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반에 놓인 수석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특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 돌은 마치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멍하니 외면하는 사람의 옆얼굴을 닮았습니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연을 삼킨 채 묵묵히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이 못내 애처로워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수반을 조금만 돌려 각도를 바꾸면, 방금까지 보이던 그 절박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무미건조하고 단단한 바위의 질감만이 남습니다. 관찰자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이 돌은 애틋한 서사가 되기도 하고 차가운 무생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돌을 보며 문득 거실에서 들려오던 아내의 기침 소리를 떠올렸습니다. 나는 남편으로서 그 소리에 담긴 고통의 서사를 읽어내야 했을까요, 아니면 의사로서 그 현상의 데이터를 분석해야 했을까요. 그날 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진단이라는 이름의 차가운 각도로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독감에 걸려 앓아누운 밤, 거실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한 기침 소리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남편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당혹감이나 안쓰러움 대신, 내 머릿속을 채운 것은 차가운 데이터의 나열이었습니다. ‘체온 38도, 근육통 동반, 전형적인 인플루엔자 증상으로 독감검사로 양성이 나와 타미플루 복용. 며칠간의 잠복기를 거쳤을 것이고, 적절한 항바이러스제와 수액 요법이면 일주일 내에 호전될 예후. 집에서 링거주사 맞히면 되겠고 폐렴까지는 가지 않을듯.'
그것은 진단이었고, 분석이었으며, 논리였습니다. 아내가 내민 것은 고통의 신호였으나, 내가 수신한 것은 처리해야 할 과제였지요.
"병원 가서 약 먹으면 나아. 죽을 병 아니니까 걱정 마."
'괜찮아 박사'인 내 입에서 나간 말은 사실(Fact)이었겠으나, 아내의 눈에 맺힌 것은 서운함이라는 감정의 파편이겠지요. 나는 왜 사랑하는 이의 신음 소리 앞에서도 이토록 무미건조한 ‘의학적 관찰자’로만 남게 된 것일까요.
의사라는 직업은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훈련의 연속입니다. 수련의 시절부터 우리는 환자의 비명을 감정으로 듣지 말고, 신체의 오작동을 알리는 알람으로 해석하라고 배웁니다. 고통에 매번 함께 전율한다면, 매일 마주하는 수십 명의 환자 앞에서 메스를 든 손은 떨릴 수밖에 없겠지요. 결국 생존을 위해 우리는 마음에서 ‘감정’이라는 기름기를 쫙 빼버립니다.
마치 살코기에서 지방을 떼어내듯, 고통이라는 현상에서 슬픔과 공포를 제거하고 나면 오직 ‘병증’이라는 순수한 육질만 남습니다. 나는 그것이 의사로서의 숙련도라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칼날은 어느새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들어, 아내의 눈물을 ‘안구 건조를 막기 위한 생리적 반응’이나 ‘심리적 보상을 바라는 퇴행적 행위’로 치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나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닙니다. 의사 커뮤니티와 의사들의 수필들을 살펴보면, 나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의 기록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많은 의사가 환자의 죽음이나 고통에 무뎌지는 자신을 보며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자책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는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사물이나 ‘케이스’로 대하게 되는 심리적 방어 기제입니다. 특히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가 극에 달하면, 뇌는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차단하기 위해 공감의 스위치를 꺼버린다고 합니다. 아내의 고통에 무덤덤한 것은 내가 차가운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직업적 전장에서 입은 보이지 않는 외상 후 스트레스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사건’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도 있습니다. 타인이 아파할 때 그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나’의 세계 안에서 대상을 소유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진정한 공감은 분석을 멈추고 그 고통의 자리로 내려가 함께 거하는 것이지요.
의학적 예후를 안다는 것은 ‘안심’을 줄 순 있지만, ‘위로’를 줄 순 없습니다. 삶은 증상과 증후의 합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무미건조하지 않은, 때로는 비논리적이고 호들갑스러운 감정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생의 향기’입니다. 감정이라는 지방을 제거해도 고기의 성질(단백질)은 같을지 모르나, 그 고기를 구웠을 때 풍기는 풍미와 온기는 사라지고 마는 것과 같은거지요.
기이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의 고통에는 그토록 분석적인 내가, 책상 위 수반에 올려둔 수석 한 점 앞에서는 한없이 깊은 상상에 잠긴다는 사실입니다. 수만 년 물살에 깎인 돌의 홈을 보며 나는 그것을 상처가 아닌 ‘길’이라 부르고, 깨진 모서리를 좌절이 아닌 ‘변형의 미학’이라 예찬합니다. 생명 없는 돌의 침묵에는 온갖 서사를 부여하면서, 정작 살아있는 아내의 신음에는 왜 이토록 인색한 것일까 스스로 묻게 됩니다. 혹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도 말이지요.
어쩌면 돌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돌은 열이 오르지도, 나를 원망하지도, 내 손을 잡아달라고 보채지도 않습니다. 나는 안전한 거리에서 마음껏 자애로운 시선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고통은 다릅니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라 ‘관계’를 요구합니다. 설명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시간을, 차가운 예후가 아니라 체온이 닿는 손길을 요구합니다. 그 실존적인 요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서툴기만 합니다.
좌대를 다듬을 때 나는 돌과 맞추기 위해 모서리를 깎고 높이를 조절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받침을 덧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나 자신의 거친 면은 그대로 두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환자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단단해진 내 마음의 표면이, 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마저 밀어내는 차가운 암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의사로서 나는 아내의 병을 ‘곧 좋아질 가벼운 질환’이라 판단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정답일지 모르나, 남편으로서는 오답이었습니다. 아내가 원한 것은 ‘옳은 말’을 하는 의사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씩 깨닫습니다.
감정의 기름을 빼내는 훈련을 너무 오래 한 탓에, 나는 이제 불이 잘 붙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의 상처를 시간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상상력이 내게 남아있다면, 사람의 고통 또한 다시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돌이 물살 속에서 닳아가며 제 모양을 찾아가듯, 나 역시 관계라는 거친 물살 속에서 조금씩 깎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단단함은 나를 지켜주었지만, 지나친 단단함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남깁니다. 돌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 밤, 아내가 다시 기침을 시작하면 나는 체온계 대신 손을 먼저 내밀어 보려 합니다. 병의 경과를 아는 것과 그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임을 배우려 합니다. 수반의 물을 갈아주듯, 무뎌진 내 마음의 표면을 아내의 눈물과 온기로 촉촉하게 적셔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나의 오만이었을까요. 괜찮을 것이라, 폐렴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던 내 진단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결국 어제 아내는 폐렴으로 입원했습니다. 남편의 근거 없는 확신을 믿고 고통을 견뎠을 아내를 생각하니, 내가 내뱉은 '팩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헛소리였는지 뼈저리게 실감합니다.
어쩌면 의사로서의 매너리즘에 빠져 '주의 깊은 염려'라는 본능을 '사서 하는 걱정'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나였다면 무식하게 참아냈을 통증을 아내는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차가운 분석의 가운을 벗어던지고, 오직 아내의 곁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디 이 미안함이 닿아 아내가 하루빨리 평온한 숨을 되찾기를, 그리고 나의 단단한 마음에도 다시금 인간적인 온기가 스며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