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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연동 2488-44번지 길가(원래 있던 곳은 노형동 제주시충혼묘지 입구였다.)
시대 ; 대한민국(미군정시대)
유형 ; 기타 비석(추도비)
관련 사건 ; 사삼사건
박진경
출생 : 1920년생
사망 : 1948년 6월 18일 사망(향년 28세)
고향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학력 : 진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 수학, 일본육군공병 학교
가족 : 양자 박익주(전 국회의원)
소속 : 조선국방경비대 제9연대 연대장(대령),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경력 요약 : 일본군 38군단 복무(태평양전쟁 학병), 조선경비대 인사국장, 국 방경비대 11연대장, 1948년 5월 6일 제주4·3사건 당시 제9연대 연대장 부임
故陸軍大領密陽朴公珍景追悼碑(고육군대령밀양박공진경추도비).
우측면 ; 이 비(碑)는 당초(當初)에 세운 비(碑)의 비명마모(碑銘磨耗)로 내용식별(內容識別)이 어려워 서기(西紀) 1985년(一九八五年) 6월(六月) 일(日) 다시 세웠으며 원비(原碑)는 비(碑) 앞에 묻었음.
후면 ; 공(公)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예(後裔)로서 생지(生地)는 경남(慶南) 남해군(南海君) 남면(南面) 홍현리(虹峴里) 36번지(三十六番地)에서 단기(檀紀) 4253년(四二五三年) 1월 22일(一月二十二日) 출생(出生)하셨다. 부인(婦人)은 남해군수(南海郡守)를 역임(歷任)한 진양정공(晉陽正公) 임환(任煥) 씨의 따님이다. 공(公)이 순직(殉職)하신 후(後) 양자(養子)로서 그 백형(伯兄)인 진용(珍鎔) 씨의 아들 익성(翊妵) 군을 입양(入養)하였다. 공(公)은 진주고보(晉州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이어 일본(日本) 오오사카(大阪) 외국어대학교(外國語大學校) 영어과(英語科)를 졸업(卒業)한 후(後) 우리나라 광복(光復)과 더불어 국군(國軍) 창설(創設)의 주역(主役)으로 일익(日益)을 담당(擔當)하여 헌신(獻身)하고 국방예비대(國防警備隊) 총사령부(總司令部) 인사국장(人事局長)을 역임(歷任)한 후(後) 11연대장(十一聯隊長)으로 취임(就任)과 동시(同時)에 육군대령(陸軍大領)으로 승진(昇進)하여 제주도(濟州道) 공비소탕(共匪掃蕩)에 불철주야(不撤晝夜)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忠情)으로 선두(先頭)에서 지휘(指揮)하다가 불행(不幸)히도 단기(檀紀) 4281년(四二八一年) 6월18일(六月十八日) 장렬(壯烈)하게 산화(散華)하시다. 이에 우리 삼십만(三十萬) 도민(道民)과 군경원호회(軍警援護會)가 합동(合同)하여 그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단갈(短碣)을 세우고 추모(追慕)의 뜻을 천추(千秋)에 기리 전(傳)한다. 단기(檀紀) 4285년(四二八五年) 11월(十一月) 7일(七日) 제주도민(濟州道民) 급(及) 군경원호회(軍警援護會) 일동(一同)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1948년) 6월18일 새벽 3시15분께 잠자다 살해되었다. 박대령은 조선에서 가장 탁월한 부대장이자 전투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던 인물이다."
"공보부 발표에 따르면 조선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은 (1948년) 6월18일 오전 3시15분 제주연대본부 숙사에서 취침중 암살되었다는데, 아직 범인은 판명되지 안했다 한다. 이에 딘 군정장관은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경찰의 총포연구 권위자 2명을 대동하고 18일 정오 공로(空路)로 제주 현지로 향하였다."
앞 글은 미군 제24군단 정보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며, 둘째 글은 당시 서울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다.
9연대장이던 김익렬 중령이 조병옥 경무부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되자 1948년 5월6일부터 9연대가 11연대로 바뀌면서 초대 11연대장으로 토벌작전의 책임자를 맡았다.
박진경은 일본 오사카의 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제주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근무했으며, 해방 후 국방경비대 사령부 인사과장을 거쳐 11연대장이 되었다. 제주도 근무 경력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 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로 발령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진압작전은 취임 인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말로 상징된다. 이 정도로 미군정의 명령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성격과 사상 때문에 전쟁도 아닌 시기에 제주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펴려고 했다.
진압책임자로 부임한 그는 강경 진압으로 치달으며 '무차별 체포작전'을 펴서 많은 인명 희생을 초래했다. 한 달 동안 토벌작전의 공로가 인정돼 대령으로 초고속으로 진급했다. 딘 미군정장관이 직접 제주를 찾아 계급장을 달아줄 정도로 미군정으로부터 신임도 두터웠다.
대령 진급 축하연이 끝나고 제주농업학교에 있던 연대 본부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경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박대령을 암살한 인물은 모슬포 9연대 창설요원으로 소대장을 거쳐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문상길 중위(당시 23세)와 손선호 하사관 등이었다.
문상길은 군법회의에서 범행동기에 대하여 "우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박대령이 민족반역자라는 근거는 '도가 지나친 강경진압'이었다. 손선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우리가 화북이라는 부락에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본 박대령은 무조건하고 그 아이를 쏘아 넘어뜨리었다. 그밖에 부하들과 사격 연습을 한다고 소나 돼지를 함부로 쏘아 넘어뜨리고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그곳까지 데리고 가서 만약에 폭도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여 버리었다. ‥‥‥"
검찰관 이지형 중령은 '그릇된 민족 지상의 이념에서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한 중범죄'라고 규정하고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정부수립 하루전인 8월14일 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관, 신상우 하사관, 배경용 하사관 등 4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판결이 사회에 알려지자 사형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돌았다. 법학가동맹의 8월26일자 성명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민 30만을 위해서나 또는 민족적 정기에서 보더라도 가해자 손선호 등 4명에 대하여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은 범행 동기를 전혀 무시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법학도의 입장에서 강경히 주장한다.(조선일보 48. 8. 27일자)"
그 밖에도 여러 단체들이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제주의소리 220203)
경비대 박대령 암살 피고인 문상길(文相吉) 외 3명에 대한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28일 인권옹호연맹에서는 “이번 제주도 사건에 있어 사실을 통해 볼 때 피고인들은 결코 사감(私感)에서가 아니라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정의감에서 범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형의 양정(量定)은 반드시 범죄의 동기를 참작한다는 행형상(行刑上) 대원칙에 의거하고 민족정의를 수호하는 견지에서 감형의 재결이 있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29일
어제 31일 기민(基民)에서는 문중위 총살언도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제주도사건을 무력으로 해결 지으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전제하고 “문중위가 박대령을 암살한 동기는 애국순정에서 나온 민족정의의 수호에 있으므로 사형언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동시 “그 감형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보도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5.10선거를 반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위대한 애국성을 박대령은 학살과 고문과 총검으로써 전 도민을 소탕하려한 것이다. 이는 박대령이 제2차 대전중 간도(强盜) 일제에 자긴 학병으로 나가 충성을 다하였던 자이며 해방 후는 그들의 새로운 주인에게 그 충성을 드리는데 전 도민의 무차별 학살로써 진충(盡忠)하였으며 그를 계속하려 하였다. 이에 분연하고 동족살상을 묵과할 수 없는 민족정기에서 문중위 등 제씨는 박대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런 애국애족열에 불타는 의거를 불구하고 사형판결이라는 그 부당성을 재일60만을 대표하여 지적하고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그러나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딘 장군은 총살형의 집행을 인준하는 서명을 했고 1948년 9월 23일 오후2시 경기도 水色산록에서 집행되었다. 박진경의 죽음은 육군장(陸軍葬) 제1호로 기록됐고 암살을 주도한 문상길 중위 등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사형 집행 1호’로 기록됐다.
박진경 대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충혼묘지 입구에 단독으로 세워져 있어 상징성을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처음 세운 것은 단기4285년 11월 7일이었으나 碑銘이 마모되어 原碑는 묻고 새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세운 때는 1985년 6월이다. 비석 뒷면 추도비문 내용 중에는 조상에 관한 내용과 ‘제주도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고 언급하고 있다. 암살당하였다는 말은 없다. ‘30만 도민의 뜻을 모아’라는 구절도 있어 그의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취임 발언과 대조를 이룬다.
비석을 세운 사람은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濟州道民及軍警援護會一同)이다. 제주도 군경원호회가 주동이 되어 세운 것이다. '제주도민'이 세웠다고 했는데 과연 누가, 몇 %의 도민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우는 데 동의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4·3단체들로부터는 도민학살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례로 이 추도비를 꼽기도 한다. 1985년에 새로 세운 비석의 재질은 화강편마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충혼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잘 관리하여 상태가 양호하다. 그렇지만 비석 앞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돌로 찍어 놓은 자국이 남아있다.
박진경에 대해서는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과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반역자라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사 연구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토벌 작전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은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박진경 추도비는 공권력의 폭력성에 모든 걸 잃고 공포에 질려 있던 1952년 11월 제주도내 기관장들이 박진경 연대장이 토벌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며 관덕정 경찰국 청사 내에 세웠다. 이후 제주경찰청이 이전하면서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자리로 이설됐다. 비석 뒷면 추도비문 내용 중에는 조상에 관한 내용과 '제주도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고 언급하고 있다. ‘암살당하였다’는 말은 없다. '30만 도민의 뜻을 모아'라는 구절도 있어 그의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취임 발언과 대조를 이룬다. 애초 1952년 11월 세워진 추도비는 철저히 진실을 가리고 있다. “공비 소탕이라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수많은 무고한 양민을 탄압하다가 부하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다”라고 써야 맞다. 비석을 세운 사람은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濟州道民及軍警援護會一同)이다. ‘제주도민’이 세웠다고 했는데 과연 누가, 몇 %의 도민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우는 데 동의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4․3단체들로부터는 도민학살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례로 이 추도비를 꼽기도 한다.
박진경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 군민동산에는 1990년 그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남해군 시민단체에서는 박진경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제민일보 "4.3은 말한다" 19941018, 19941025, 19941101, 19941104. 20000714) 창원시와 경상남도는 창원시 의창구에 있는 창원 충혼탑 앞에서 현충일 추념식을 엄숙히 진행하는데 1985년부터 추념 행사시마다 ‘경남도 대표 박진경 육군대령 신위’로 새겨 사용해오다 시민사회와 오마이뉴스(윤성효, 2017.06.06.), 중앙일보(위성욱, 2017.06.07.) 등의 문제제기로 2018년부터 ‘호국영령 신위님’으로 교체해 현충일 추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남해군에 있는 박진경 대령의 기념비는 지금도 논란이다. 2021년 4월 13일 경상남도의회 제384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김영진 의원은 남해군민공원에 있는 박진경 동상의 철거를 제안했다. 김 의원은 “잠을 자다 부하에게 암살된 박진경을 '작전중에 적군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고 거짓 기록을 새겼다. 이렇게 사실 관계가 맞지도 않고, 추모해선 안될 인물”이기에 “박진경 동상을 철거 하든지 존치한다면 명확한 사실을 명시한 단죄비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남해군의 시민단체들도 2000년과 2005년에 박진경 동상 철거 운동을 했으나 철거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의 고향인 남해군에서 ‘양민학살자 박진경 동상 철거 운동’이 벌어지던 2000년 초반에 이곳 추도비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여전히 견고하게 서 있다.
4·3단체 한 관계자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4·3의 가해자를 추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보존하는 대신 구체적인 설명문을 세워 바르게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제민일보 20040919) 제주 4·3에 있어 박진경은 강경 진압 작전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충혼묘지에 박진경의 추모비가 있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옆에 단죄비를 세우면 좋겠다. 실제로 단죄비가 세워졌다.
제주시충혼묘지가 2021년 12월 12일 국립호국원으로 개편되면서 지장물로 지정돼 철거된 박진경 추도비 등 총 4기의 비석은 2022년 1월말 제주시 어승생한울누리공원 인근(산록북로변)으로 이설되었다. 박진경의 추도비를 ‘역사의 감옥’에 가둔 건 시민사회였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4·3 학살과정에서 박진경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명백하다. 추모하거나 추도할 인물이 아니라 4·3 학살의 주도자일 뿐이다. 제주도민 3만의 희생을 불러온 장본인 중 하나로 추모해야할 역사적 인물이 아닌 단죄해야할 것 인물에 불과하다”며 역사의 감옥에 가뒀다. 70년 만에 도민의 이름으로 역사의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러나 보훈당국은 추도비를 에두른 쇠창살을 ‘불법 지장물’로 보고 원상복구 명령을 내렸다.
2025년 11월 국가보훈부가 박진경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면서 제주 사회에 거센 파장이 일었다. 그의 양손자가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가보훈부는 무공훈장 수훈 경력을 근거로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판단했으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학살책임자로 기록된 인물이라는 점이 즉각 문제로 제기되었다. 오영훈 지사는 지정 취소와 제도 개선을 공식 요청했고, 시민단체들은 평화공원 참배와 사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미군 기록과 당시 증언, 연구자 평가가 누적된 상황에서 유공자 지정이 강행된 배경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이재명 대통령은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에 대한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실은 상훈법 제8조를 근거로 공적의 진실성 여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2026.01.21.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한 자리에서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과 관련해 "손자분이 신청을 했는데, 손자는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며 지정 취소 후 관련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은 지난해 10월 그의 양손자 박○○씨가 국가보훈부에 신청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보훈부는 박 대령이 1950년과 1952년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별다른 심사 없이 국가유공자증서를 발급했다. 이와 관련해 권 장관은 "(유공자 지정은)직계 아들, 딸, 직계 부모만 신청 자격이 있다. 손자는 원래 자격이 없다"며 "이제까지 관행에 의해서 객관적인 사실, 국방부의 무공서훈 받은 사실이 맞느냐 확인을 했고, 매뉴얼에 따라 실무자들이 보훈심사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유공자 증서를)발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동으로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보훈심사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권 장관은 이 자리에서 박 대령이 무공훈장을 받은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 대령은)1950년과 1952년 '국가 안전 보장에 대해서 기여를 했다' 이렇게 기록이 있다"면서도 "그는 1948년 제주에서 사망했다. 그러니까 아직 정부수립 전이었고, (수여)하게 되면 당연히 '제주 4.3 진압의 공으로'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헤드라인제주 2026.01.23.)
《작성 050326, 보완 130603, 220203, 26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