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 5,21-33; 루카 13,18-21
+ 오소서, 성령님
제1독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여 말합니다.
사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가부장적으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2천 년 전에 쓰인 에페소서를 오늘날의 문헌과 비교하여 읽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페소서를 당대에 쓰인 다른 문헌들, 그리스 철학책이나 유다 문헌들과 비교해 보면, 세속의 문헌들은 대개 아내가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남편을 아내의 소유주처럼 그리는데 비해, 에페소서는 남편의 의무를 강조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사랑의 관계로 그린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에페소서가 쓰일 당시는, 지금처럼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은, 수많은 식구로 구성된 자기 가족을 잘 다스려야 했고,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비유가 된다고 에페소서는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구절을 남녀불평등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는, 그 앞의 문장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라는 말씀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 나무가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점차 자라나 많은 이들이 이 가지에 깃들입니다. 이 많은 이들에는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밭에’ 뿌렸다고 말하고, 마르코 복음은 겨자씨가 ‘땅에’ 뿌려졌다고 말하는데 루카 복음은 어떤 사람이 ‘자기 정원에 심었다’고 말합니다. 이 정원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류에게 주신 에덴 동산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하느님 나라가 “누룩과 같다.”고 하시며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로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비슷합니다. 처음엔 작지만, 크게 자라나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자라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겨자씨를 심은 사람이 남성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성들을 위하여 누룩의 비유를 따로 말씀하신 것인데요, 루카 복음에는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대하시려는 말씀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뒤에 성모님께 나타났습니다. 성요셉과 성모님은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가셨을 때, 남자 예언자인 시메온과 여성 예언자인 한나를 만납니다. 루카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남자를 치유해 주신 후,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7장에서는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신 다음,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돕는가 하면,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로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도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함께 등장하고(4,26-27),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같이 나오는가 하면(11,31-32), 잃어버린 양을 찾는 남자와 잃었던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가(15,4-10) 연이어 등장합니다.
등 굽은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후 ‘아브라함의 딸’(13,16)이라고 부르시고,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아들’(19,9)이라 부르십니다.
이처럼 남녀를 동등하게 대하시려는 예수님의 태도는,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하던 2천년 전에, 무척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또한 온갖 차별과 오해를 넘어 하느님의 자녀로 서로의 동등함을 인정하고 오늘 독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10월 21일(월) 새벽 미사 후 성당에서 본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