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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묵상글 들 ( 사순 1주 목요일 - 절실함만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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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1주 목요일-절실함만큼
사순 1주 목요일-2010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정말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만 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청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두드리기 위해서는 앞의 겸손과 열망에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과 열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절실함입니다.
곤궁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우리는 청하는 겸손이 생기고
찾는 열망이 생기고
두드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에스테르 왕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죽게 되었을 때 아무에게도 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이런 절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것과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실 선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선을 주실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너희가 악해도”하고 주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인간도 선이지만
결핍이 있는 선이고 그래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 비하면 악입니다.
줄 수 있는 선이 하느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에
보통의 인간은 자기 자식한테 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깡패도 자기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남에게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이것이 아비 된 자의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고 사랑의 마음인 것이지요.
인간 아비가 이러하니 하늘 아비는 이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눈에 선이 아니라 악이 주어진 것 같아도
내가 몰라보는 것이지 사실은 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에스테르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무엇이 더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무지하여 악한 선을 달라고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선한 악을 주시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담배를 좋아하여 담배를 달라는 자식에게
아비는 절대로 담배를 주지 않고 싫다는 빵을 주십니다.
당장은 좋으니 담배가 선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나쁜 것, 악이지요.
당장은 싫으니 빵이 악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좋은 것, 선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주시는
이 선한 악에 맛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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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 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 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 먹는다.” 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에둘러서 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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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사순 1주 목)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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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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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시편 138[137],3)라고 고백하고, 오늘 독서와 복음도 청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청원을 아룁니다. 그렇게 우리가 청원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항상 들어주셨나요?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신 기억보다, 들어주시지 않으셨던 기억이 더 많지 않은가요?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험으로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우리 스스로 낮추게 됩니다. ‘내가 아직 부족한 신앙인이라서’ 또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돌을 달라고, 뱀을 달라고 청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과 뱀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돌과 뱀이 아닌 빵과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한다고 무조건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하여도 빵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였던가요? 내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도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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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한 기회에 ‘체질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토양체질’이라고 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제가 하는 행동, 저의 성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는 ‘애니어그램과 MBTI'가 있습니다. ‘애니어그램과 MBTI’가 주로 성격을 분석한다면, 체질검사는 성격과 건강을 함께 분석하였습니다. 체질에 맞는 음식과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가솔린차와 경유차는 각기 맞는 기름을 넣어야 하듯이,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격과 몸을 이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체질에 대한 분석입니다.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 부지런하며, 센스가 좋습니다. 일을 벌려놓지만 뒤처리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는 것을 먼저 말하고, 생각을 나중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싫어하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성격입니다. 토양체질의 건강법이라면 항상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하면서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길음동 수녀원, 해방촌 성당, 아론의 집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도 신문사의 일을 하지만 다른 일도 마다하지 않는 편입니다. 6개월 넘게 부르클린 한인 성당 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에서는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일을 좋아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통해서 힘을 얻는 체질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선 할 수 있는 일은 개선하고, 개선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만 개선할 수 있는 것과 개선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의 체질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하지만 뒤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품을 홍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박수를 받으면서 늘 함께하는 이들에게 박수의 영광을 돌리곤 합니다. 부족한 저를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백신이 나왔고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고 있습니다. 치료제도 나온다고 합니다. 예전의 일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부르클린 성당에도 새로 신부님이 오실 것입니다. 롱아일랜드 신부님도 휴가를 다녀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고, 화사한 꽃들이 추운 겨울과 인사하며 반갑게 자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겨울도 봄에게 인사를 하며 떠날 것입니다. 저도 본연의 업무인 신문홍보로 이곳저곳을 다닐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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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삶
-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
작년에 이어 코로나와 함께 두 번째 맞이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코로나 백신 11월 면역이 형성해도 올해 안에 ‘노 마스크’ 일상 복귀는 불가능하다 하니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새벽 교황님 인터넷을 여는 순간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주옥같은 가르침을 주는 여럿의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순시기는 멈춰서, 보고, 하느님의 온유함으로 돌아가는 시간”
“사순시기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시간”
“사순시기는 TV, 스마트 폰과 단절하고 복음에 연결하는 시간”
“사순시기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여정의 시간”
“사순시기는 믿음, 희망과 사랑을 새롭게 하는 시간”
교황님께서 사순시기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눈에 선합니다. 교황님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요 예수님의 목소리요 교회의 목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순시기 참 귀하고 좋은 기도와 삶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참으로 영적탄력 좋은 삶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 한결같이, 항구히, 간절히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함이 없이, 담담히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자세로 이렇게 기도하며 살 때 기적의 은총이요 영육의 건강입니다. 이런 자세로 살 때 교황님의 권고도 잘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깊고 깊은 신망애信望愛의 표현입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곧장 이어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아버지께 대한 확신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느님이 아닌 내가 아쉬워서 청하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되는 대로 분별없이 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필요한 것’, ‘하느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항구히 위와 같은 자세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진정 ‘내가 필요한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달아 청하게 되고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삶의 자세를 고려하여 마땅히 전제되어야 할 바, 다음 황금률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아주 평범한 듯 하나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랑이 제일입니다. 참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다 보면 입장을 바꿔 생각하여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면 상대방도 싫어할 것이며 내가 좋아하면 상대방도 좋아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에 보조를 맞춰주는 역지사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기도와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이가 제1독서의 에스테르 왕비입니다. 위기상황에 처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가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평소 에스테르 왕비의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삶의 자세를 반영합니다. 세세대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신처는 주님뿐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에스테르 왕비는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며 영적靈的 왕비다운 고결한 품위를 보여줍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닙,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있습니다.---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온맘과 온몸을 다해 기도하는 에스테르 왕비입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기도와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어제 병자성사차 방문했던 자매에게 드린 충고가 생각납니다.
“최고의 의사는, 명의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영혼이 튼튼해야 합니다. 영혼이 튼튼하면 몸도 영혼에게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치유되어 튼튼해 지는 영혼과 육신입니다. 팬티끈같은 영혼이 튼튼하면 팬티천 같은 육신도 견뎌낼수 있습니다. 육신에 끌려가는 영혼이 아니라 육신을 끌고 가는 영혼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의 팬티천이 좋아도 영혼의 팬티끈 약해지거나 끊어지면 그 좋은 팬티천의 육신도 쓸모없어 집니다. 그러니 영혼을, 육신을 잘 보살피고 다독이며 관리하십시오. 노화老化는 치유가 아니라 관리管理의 대상입니다.”
항구히, 간절히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이런 튼튼한 영혼입니다. 그러니 이런 삶의 자세를 지녀야 삼망(실망, 원망, 절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역시 제 지론을 나눕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넘어져도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탄력도 보존되며 치유에 튼튼한 영혼이 됩니다. 정말 대죄는 넘어져도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의 절망이며 급기야 자살이라는 대죄에 이르기도 합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영적 삶의 원리요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구체적 삶의 처방입니다.”
더불어 한결같은 영적탄력 좋은 삶을 위한 권고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항구히 간절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구체적 처방입니다.
“비단 수도원뿐 아니라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나름대로의 일과표가 필요하다. 기분따라, 감정따라, 마음따라 살지 않고 일과표의 궤도에 충실하다 보면, 떠났던 마음도 되돌아 온다. 영적탄력도 유지되어 내적으로 녹슬지 않고, 썩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일과표는 ‘삶의 안전 그물망’과도 같다. 영성생활은 습관이다. 일과표의 습관화와 더불어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 정주수행의 삶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 오늘 참 좋은 기도와 삶의 자세를 공부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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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새벽을 열며.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빠다킹 신부님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 이 다이아몬드의 원소 기호는 따로 없습니다. 탄소와 탄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주기율표상 6번, 원자기호 C인 탄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마찬가지로 원자기호 C인 탄소로 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숯입니다.
탄소에 엄청난 온도와 압력을 오랫동안 가하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숯이 된다고 합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숯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랜 시간을 고통과 시련으로 다져진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튼튼하고 그 삶 자체가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제대로 승화하지 못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사람은 그저 단순한 숯의 모습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이도 고통과 시련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 없이는 숯에서 멈춰지고 맙니다. 다이아몬드가 되고자 한다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열정을 가지고 정면에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나 시련 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피할 것이 아니라 이겨낼 방향을 찾는 삶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청하지 않고 찾지도 않으며 또 두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문이 저절로 열리기만 바라는 요행만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노력이 담긴 열정은 전혀 없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욕심을 통해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청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문도 두드리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냥 무턱대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열정이 담긴 노력, 특히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열정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더욱더 단련시킬 것이며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숯이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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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한 자에겐 모든 것이 쉽고, 나태한 자에겐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하다(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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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의 믿음은 주님뿐.
벌써 30년이 넘은 학력고사 때의 이야기를 동창 신부들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력고사 볼 때는 입학하려는 대학교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래서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신학교 대강당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 입학할 대학에 가서 시험을 치렀냐고 합니다.
진실은 신학교 대강의실에서 시험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대학 진학 눈치 보기를 없애겠다고 입학할 대학에 미리 지원하고 그 대학에서 시험을 보게 했었던 것이지요.
모두가 체험했던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예전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수정해 놓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억을 수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나에 대한 믿음을 100%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0% 믿음은 오로지 주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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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기도, 황금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1)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더라도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단순한 이 말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믿고,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데도,
기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할 때가 있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때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청하는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인가?’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 말이 말장난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나의 절박한 상황과 심정을 모두 하느님께 말씀드리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가 정답입니다.
2)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한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쉬운 생활이 됩니다.
그게 아니니까 신앙생활이 늘 어려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앞일은 주님께 맡기고, 더 큰 믿음으로,
더 간절하게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은총을,
또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가장 좋은 은총을 받았음을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신앙생활은 정말로 ‘신나는 생활’이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아무거나 청하라는 뜻은 아니고,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되,
기도를 하는 그 순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으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면서, 또는 결과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믿음만 확실하다면, 기도하는 순간부터 ‘평화’를 얻게 됩니다.
기도함으로써 얻는 평화는 기도가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큰 은총입니다.
3)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기본정신이기도 하고, 기도의 기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황금률을 실천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라는 말씀은,
황금률이 ‘사랑의 이중 계명’에 연결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황금률에 있는 ‘남’이라는 말은, 하느님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인 경우, 황금률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을 너희가 먼저 하느님께 해 드려라.”가 됩니다.
(“청한 것을 받은 다음에 그대로 해 드려라.”가 아니라,
“너희가 먼저 해 드려라.”입니다.
사랑은 항상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속의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마태 7,21).
(돈으로 은총을 사려고 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충실한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은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만 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이기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4) 이웃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남’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웃을 향해서 황금률을 실천하는 일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도 ‘내가 먼저’ 라는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하는 것을 본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겠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먼저
저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입니다.
‘사랑’은 받고 나서 받은 만큼 갚는 일이 아닙니다.
또 대가를 바라는 일도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그냥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없어도, 주면서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루카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대표적인 모범인데,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작은 행동 하나라도 사랑을 담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반대로, 작은 말실수나 가벼운 농담 한 번이, 또는 무심코 한 작은 행동 한 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나도 모르게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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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의 황금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가르쳐주시는 바가 바로 사랑의 황금률입니다.
사랑이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도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즉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대한은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이나 일생을 바치는 것, 즉 생명을 봉헌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이 황금률의 최대한에 있어서 또 최고봉이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순교와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순국, 이 두 가지일 텐데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면 이는 최고봉 중의 으뜸이겠지요.
제국주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십 년 만에 이천만 동포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비무장으로 평화 시위를 벌였던 삼일절을 며칠 앞두고,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한 에스테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르시아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뛰어난 미모와 교양 덕분에 유다인이면서도 왕비로
간택된 에스테르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키워준 모르도카이가 알려준 바,
간신 하만이 페르시아로 끌려와 있는 유다인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차지하려 한다는
끔찍한 음모를 전해 듣고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간절한 심정으로 하느님께 기도 바쳤습니다.
오늘 입당송에 나오는 대로, “주님,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제 탄식을 들어 주소서.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제 기도 소리 귀여겨 들으소서.” 하는
시편 5,2-3의 기도가 바로 에스테르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주셨으며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주셨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사자 같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앞에 나아가서 탄원할 때 함께 해 주시기를 청원하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법으로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섰다가는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도 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서기로 작정하고는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도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화답송 시편 138편의 말씀처럼,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하는 기도대로 유다인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청한 대로 받고, 찾은 대로 얻은 것이며, 문을 두드린 대로 열린 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우리 한민족에게도 드높은 하늘의 기상을
심어 주셨으므로 우리 조상들은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지니고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를 일구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벼를 재배하여 농업혁명을 일으켰으며, 하늘을 관측하여 천문에 담긴
우주달력을 만드는 등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하여 발달시킨 문물을 주변 민족들에게 전해 주었으나,
그들은 전해 받은 그 문물로 힘을 길러서는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받은 뜻 즉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에 따라서 땅과 사람과 문화를 지키는
데에 주력했을 뿐 그네들을 침략하거나 약탈한 적이 없었고 종으로 부리거나 괴롭힌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시아의 서방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남겨 주었다면,
우리 한민족은 아시아의 동방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평화에 대한 모범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카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듯이,
하느님을 모르던 민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모진 시련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종살이로도 모자라 바빌론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제 땅에서 그리스와 로마세력의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민족도 드넓었던 강역에서 밀려나서 한반도 땅에까지 움추러 들었으며,
일제의 종살이 40년에다가 한반도마저 갈라진 채 70 년, 도합 백여 년의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도 저질렀으니, 하느님의 백성이라던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한민족 역시 그 하느님을 믿던 천주교 신자들을 임금도 부모도 모르는
무리로 몰아서 박해하는 죄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표층해류 대신 심층해류가 바닷물을 움직이듯이, 이스라엘 민족에서는 가난하지만
겸손되이 하느님을 섬기던 아나빔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교회를 이루었으며, 한민족에서도 예수님의 진리를 찾다가 알아보고 교회를
이룬 이들은 평화를 갈망하며 진리를 찾던 이들이었습니다. 꼴찌가 첫째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페르시아 치하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 기도로 동족을 구한 에스테르가 있었다면,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 행동으로 동족을 구하려 했던 안중근과 유관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이나 일생을 바친 귀한 모범을 봅니다.
에스테르는 비록 유배 하에서이기는 했지만 왕비의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안중근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일어선 의병이어서 지휘할
병력조차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군이었는데 유관순은 그마저도 아닌 평범한 여고생이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으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어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세 위인의 삶과 신앙에 비추어 우리가 과연 무엇을 청하고, 어떤 지향으로 찾으며,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하겠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생명과 평화를 향한 사랑의 황금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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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기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웃고 우는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신다.
기도는
공감이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기도는
뜨거운
생명이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을
알게되고
기도로
삶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의
일상을
봉헌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기도는
우리 삶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이다.
은총은
우리 일상에서
잃어버린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한다.
은총을
간절히
바라기에
우리는
하느님 자녀이다.
기도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되이
깨닫게한다.
사람과 기도
간절함과
하느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
이시기에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사랑이시다.
눈물이
미소가 되고
기쁨이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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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막힌 기도, 뚫린 기도, 흐르는 기도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 중,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황금률이 따릅니다.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입니다.
청하라고 하면서 주라고 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나 이는 청하는 것이 막히지 않고 흐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막힌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시지 고여서 쓸모없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부산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새벽이 되면 성당 문을 수녀님이 열어야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한 남자가 문 앞에서 서성였습니다.
그날도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그 남자가 다가왔고 수녀님은 조금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10남매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채소와 전기밥솥 등 돈 될 것은 다 가져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기도하는 형제에게 수녀님은 미사에도 한 번 참석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형제는 그래도 되느냐며 미사에 참례하고 미사가 끝나자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10남매 모두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6개월을 받아야 했지만, 사정상 3개월 만에 세례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저녁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매일 와서 바쳤습니다.
세례 예식을 앞두고 미사 예물에 대해 말할 때 그 형제는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그날 하루 버는 돈을 다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비싼 전기밥솥이 팔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쌀과 연탄 등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아내는 수녀님이 조금만 바치라고 하셨으니까 1/3만 바치자고 제안했고 형제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내가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아내가 꿈에서 보따리를 들고 가는데 어떤 여자가 자꾸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쫓아왔고 안 주려고 도망치다 낭떠러지 앞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아내는 아무래도 그 돈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 같다며 다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가정 사정을 잘 아는데 너무 큰돈을 가져온 수녀님은
그중 1/10만 떼서 받고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그들은 받지 않으려 했고 본당 신부님이 막아섰습니다.
신부님은 돈으로 되돌려주면 안 받으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주라고 했고, 그들은 생필품과 중학생이 되는 아이의 등록금까지 본인들이 낸 것보다 두 배 이상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당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양형 성체를 할 때 그 입속으로 환한 빛이 들어가는 것이 사진에 찍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뇌종양이 치유되었고 모든 아이를 다 키울 때까지 이후 2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사진은 아직 신앙이 오래되지 않은 형제에게 교만함을 줄까 봐 신부님과 수녀님만 가지고 예비자 교리 때마다 성체 신심을 가지도록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기도는 3단계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위 형제가 신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힌 기도’의 단계입니다.
어머니라고 고백할 수 없으며 어머니께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뚫린 기도’의 단계입니다.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고 올바른 관계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오는 단계는 ‘흐르는 기도’의 단계입니다.
나에게 오는 은총을 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흘려보낼 줄 아는 단계입니다.
위 형제는 하느님께 자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은총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누가 나의 소중한 것이 한 사람에게 막혀 썩어버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마치 층계로 된 논에 물을 대는 지주와 같이 그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기를 원하는 하인의 논으로 물줄기를 내는 것처럼 주님도 더 많은 당신 백성에게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받고 싶으면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먼저 내어놓을 수 없다면 누구에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은 은총을 주시기 전에 먼저 봉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선악과나무, 즉 십일조를 바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흐르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청합시다.
그러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주실 리 없고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줍시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내가 먼저 주님께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흐르는 기도가 되고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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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부디 힘내십시오
부익부빈익빈 현상, 양극화 현상이 극으로 치닫는 요즘,
마음이 너무 착해서, 약아빠지지 못해서, 약삭빠르지 못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십니까?
가슴이 많이 아픈 몇몇 신자 분들과 소주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모질지 못해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한 번 더 양보하고, 한걸음 더 물러나다보니 결국 일이 커지고 말았더군요.
착해빠져 탈인 형제들, 모진 마음먹지 못해 괴로움을 홀로 떠안고 가는 순박한 형제들의 눈망울 앞에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저 힘들 내시라고, 언젠가 이 시련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겠노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왕 기도할 바에 보다 열렬한 기도, 강렬한 기도를 바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신명을 다해, 목숨을 걸고 한번 기도해보십시오.
나 혼자만의 기도로 부족할 것 같으면 ‘기도부대’를 동원하십니다.
제게도 언제든지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현실에 맞부딪쳐보십시오.
반드시 은총의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청할까, 무엇을 찾을까, 무엇 때문에 두드릴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지요.
우선 ‘나’의 만사형통, 내 가족의 안녕, 우리 가문의 번성,
우리 고장의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이웃봉사도 가능하고, 보다 나은 세상 건설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이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기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번에 구입한 열장의 로또복권이 꼭 당첨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9일기도, 목 좋은, 그래서 투자 가치가 높은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했는데, 꼭 선정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미사예물,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강요입니다.
하느님을 깎아내리는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을 떠보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기도도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도지향은 어떠해야 할까요?
무엇을 청할까요?
무엇을 찾을까요?
무엇을 위해 두드릴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윈윈전략’이 성공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에 매몰된 세상이 아니라 영으로 무장되었기에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산 제물로 기쁘게 받으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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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기도는 이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또 기꺼이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분께 머무르는 것이 기도니까요.
"좋은 것"
그런데 우리가 청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다고 여기시는 것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순간에 대해서도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시차가 발생할 수 있지요. 기도하는 이는 그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 "좋은 것"이고, 그것을 주시는 "때" 역시 가장 적합한 때임을 믿고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에스테르 왕비가 드리는 처절한 기도를 들려 줍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이방인 임금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테르는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음모 앞에서 갈등하다가, 자신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먼저 주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
에스테르는 민족의 명운을 걸고 임금에게 하만의 흉계를 알려야 합니다. 이방 민족의 궁궐에서 도와줄 누구도 없이 지혜와 용기를 다해 악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그녀에게 오직 주님만이 유일한 의지이고 피신처십니다.
그런데 "주님밖에 없음"은 에스테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 삶을 헤쳐나가면서 가족과 가문, 단체나 소속, 재물과 인맥 등 나름 갖가지 안전장치를 구축하고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은 결국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순간을 비켜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그동안 믿었던 뒷배나 보루가 신기루처럼 물러나거나 사라지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하던 건강과 사람과 재물이 얼마나 허무한 환영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 닥칠 때, 인간의 실존을 인식하고 살아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와의 차이는 무척 클 것입니다. 그때가 누군가에게는 은총의 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절망과 추락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예수님은 아버지께 매달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반드시 주시리라고 확신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찾아야 할까요? 다 받는다니 아무거나 청해도 되는 걸까요? 그 답은 오늘 복음 대목 끝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우리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아버지께 청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을 어쩌면 타인이 나에게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면, 우리 자신이 남에게 평화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은총을 바란다면 우리 역시 남에게 선물이 되어야 하지요. 재물과 안정을 청한다면, 우리가 타인의 재물과 안정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청한 바가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와 그대로 멈추어 버린다면 아직 그 기도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응답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며 그에게 유익이 될 때 비로소 기도의 열매가 영글고 기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밖에는 우리를 도와줄 누구도 없는 것처럼 간절히, 맹렬히, 지치지 않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의 열매는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선물이니, 공동선을 위해 필요하고 요긴한 것을 청하면 더욱 좋겠지요.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기도로 무르익어가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계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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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요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그러니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고,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에 대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에스테르 왕비처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에스테르 왕비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에스테르 왕비처럼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나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주님 마음에 드는 모습일 때, 나의 청을 더 빨리 들어주시고, 더 빨리 얻고, 더 빨리 문이 열리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오늘 복음의 끝 말씀인 마태오복음 7장 12절의 말씀을 황금과도 같은 율법이라고 해서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두 번째 일인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는 것들과 청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은 우리들입니다.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분 마음에 드는 모습 안에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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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사람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존경이나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또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욕구가 있는 게 당연합니다. 대접을 받으려면 그에 걸맞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대접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도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는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될 때도 있지만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라는 것은 자기에게 피부로 와 닿을 때 이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는 결론이 황금률의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으면 남에게 그처럼 대접을 해야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뜻은 당연히 이해가 되지만 왜 갑자기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합니다만 조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저한테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말씀이라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그게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단련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는 무조건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인종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그런 교만과는 거리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그에 맞게 우리도 하느님께 그만한 신뢰와 믿음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게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바치는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저울질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건 계산적인 계산이 이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하느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에는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으로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미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자기도 남에게 그대로 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하셨듯이 결국 자신이 만약 하느님께 청원한 게 있다면 그 청원의 마음 자세가 하느님을 향해 자신이 얼마나 마음을 열고 했는지 자신이 하느님께 열은 만큼 하느님께서도 그만큼 열어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도 계산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은총의 그릇이 작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그릇에 담긴 은총의 크기만을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기 전에 과연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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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에스테르기 4,17⑫.17⑭-17⑯.)
에스테르기는 표면상 푸림절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쓰인 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푸림절은 종교 축제라기보다는 세속 축제로 분류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이 축제 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이 에스테르기를 낭독하는데 낭독 도중에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야유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푸림절은 유다교 축제의 특징인 거룩함과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카니발이다. 이 축제에는 기도나 제사와 같은 종교적 행사는 없고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 마음껏 먹고 마신다.
푸림절은 본디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빌론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모세 오경에 언급되지 않은 축제는 이 푸림절뿐이다.
푸림은 바빌론의 아카드어 푸루(운명 또는 주사위)라는 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니산달에 지내던 바빌론의 신년 축제를 페르시아인들이 이어받아 즐기던 것인데 수사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에스테르와 모르도카이의 이야기를 첨가해서 자기네 축제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에스테르기의 히브리어 성경 본문은 두 가지 신학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하나는 하느님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종 학살의 잔학상을 정당화 또는 경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전통 신앙에 충실한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고 후자는 양식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책은 아가와 에스테르기뿐이다. 그래서 이 두 책을 유다교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신학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의 에스테르기는 167절로 된 히브리어 성경에 하느님의 주권과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07절을 더 보탠다. 이로써 에스테르기가 히브리어 성경 정경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어느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동방 그리스도교(정교회)는 이 칠십인역 에스테르기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이 본문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새 번역 <성경>에서 칠십인역 에스테르기 본문(그리스어 본문)에 대하여 해당 절 바로 옆에 동그라미 안 숫자(①,②등)로 표현한다.
다시말하면 오늘 독서같은 그리스어(희랍어)로 씌여진 제2경전은 개신교 성경의 에스테르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에스테르기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서 오늘 독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때는 크세르크세스 임금 시절이었다. 임금을 해치려는 두 내시의 음모를 적발한 공으로 모르도카이가 임금의 신임을 받자 이것을 질시하는 아각 사람 하만이 모르도카이와 그의 겨레를 없애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임금이 장수들과 대신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취한 임금은 왕비 와스티에게 왕관을 쓰고 연회장에 나오도록 지시하였다.
미드라쉬에 보면 이때 임금은 왕비가 벌거벗은 채 왕관만 쓰고 나올 것을 명한것으로 풀이한다. 왕비가 이를 거절하자 임금이 격분하고 결국 왕비를 폐위한다.
그리고 사촌 모르도카이의 양녀가 된 유다인 처녀 에스테르가 페르시아의 새 왕비로 뽑힌다.
에스테르와 후견인 모르도카이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궁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가는 사이에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재상 자리에 올라앉게 된다.
임금은 궁궐 대문에서 근무하는 시종들에게 하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한다고 명했는데 다른 시종들과는 달리 모르도카이는 하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라삐들은 하만이 가슴깃에 우상을 꽂고 다녔기 때문에 모르도카이가 그에게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어쨌든 그로 인하여 하만은 모르도카이와 그의 겨레 유다 민족들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유다 민족이 자기네 법만 고집하고 페르시아 임금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있으니 아다르달(음력2월) 14일에 그들을 전부 죽이라는 임금의 칙령을 받아내어 전국에 하달하게 되었다.
유다인들을 죽이기로 한 날짜는 주사위, 곧 푸림을 던져 정하였다. 이것이 푸림절의 기원이다.
유다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임금의 칙령이 내려지자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은 다음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 채 성읍 한가운데서 다른 유다인들과 함께 단식하고 통곡한다.
그러고는 에스테르를 시중드는 내시 하탁을 통해서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께 간청을 드리고 임금을 움직여 유다인들을 구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칠십인역에서는 4장에 모르토카이와 에스테르의 기도가 소개된다. 그들의 기도를 보면, 두 사람 다 율법의 규정들과 조상들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 온 경건한 유다인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느님이시요 임금님이신 주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고 악인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해 주시라고 간청한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에스테르는 이 사흘 밤낮의 단식을 겸한 믿음의 기도 후에 기도복을 벗고 왕비의 화려한 정장을 갖추고서 임금 앞에 나서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다.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세상 종이 아닌 하늘의 아들이 됩시다.
(마태 7,7-12)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 하느님 당신의 뜻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많이 주신다. 입니다.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남에게 무엇을 받고 싶으세요? 남-이웃?
저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남편이 해외여행 가자고 하면 제일 좋을 것 같은데~(지금은 코로나-19 땜에 안되지만)
남편은 해외여행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남편은 술을 즐기는 편인데 저는 체질적으로 술을 싫어합니다. 저희 어머님도 자식들이 사드리는 옷을 한 번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이렇듯 사람은 다른 이에게 서로 좋은 것을 주고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좀 어색합니다. 사실 11절에 좋은 것이란 루가복음에서는 ‘성령’이라 알려주십니다. 성령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이니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12절 ‘그러므로’ 시작하시는 말씀은 앞5장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에서 본 7장 11절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17~7,11 까지의 모든 말씀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율법과 예언서 안에 정신을 알 수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청하여라(아이테오)- ‘빚갚으세요’ 찾아라(제테오)-숨겨진 것, 껍질속에 것, 두드려라(낙하)-살해하다, 죽일 목적으로 치다. 때리다 라는 뜻입니다.
*아이테오-빚갚으세요~ 흙의 티끌 그 없음의 존재인 사람을 하느님 당신의 자녀로 하늘의 존재로 해 주신다 약속하셨으니(성경이 그 약속의 책입니다.) 그 약속 주세요. 그 빚 갚으세요. - 아이테오 청하면 주신다.입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젖 주세요’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테오- 숨겨진 속의 것~ 하느님의 길, 그분의 뜻은 성경(율법과 예언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속의 것, 제테오- 찾으면 얻는다 하십니다.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낙하- 죽일 목적으로 치다, 때리다~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 입니다. 돌이신 예수님(로마9,33)을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요한10,7)을 죽일 목적으로 치면, 때리면 열린다 하십니다. 치고 때리는 것, 깨달음을 위한 공부, 일입니다. 그 일로 하늘 문이 열려 하늘의 것이 내려옵니다.
(민수20,11)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돌)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요한19,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늘의 물이 나옵니다. 물-말씀의 영, 성령입니다.(요한7,39)
살아계신 기적, 치유의 예수님이 아닌 죽으셨다 부활하신 용서의 그리스도의 영, 성령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1코린6,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늘이 열려 누구에게나 좋은 것, 하늘의 진리의 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남' - 가장 가까운 이웃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 이십니다.
보이는 예수님의 치유만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돌(예수)에 걸려 넘어집니다.
(1베드2,6-8)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 순종입니다. 성경에 모든 말씀이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가로 풀리면(깨달으면) 용서, 쉼, 안식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1요한5,5-6)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 아멘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마태7,7~10)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9~11)
여기서 '빵'에 해당하는 '아르토스'(artos; bread)는 팔레스티나 사람의 일상적인 음식인 빵을 말한다.
빵은 배고픈 사람의 육신 생명을 구하고 활력을 준다.
팔레스티나에는 만져 보기 전에는 빵과 구별하기 어려운 평평하고 둥근 돌이 골짜기나 개울 등지에 많이 있다.
이처럼 '돌'에 해당하는 '리토스'(lithos; stone)가 비록 외관상 빵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전혀 먹을 수 없는 돌을 줄 아비는 없다는 비유를 통해, 믿는 이들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기도로써 유용한 것을 청하는데, 필요없는 것을 주어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생선'에 해당하는 '익스튀스'(iksthys; fish)는 '빵'과 더불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생선'과 대조되는 의미로 대구되는 '뱀'에 해당하는 '오피스'(ophis; serpent)는 요리를 하기 위해 잡아 놓으면 생선과 유사한 모양을 지니는 물뱀을 뜻하는 것 같다.
당시 이방인들은 이런 요리를 먹었지만, 유대인들은 뱀을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해서 그 고기를 먹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앞절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생선대신에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절대 먹지 않는 뱀을 먹이는 부모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설의법을 사용해서 강조하신다.
생선은 유익한 것을 상징하고 뱀은 해악을 끼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유익한 것을 청하는데,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응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마태오 7장 11절에서는 원조 아담의 범죄 이후로 본성적으로 악하여진 인간과 하늘에 계신 선하신 하느님을 대조시키고 있다.
특히 '더', '더욱이', '하물며'라는 뜻을 지닌 비교 부사 '말론'(mallon; more)을 사용하여 인간과 감히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한층 더 부각시키므로써 선한 응답을 주시는 하느님을 절대 신뢰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7장 11절에는 '좋은 것을'이란 낱말이 두 번 나온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인간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좋은 것'은 '도마타 아가타'(domata agatha; good gifts)로 나오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는 '좋은 것'은 '아가타'(agatha; good gifts; good things)로 나온다.
여기서 '아가타'(agatha)의 원형 '아가토스'(agathos)는 '좋은 것' 그 자체를 가리키고, '도마타'(domata)의 원형 '도마'(doma)는 '선물'(gif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이 자식에게 주는 '좋은 것'은'좋은 선물'로 직역되며,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빵과 생선과 같은 상대적으로 유익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는 '좋은 것'은 그 내용이 제한받지 않는 '좋은 것'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것이 매우 광범위함을 보여 준다.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1장 13절는 이것이 '성령'으로 번역된 '프뉴마 하기온'(pneuma hagion; Holy Spirit)으로 나온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다양하지만,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주시는 근원이 바로 '성령'임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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