했다.
중국으로 오지 않고 내 또래들처럼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상감령의 굴욕’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 아이들을 이기겠다는 열정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한국 역사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역사관 차이에 대해 지금처럼 관심을 가졌을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철원으로 안보견학을 갔었다면 어떠했을까?
‘문제의 텍스트’를 암송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그 현장에 올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거니와 ‘상감령’이라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6년이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니 과거에 ‘우연’처럼 나타났던 사건들이 현재와 교묘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에는 우연보다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더욱 많이 존재한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당시에는 ‘상감령’이 나의 인생에 있어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삼감령’ 사건 이후로 나는 역사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나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 나의 미래설계에 커다란 나침반이 되어가고 있음을 말이다.
@동포세계신문 제273호 2012년 7월 20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