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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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木瓜)
늦가을이다. 낙엽 떨어지는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장미향처럼 화려하지도 재스민 향처럼 은은하지도 않지만
모과가 내는 상큼하면서도 그윽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향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내 고향 지리산 기슭 어디 쯤,
신작로 사거리 경찰서 앞에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나를 기다리며 서있다.
어린 시절에 이 나무를 보며 자랐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이 나무를 찾곤 한다.
따가운 여름날에 햇살을 받으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늦가을 서리가 내리도록
모진 태풍과 천둥을 이겨내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남다른 모성애와 의지의
화신 같은 나무. 옛날 우리 어머니들처럼 다산의 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모과는 열매에 대한 애착이 유난하다.
사과나무나 배나무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가지를 잡고 비틀어야 열매를 딸 수
있으니 말이다. 자식이 장성해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어미와 닮아 있다.
모과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교목이다.
5월에 피는 연분홍색의 꽃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눈에 뜨일 듯 말 듯한 작은 꽃잎은 수줍은 아가씨 같다. 그런데 이 예쁜 꽃자리에
선머슴 같이 투박한 모과가 열린다. 마치 예쁜 딸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오죽 못생겼으면 과일전 망신을 시킨다고 핀잔을 주었겠는가.
게다가 속까지 단단하고 까끌까끌하며 시큼하고 떨떠름하니 망신을 당할 만도 하다.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성격이 뒤틀리고 순순하지 못한 사람을‘모과심사’라고 했으니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모과에게도 격이 있다면 모르긴 해도 속상하지 않을까.
모과는 꽤 괜찮은 과일이다. 나무의 목질은 치밀하고 단단하면서도 광택이 나고
또 연해서 바이올린의 활이나 아름다운 화초장을 만드는데 쓰이니 말이다.
또한 열매는 기침과 기관지염, 이질, 관절통에 효과가 있으니
이만하면 쓸 만하지 않은가.
맑은 가을날, 높은 가지에 매달려있는 모과를 보면 마치 노란 참외들이 두둥실
떠있는 것 같다. 달 밝은 밤에 잘 익은 모과가 바람결에 날리는 잎새 사이로
달과 별과 밀담을 나누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샛노랗게 진하지도, 흐릿하게 묽지도 그저 환한 노랑이 서정적이다.
제멋대로 생긴 것도 개성이 있어 좋다. 그래서 가을 화폭의 정물화에 단골손님으로
초대되나 보다. 또한 모과의 껍질은 노란색, 속은 미색, 씨앗은 짙은 밤색이니
늦가을의 정취를 살리는 조화로운 색이지 싶다.
누가 뭐래도 모과는 향으로 진가를 발휘하는 과일이다.
새콤한 듯 달콤한 듯 그러면서도 그 묵직한 향은 멀리 날아간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끈끈한 점액이 오직 냄새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향기는 물안개처럼 아련하게 옅어진다.
오히려 그 연한 향기가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향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맡는 향기이며 이미지로 그려지는 향기이다.
그래서 샛노란 레몬향이 가볍고 상큼하여 감각적인 십대 소녀의 향이라면
모과 향은 사오십 대의 무르익은 여인의 향이라고나 할까.
모과는 상처가 많을수록 향기가 진하다. 이는 굴곡진 삶만큼 고난의 두께가 쌓여져
향이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모과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 거뭇해지고
모양이 일그러져 숨이 사그라질 때까지 향을 내뿜는다.
모과로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향기를 놓지 않는, 진정 우리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과일이다. 생긴 모습 그대로 자신을 위해서는 다듬지도 가꾸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식을 위해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진다.
요즈음 모과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도시인들이 자연의 향에서 위안을 받는다는 힐링 향인 것이다.
겉만 번드레한 세상에 겸손으로 헌신하는 모과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주는 것은 아닐는지.
유리단지 속에 켜켜이 재어둔 과육을 꺼내 모과차를 끓인다.
집안 곳곳에 상큼한 모과향이 스민다.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 촉촉이 적셔드는
이 오묘하고도 깊은 맛, 혀끝에 착 감기면서 사르르 머무는 맛이 감미롭다.
향이 내 안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모과의 향에 취하고 맛에
취하고 빛깔에 취하고 그러면서 순박한 그 느낌에 취한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한 알의 모과에 담겨 있다.
<'아리모'(아름다운 리더들의 모임(아리모)'회장, '才能시낭송협회' 시낭송가,
에세이스트/부군은 최영길 명지대 명예교수(아랍語)>
#2 듣는 이 모두를 감통시켰던 名시론(詩論)
윤성옥
‘쟈콥’에서 행하신 방장님의 ‘시론’은
낭송을 즐겨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렸으리라 믿습니다.
“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귀로 들으면 이렇게 잘 들리는데,
우리는 시 공부를 잘 못 했던 것 같다“시던 방장님의 말씀은
그 시를 노래하듯 낭송하고 싶어 하는 제겐 용기였습니다.
방장님의 말씀 가슴에 새기고 청중들의 귀에 가슴에 스며드는 낭송을 하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10월에 마지막 밤에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윤성옥/재능시낭송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