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9편 1절-3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1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뉴스에 보면 ‘태풍이 언제 몰려온다. 장소는 어디다. 태풍이 오는 시간은 언제다’ 라는 걸 알려준다. 이 때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듣지 말고 신앙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태풍이 온다고 하면 계곡으로 피서를 가야 하느냐, 안 가야 하느냐? 안 가야 한다. 왜 안 가야 하느냐? 믿는 우리는 신앙의 이치에 의해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나와야 한다. 이걸 우리가 일반적으로도 아는 거지만 신앙 이치적으로도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한다.
자연 이치적으로 생각을 할 때 태풍이 불고 큰 비가 오면 물살이 어디로 흘러가느냐? 계곡으로 내려간다. 이게 이치요 법칙이다. 그러니 큰 비가 올 때는 계곡에 있지 말아야 한다. 이걸 반대로 생각을 해 보면 폭우가 온다고 예보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계곡으로 가라는 거냐, 가지 말라는 거냐? 가지 말라는 거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간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신앙 이치적으로 정신적인 차원으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비가 오고 계곡에 물이 흘러갈 때 그 계곡에 있다가는 쓸려 내려가고 결국은 죽게 되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살게 되듯이 신앙 면에서도 세상이라는 홍수의 바람이 불 때 성도가 이 바람을 타다가는 신앙정신이 세상에 흡수되어서 영적 성장 면이 죽어버리게 되니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더 진리의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야 자기의 영적인 성장성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그걸 정신적 차원으로 끌고 와서 신앙 면으로 깨달을 줄을 모르면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육신적,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세상에 가짜가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건을 살 때 가짜가 아닌지를 철저히 검사해야 한다. 그리고 날짐승들은 높이 날아서 군사분계선을 넘나든다. 그러니까 낮게 날면, 수준이 낮으면 철조망에 걸리지만 수준이 높으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구나. 이걸 신앙 정신적 차원으로 생각을 해 봐라.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신앙의 차원이 낮으면 세상의 이 바람 저 바람에 걸려들고 피해를 당하게 되는 거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우리가 원수로부터 피하려면 원수의 차원을 알아야 하고, 이에 앞서서 먼저 자기의 차원을 알아야 한다. 먼저 자기 마음부터 올라와야 한다. 자기의 정신이 세상이라고 하는 라인 속에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물질성에 빠지게 되어있다. ‘아니다’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물질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인정도 들어있다. 자기가 인정 때문에 세상에 빠졌으면 여기에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구원을 얻으려면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 그래서 본분에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를 건져서 높이 들어달라고 요청을 하는 거다.
그러면 다윗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 기본구원에 속하는 거냐, 이룰구원에 속하는 거냐? 이룰구원이다. 이룰구원 면에서 원수들에게서 건져서 그들보다 높이 올려달라는 거다. 이 원수에는 비진리가 들어있다. 세상적인 가르침이 들어있다. 성도가 이걸 받아먹으면 그 정신이 세상에 빠져버리고 세상에 포로가 돼버린다. 낮은 차원의 교훈을 먹게 되면 세상의 포로가 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교훈에 있어서 높은 차원을 먹어야 한다. 자꾸 올라가는 차원을 먹어야 한다.
1학년으로 학교에 들어가면 유치원 공부를 하느냐, 1학년 공부를 하느냐? 1학년 공부를 한다. 그래야 차원이 올라가는 거다. 유급을 해서 학년이 못 올라가면 자기 얼굴은 똥이 되는 거다. 성경에서는 이런 면을 미리 미리 가르쳐 준다.
이룰구원 면에서의 구원의 요청이란, 먼저 진리생명의 구원에 관한 진리이치의 말씀을 붙잡는 거다. 이걸 붙잡은 상태로 놓지 않고 자꾸 깨달아 가면 수준이 자꾸 올라가는 거다. 이것이 건져지는 상태다. 낮은 수준에서, 낮은 깨달음에서 진리이치를 붙잡고 놓지 않고 사니 교훈을 깨닫는 면에서 자꾸 올라가는 거다.
우리는 성경을 다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성경을 전혀 안 읽는다면 우리교인들은 이런 사람과는 교회의 얘기나, 하나님에 대한 얘기나, ‘자기 마음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대화는 하지 말아라.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과는 신앙 면의 대화를 할 자격이 없는 거다. 성경을 읽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만이 성경에 대해 묻고 대답을 해 주고 할 때 성경이 알아지고 궁금한 것도 풀리는 거다. 성경을 전혀 안 읽은 사람이 교회에 대해 ‘자기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우리의 대화상대가 되지 않는 거다.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말 할 자격이 있느냐? 전혀 없다. 믿는 사람에 대해 ‘좋네, 안 좋네. 나쁘네, 어쩌네’ 말 할 자격이 안 된다. 영이 죽어있는 사람이 교회에 대해 무슨 말 할 자격이 있느냐? 성경을 안 읽으면 말 할 자격이 없는 거고, 교회는 이런 사람에게 자격을 줘서도 안 된다.
믿는 우리는 신앙의 차원이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는 상태가 진리를 붙잡고 깨달으면서 곧장 올라가는 게 있는가 하면 질적인 면에서 삐딱하게 깨달아서 삐딱하게 올라가는 게 있다. 그러면 빨리 올라가려면 삐딱하게 올라가야 하느냐, 직선으로 곧게 올라가야 하느냐? 직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바로 올라가야 한다. 이게 빨리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런 이치를 어기지 말아라.
우리가 깨달을 때 같은 것임에도 이런 면으로 보면 긍정적이고 좋게 보이지만 저런 면으로 보면 비구원적이고 나쁘게 보이는 것도 있다. 이렇게 보니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니 저렇게 보이는 게 있다. 그래서 한 면만 붙잡고 ‘옳으니 그르니’ 해서는 안 된다. 다양적 다각적으로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을 해야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성도가 진리를 붙잡고 깨달음으로 나가게 되면 올라가게 되고 결국은 높이 들려진다. 깨달음의 수준이 올라가면 높이 들려진다. 다윗은 이런 의미로써 ‘나를 높이 드소서’ 라고 하는 거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을 편히 높이 들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의 깨달음이 이치가 들어있는 높은 수준을 말하는 거다. 이 높음은 예수를 믿으니 갑자기 직장이 생기고, 갑자기 과장으로 승진을 하는 이런 높음이 아니다. 여기서 ‘나를 높이 드소서’ 라고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 들어있다.
2절: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성도의 원수 대적들은 사악을 행한다. 사악하다는 것은 간사하고 악하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사악’이란 사람을 위하는 척하면서 꾀어서 이용해 먹고, 재산을 털어가고, 내쫓고, 죽이는 걸 말한다. 이런 일을 세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 영의 눈으로 보는 ‘사악’이란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벗어나서 불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불의’란 하나님의 의를 벗어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옳음에서 벗어나면 불의가 되고, 불의자가 되면 사악을 행하게 되어있다.
성경이 성도로 하여금 세상 것을 가지러 가게 하느냐, 천국 것을 가지러 가게 하느냐? 천국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들고 가르치기를 세상 것을 가지러 가게 하고, 종교의식을 빙자하여 돈을 가져오도록 강조를 하며 많이 가져오면 세상의 복을 많이 받는다고 추켜세우는 것은 사악한 거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기꾼의 수법이 능수능란하다. 그래서 한 사람을 꾀일 때 처음부터 그 집 살림을 다 털려고 하지 않고 처음에는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하며 작은 돈을 빌려서 약속한대로 제 날짜에 이자를 주어서 신뢰를 얻은 후에 그 다음에는 좀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제 때 이자를 주고, 이런 식으로 몇 번을 한 후에 신뢰가 쌓이면 그 다음에는 아주 큰돈을 빌려서 도망을 가버린다. 이게 세상이다.
이런 것은 눈으로 보이게 나타나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이와 같은 근성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목사가 많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으로 알고 딱 잘라야 한다. 낮은 수준에서는 이런 말에 다 속는다. 성경을 인용해서 세상을 가지러 가게 하는 것은 불의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 불의성을 모른다.
성경을 들고 ‘예수 믿어 부자 되자’ 이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의고 사악한 자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걸 사악하다고 보느냐? 이런 사악한 말들은 사람의 인격을 망가뜨리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누적시키지, 이룰구원을 쫄딱 망하게 하지, 성경을 깨닫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살인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걸 아느냐? 다윗은 이런 자에게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한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어떤 자들이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냐? 전쟁하기를 즐기는 자들, 사람을 죽이기를 즐기는 자들이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다. 마음상태가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는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내를 두들겨 패면서 이 즐거움으로 사는 남편도 있는 모양이다. 또는 남편과 죽이 맞아서 그런 건지 저녁마다 남편에게 얻어맞아야 잠이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군대에서 그 전에는 군기를 잡겠다고 밤이 되면 갑자기 비상을 걸어서 사병들을 연병장에 집합을 시켜서 별로 잘못한 게 없는데도 두들겨 패고 했다. 이런 일이 거의 매일 있으니까 어떤 날은 집합을 시키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 아예 초저녁에 집합을 시켜서 두들겨 패든지 기합을 주든지 한 후에 잠을 자게 하면 좋겠는데 밤이 늦도록 집합신호가 없으면 언제 집합신호가 날 런지 불안해서 오히려 그 날 밤은 잠을 더 못 잔다.
사람의 피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는데, 전쟁을 즐기는 자들이요, 일반적으로 싸움을 즐기는 자들이 이런 자들이다. 우리가 영화나 역사로 보면 로마시대에 노예들에게 칼이나 창을 줘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넓은 운동장에서 노예들끼리 싸움을 붙인다. 이 싸움은 지는 게 없고 한 쪽이 죽어야 끝난다. 싸움을 하면서 피를 흘리고, 깨지고, 목이 달아나고 하면 구경꾼들은 ‘와’ 하고 소리를 지른다. 여자들도 그걸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런 게 다 사악한 짓들이다.
그 때만이 아니다. 요즘도 닭을 훈련을 시켜서 닭끼리 싸움을 붙인다. 소싸움도 있다. 투우도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보고 좋다고 소리를 친다. 이런 걸 생각하면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사람을 동물시 하는 폭도들의 세계도 있고, 인신매매로 먹고 사는 자들도 있다. 일반적으로도 이런 일은 없어야 하고, 이런 세계에 들어가서도 안 된다.
교차로 같은 정보지에 보면 한 달에 4, 500만원을 준다고 하면서 가족처럼 일할 분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는데, 힘도 안 들이고 이런 큰돈을 벌게 해 준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라. 우리는 그런 것에 빠지면 안 된다. 적게 벌어도 땀을 흘려 내 손으로 벌어서 사는 게 떳떳하고 편한 거다. 그리고 그런 곳에는 거의가 일반적인 건설성도 없다. 한 탕 해서 쉽게 큰돈을 벌려고 하는 요행성이 들어있다. 여기엔 자동적으로 사기성도 들어있는 거다.
사람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이고, 빼앗고, 싸우고 하는 것인데, 이걸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양식을 주어야 이룰구원 성화구원 건설구원이 잘 돼 나가는 건데 진리생명의 양식을 주지 않는 것도 여기에 속하는 거다. 아무리 성경을 들고 할지라도 설교 속에서 진리이치가 안 나오면 성도의 양식이 아니다. 자기가 먹을 게 아니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 깨우침이 아닌 반드시 교인들을 종교적 사업과 업적으로 내몰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영원 궁극적인 죽음의 선 너머에서 자기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 없는 충성봉사, 비진리적이며 이질적이며 세상성적인 옛사람 부패성적인 충성봉사는 결과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이 착취가 돼버린다. 이런 식으로 평생 예수 믿고 충성봉사를 해도 신령천국에 가서 보면 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이 착취를 당한 거다. 어디에 착취가 된 거냐? 세상건설에 착취가 된 거고, 죄 짓는 일에 착취가 돼버린 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죽는 거냐? 내가 살아있을 때만 죽는 거냐, 영원히 죽는 거냐? 영원히 죽는 거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거다. 선악과의 그 지식, 그 세상성, 그 욕심을 먹지 말아라. 먹으면 네가 영원히 죽는다.
임시적 세상성적인 것을 많이 이뤄놓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냐?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크게 짓고 헌금을 많이 내고 이런 게 아니다. 인간 자기가 하나님의 속 성품을 입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 자기 속에 들어있는 거지 건물이나 물질 등 세상의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크게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솔로몬의 성전을 불에 태워버리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경에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건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말해주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건물은 세계 제일로 크게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니 전부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했다. 이러면 그 큰 성전이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느냐? 성전건물을 지어놓은 것이 당신의 영광이라면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으로 로마 군인들이나, 바벨론 군대들이나, 앗수르 군대들이 못 쳐들어오게 막았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 그런 것에 자기 일생을 다 투자하면서 노력을 기울이고 수고를 했으나 속사람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머니 이방군대들을 동원시켜서 자신들의 속을 깨달으라고 눈에 보이는 성전을 때려 부수게 한 거다.
피는 생명의 상징인데, 사람이 피를 많이 흘리면 죽게 되듯이 성도의 노력과 수고가 세상으로 빠져나간 것은 전부가 사망에 해당되는 거다. 사망성공이다. 사망성공을 한 여기에는 신앙이 사는 법이 없다. 신앙이 다 죽어버린다. 이런 곳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한다.
3절: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다윗은 이런 악한 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이들이 왜 다윗을 해하려고 하느냐? 이 세상에서도 보면 서로가 모르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사람을 해치는 자가 있다. 그래서 늘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참 무섭다. 이런 곳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한다.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오늘날 비진리적 세상성적인 가르침들이, 거짓 종들과 이단자들이 영적으로 어린 생명들을 죽이려고 일어나고 있다. ‘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생명을 자연생명 위주로 생각하지 말아라. 다윗은 신앙생명 위주로 산다. 그러니 이 말씀을 보는 우리도 매사를 신앙생명 위주로 생각을 해야 한다. 나의 신앙생명이 해쳐지면 자연생명은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다.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세상정신 사상을 주장을 해서 성도의 신앙생명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항상 깨어있는 신앙으로, 영능의 실력자로,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사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하게 하시는 거다. 물론 사울로서는 자기가 좋아서 자기의 생각을 따라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건데, 하나님의 주권 면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이용을 당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환난을 당하고 있지만 실은 하나님은 누굴 위하는 거냐? 다윗이다. 그러면 사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다윗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자기 주관대로 하는 거냐? 자기 주관대로 하는 거다.
사울은 자기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느냐,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하느냐?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한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내가 다윗을 죽이던 살리던 내 마음이다’ 라고 할 거다. 그러면 사울의 이 마음이 성령에 감화된 마음이냐? 악령에 감화된 마음이다. 그러니까 진리성도를 해코자 하고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성령에 감화 감동인 마음이 아니라 악령에 감동된 마음이다. 사울 왕은 자기가 좋아서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윗의 신앙실력을 키워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이용만 당하고 치워버림을 당할 것이다.
지금 우리 궁극교회 성도들이 자기 때를 살고 있느냐, 하나님의 때를 살고 있느냐? 안 믿는 사람은 자기 때를 살고 있느냐, 하나님의 때를 살고 있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때로 살고 있다. 그런데 자기 때로 사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때는 언제냐?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는 날이 하나님의 때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행사가 나타나는 게 심판의 때다. 심판의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을 하나님께서 치워버린다. 사울도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된다.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고 죄도 없는 진리의 성도를 괴롭히지 말아라. 심판의 때에는 괴롭히는 자기가 당하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우리는 이걸 느낄 수 있는 거다. 이걸 믿어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