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과 추락(민2:1-2)
2023.10.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비행기 착륙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연착륙과 경착륙이 그것이다. 연착륙은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서서히 착륙하는 것을 말한다. 비행기가 공항이 가까워지면 벌써 몇 십분 전에 안내방송을 하면서 승객들을 준비시키고, 서서히 하강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반대로 경착륙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급격하게 하강하면서 위험하게 착륙을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비상착륙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착륙보다 더 한 것이 추락이다. 이러한 비행기의 착륙에 빗대어 부동산이나 경제상황의 변동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륙보다 중요한 것이 착륙이듯이,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비행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멋지게 착륙하는 것일까? 잘 준비된 연착륙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경착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소한 추락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것이 인생의 이륙이라면, 그 이후의 일생은 평생 동안 아름다운 착륙을 향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은 천국 활주로에 착륙준비를 해가고 있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가 연세가 아주 많아 보이는 노인이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그네는 노인에게 나무를 심는 이유를 질문 했다. 그러자 노인은 “나는 죽지 않을 것같은 기분이라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나그네는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꾸한다.
이 이야기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번 올랐던,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 Kazantzakis)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다(영화로도 제작됨, 안소니 퀸 주연, 1964). 주인공 조르바가 주인(사장)에게 크레타의 어느 해변에서 과거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자신있게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이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조르바는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꾀나(?) 방탕하게 보낸다. 이러한 조르바의 생각이나 행동에서 자유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 노인과 나그네(조르바)는 공통적으로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이들은 모두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무지했다. 노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했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했다. 그리고 조르바는 죽음을 인정하면서 매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유를 방탕과 구별하지 못했고, 조르바는 펀(fun, 재미)과 행복(happiness)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노인과 조르바의 모습이 이 소설의 작가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또한 착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은 노인처럼 평생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라는 정체불명의 철학(?)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죽음 이후의 준비에 대해서는 전혀 성실하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또 어떤 사람은 조르바처럼 죽음의 때는 인정하면서도,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고 하면서 세속적인 것들에 취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행복과 자유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태도들은 착륙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 준비를 하는 것이다. 호흡이 멈춘 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놀라서 눈이 똥그래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 곁을 떠나기만 하면 마냥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던 탕자처럼(눅15장) 사는 것이 행복이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은 잠깐 피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길가의 화려한 양귀비꽃과 같을 뿐이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가? 성경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되, 오늘의 시간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한다. 이러한 삶이 추락하지 않는 삶이며, 아름다운 착륙을 준비하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 이 시간에는 본문인 민수기 2장 말씀 속에 나타난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성도의 삶의 태도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하나님 중심이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중심, 교회중심, 예배중심, 말씀중심 등이 다 포함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서 행진할 때와 머무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지침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머무를 때의 진영배치와 행진할 때의 대열은 좌측의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민2:1-7, 17).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민 2:1-2)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민 2:17)
이 명령에서 핵심은 중요한 것은 성막과 법궤의 위치이다. 머물러서 진을 칠 때는 성막이 한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에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치게 하셨다(성전중심). 이렇게 하신 이유는 어느 위치에서든지 성막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행진할 때는 법궤가 가장 앞에 서게 하셨다(말씀중심). 일반적인 상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가장 앞에 가야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상식을 넘어서는 이런 명령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과 친히 앞서 가시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담겨 있다.
이러한 명령과 약속의 영적인 원리들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삶은 마치 우산대처럼 하나님이 내 마음과 생활에 중심축에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을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과 세상일에 성실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성실해야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다(눅12:21)
이처럼 늘 하나님을 내 마음에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예전에 어느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태안군에서 운영하는 영묘전(납골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유족과 인사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분이 옆에서 버스가 출발한다고 하면서 바쁘게 뛰어갔다. 그러자 또 다른 어느 권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목사님이 여기 계신데 뭘 걱정해?”
그 말을 들으면서 “권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교회 버스는 제가 안타면 출발안합니다”라고 하면서 웃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다. 아무리 내 앞에 펼쳐진 인생길이 광야처럼 보이고, 다 나보다 앞서가는 것 같고, 심지어 인생의 활주로를 향해 내려가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준다 해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걱정할 것이 없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아니 하나님이 함께 계신데 뭘 걱정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지금까지 살아온 날도 중요하지만,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하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가? 천국과 지옥 중에 어느 곳에 착륙하기를 원하는가? 착륙할 준비는 하고 있는가? 착륙준비를 뒤로 미루기만 하다가 추락하면 큰일 이다.
만약 우리들이 정말 천국에 잘 착륙하고, 이 땅에서도 천국의 맛을 누리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내 삶의 중심축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예배를 가까이 하고, 무슨 일이나 판단을 하든지 말씀을 가장 앞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종착점에서 추락하지 않는 삶이며, 착륙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삶이다. 이렇게 살고자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앞길을 앞서 인도하시고, 앞일과 뒷일을 모두 책임지시고, 진로와 진학과 삶의 모든 것을 친히 준비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