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 시인의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푸른사상 시선 196)
시집은 깊은 물과 무거운 물과 넓은 물과 난폭한 물을 부드러운 물로 끌어안고 역동적인 상상력을 펼친다. 시인은 이 세상의 존재들을 물처럼 품으며 그리움과 슬픔의 시어를 길어 올린다. 2024년 9월 23일 간행.
■ 시인 소개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살고 있다. 강원대학교 대학원 스토리텔링학과를 수료했다. 2014년 『시와표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입술을 줍다』 『툭,의 녹취록』, 사진시집 『금시아의 춘천 시(詩)_미훈(微醺)에 들다』와 산문집 『뜻밖의 만남, Ana』, 시평집 『안개는 사람을 닮았다』를 출간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여름 독촉을 전지하는 시간
어느새 이리 멀리 왔을까
떠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낯가림이 느슨해진다
길목마다 도돌이표를 세워놓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움이 무성해서 참 다행이다
■ 추천의 글
금시아의 시에선 한곳에 온전히 정주하지 못한 자의 슬픔이 만져진다.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물에 담근 채 끊임없이 “물밑 세상의 쓸쓸함”(「수몰」)과 유통기한이 지난 그리움을 수시로 길어 올린다. 힘의 균형이 물 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땅 위에 있을 때도 ‘범람’ ‘우기’ ‘물길’ ‘수심’ ‘소낙비’ 같은 물기 머금은 시어가 자주 출몰한다. 물과 동행하지만, 쉽게 울지는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감정”에 “오래라는 천연 방부제”(「오래오래」)를 집어넣고 휘휘 저어 투명해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그런 투명한 기다림으로 “물의 심장 소리를 읽”(「호수를 읽다」)어내고, “수면을 쓰윽 베어 구름 내장을 훔쳐 달아”(「소양강」)나고, “공중을 빨갛게 물들”(「먼나무」)인다. 금시아의 시가 감정의 절제와 사유의 깊이뿐 아니라 “가장 긴 유효기간”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무성해지고, 시인은 사람들 속에 들어서도 물의 흐름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적 “상상과 은유를 동원”(「오래오래」)해 운명의 수레바퀴를 재배열하려 하고 있다 . ― 김정수(시인)
■ 작품 세계
금시아 시인의 작품들에서도 바슐라르가 분류한 물의 상상력이 지배한다. 맑은 물, 봄의 물, 흐르는 물, 깊은 물, 잠자는 물, 죽은 물, 무거운 물, 복합적인 물, 모성적인 물, 여성적인 물은 물론이고 우주의 물, 운명의 물, 슬픔의 물, 그리움의 물, 동백꽃의 물 등으로 변주한다. 난폭한 물을 지배하는 부드러운 물이 작품 세계를 이끌어 시간 의식과 세계인식을 펼치는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날을 “우당탕탕, 소나기가 한낮을 훔쳐”(「완장」)간 것으로, 통증이 심한 어머니의 삶을 “우울한 심기를 봉합하고 방수해도 우기는/어느새 관절을 뚫고 들어”(「비의 관절」)온다고 표현한다. 춘천 대보름 축제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함성을 “강물이 춤춘다”(「독륜차전(獨輪車戰)」)라고, 삿갓을 쓰고 바랑을 짊어진 채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로 비유하고 그의 책 읽기를 “바람 한 겹에, 물살 한 장에/유유히 필사”(「비서(飛絮)―김삿갓 1」)하는 것으로 이미지화한다. (중략)
화자에게 진중함을 일러준 호수는 풍경이 아니라 시간의 물이다. 삶의 시간이 스며든 호수는 깊고 무겁고 넓고, 그리고 움직인다. 움직이는 호수는 마중 나온 나비처럼 창문을 두드린다. 두꺼비의 등을 타고 물꼬를 보러 나선다. 은신처가 있는 집을 찾아 물소리가 졸졸 흐르는 길을 따라간다. 절명한 김유정의 문장들이 안타까워 소낙비에 젖으며 꽃점을 친다. 우기에 젖는 동안 사람에 들거나 사람을 들인다. 바람을 흉내 내는 고독을 출렁이는 방죽으로 데려간다. 쓸쓸한 그림자들의 목덜미를 물의 습성으로 간질인다. 징조도 없이 거듭하는 시행착오의 눈물을 닦아준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촘촘하게 끼인 그리움을 꺼내 물 위에 띄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깃발을 물의 기운을 넣고 흔든다. 소멸하지 않고 수백 년 만에 눈뜬 연꽃 옆에 멀고 먼 전략으로 부드러운 시를 심는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금시아
한여름이 탐욕스레 그림자를 잘라먹고 있었다
그날처럼 장대비가 내린다
기척을 통과한 시간들
폐쇄된 나루에 주저앉아 있고
물과 뭍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적막
파닥파닥 격렬을 핥기 시작한다
한여름이 햇살을 변호하고
그림자가 그림자의 풍문을 위로하면
열 길 넘는 금기들
장대비처럼 세상을 두들기며 깨어날까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왜 휘몰아치는 격렬마저 쓸쓸한 것일까
조용히 상을 물리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가득해
서늘하거나 다정한 그리움 하나,
소용돌이치며 자정을 돌아나간다
간혹, 이런 장대비의 시간은
그림자 떠난 어떤 기척의 쓸쓸한 자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