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전달하는 마음의 유리창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미사 시작 때 사제의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이어지는
짧은 침묵 동안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오늘 하루 미사 준비를 잘했을까?
그리고 오늘 내 행동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가로막는 민폐는 아니었을까?’라는 성찰을 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스승이었고, 하느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역할을 계승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권위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가진 권위에 맞갖은 행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의 행실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전달하기보다 가로막으려는 시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 같아야 합니다.
햇빛이 유리창에 비치면 그 안으로 해가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과 은총은 투명한 유리창 같은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 말씀과 은총은 나만 갖고 있지 않고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나만 하느님 사랑을 움켜쥐려 한다면 그 마음은 유리창이 아니라 답답한 벽일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더러워진 마음은 벽처럼 되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먼지가 쌓이고 뿌옇게 되어 안과 밖을 볼 수 없게 된 마음의 유리창은
하느님 말씀과 은총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말씀과 은총이 이웃에게 전달되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만들었다는 넓은 면적의 성구 갑(匣),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 술은
더러워진 마음의 유리창을 화려한 커튼으로 감추려던 바보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마음의 유리창은 어떨까 하고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넘겨온 사소한 잘못부터 대죄와 같은 큰 잘못까지,
그런 것들이 크고 작은 먼지들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벽이나 다름없는 불투명한 유리창을 만들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뿌옇게 된 내 마음이 부끄러워 타인을 낮추고 내 주장만 옳다고 소리치는 두꺼운 커튼으로
내 마음을 가리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유리창은 겸손이라는 도구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겸손으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은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우리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섬김으로 마음의 유리창을 뽀득뽀득 잘 닦아 나간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훌륭한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며 겸손과 섬김으로 더욱 깨끗한 마음을 지닐 것을 생각하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내가 받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영인 요한사도 신부 서운동 본당 보좌
연중 제31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