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우화다. 가난한 농부 파홈은 원하는 만큼 땅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악마라도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쳤다. 대화를 엿듣던 악마는 파홈에게 땅을 줘 그를 유혹하리라 마음먹는다. 얼마 후 파홈은 열심히 모은 돈으로 원하던 땅을 샀다. 하지만 작은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더욱 큰 땅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이웃 바시키르 마을에서 굉장히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싶었던 파홈은 바시키르로 가서 그곳 사람들과 계약했다. 1000루블만 내고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점에 돌아오면 자신이 밟은 땅을 모두 차지해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거래는 무효였다.
다음 날 파홈은 동이 트자마자 신이 나서 앞으로 걸어갔다. 점심이 지나 돌아올 지점을 통과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눈앞엔 더욱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당황한 파홈은 죽을힘을 다해 출발점으로 달려갔다. 해가 지기 직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원래 지점에 도착했지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가슴을 쥐고 피를 토한 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바시키르 사람들은 땅을 파서 파홈을 묻어주었다.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2㎡ 넓이의 무덤이었다. 파홈은 눈 앞에 펼쳐진 더 풍요로운 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본래 계획보다 더 멀리 나갔고 무리하게 달린 탓에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족함을 알고 멈추면 좋았으련만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파홈의 욕망은 인간의 자화상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가져도 더 탐내고, 누려도 더 누리려 한다. 끝까지 올라가도 만족하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욕망과 탐욕을 칭찬하고 장려한다. 성과주의와 재테크로 상징되는 물질문명 세상에서 욕망은 멈출 줄 모른다. 끝없는 욕망을 좇다가 망하는 이야기는 단지 파홈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 사건사고의 단골 메뉴처럼 등장한다.
최근에도 국내 최대 규모인 전자상거래 플랫폼 중 하나가 상품 거래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해 입점 업체들이 자금난에 빠지고, 수많은 소비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언론들은 한결같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무리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관계자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한다. 도에 넘치는 탐욕으로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는 기업과 사업체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빈번히 보인다. 충분히 배가 부른데도 더 배를 채우려는 욕심이 악마까지 끌어들이게 되고, 자신과 이웃을 공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19세기 문장가 홍길주는 ‘지지당설(止止堂說)’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험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순탄한 곳을 만나고도 멈추는 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할 수 있다.” 내 욕망이 저 앞에 있을 때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건 쉽지 않다. 깜냥을 잘 헤아려 그치면 좋으련만 ‘조금만 더’ 하는 욕심 때문에 이미 얻은 것조차 잃어버리는 일이 인생에는 허다하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던 이카루스는 태양까지 닿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해 더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해 죽고 말았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허비하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갈 수 있다.” 너무 쌓아두기만 하면 반드시 크게 잃는 날이 있다. 분수를 잘 알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고 오래 이어질 수 있다.
박수밀(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에 열광하는 할리우드 키드였다. 내가 나고 자라던 곳은 주변에 영화관이 여러 곳 있어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접할 기회가 잦았다. 집과 영화관이 가까워 주말이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 속 세계는 끊임없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시시각각 변하는 스토리 전개는 나의 무한한 상상력을 이끌어냈다. 특히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영화 줄거리를 내 스타일에 맞게 바꾸고 내 식대로 상상하며, 내면의 세계를 점점 만들고 키웠다.
현대 희곡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테네시 윌리엄스는 1947년에 처음 발표한 3막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그 해에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이 희곡은 1951년 엘리아 카잔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여주인공 블랜치 드부아 역을 열연한 비비안 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의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남부 명문가 출신인 주인공 블랜치가 결혼에 실패하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결혼한 동생 스텔라에게 찾아온다. 스텔라는 난폭한 스탠리와 결혼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블랜치는 동생의 허름한 집에 불쾌함을 표현했고 이런 블랜치를 스탠리는 경멸한다. 블랜치는 겉으로 우아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 과거에 남자들과의 욕망을 채우며 살다가 스텔라에게 왔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상에 갇힌 그녀를 스탠리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는 영화다.
왜 갑자기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야기가 나왔을까 궁금해할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욕망이라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보면 그 욕망에서 나오는 여러 부산물들은 우리 삶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과 이슈들을 던져주고 있다.
욕망은 단순히 한글로 표현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영어로는 Desire, Greed, Cupidity 등 여러 단어로 욕망을 표현할 수가 있다. 욕망(欲望)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욕망을 갖는 마음은 아주 순수하고 자연적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며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은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히 욕망을 갖는 것은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시인 스탠리 쿠니츠 역시 '삶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첫째도 욕망, 둘째도 욕망, 셋째도 욕망이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일, 운동 실력, 지식 등에 부족함을 느껴 잘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좋은 욕망은 삶을 긍정적인 태도로 살게 하고 인생의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적극적인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욕망과 탐욕의 경계가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탐욕(貪慾)은 십악 중 하나다. 과도하게 탐하는 욕심으로 가지고 있어도 또 가지고 싶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제조건이 포함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욕심은 결코 채워지지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순수하고 삶의 긍정적 원동력이 되는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탐욕으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에서 블랜치는 잘못된 욕망에 의지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자신이 만든 허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가 원했던 진정한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그녀는 그 답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적인 기사 거리들을 보면 우리는 탐욕의 덩어리가 가득한 사회로 가고 있지 않나 노심초사해 본다.
사자성어 중에 청심과욕(淸心寡慾)이라는 말이 있다. 청심과욕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욕심을 적게 가지라는 뜻으로 군주나 정치가가 지녀야 할 주된 수양 방법이라고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다만 지나친 욕심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가 없다. 때문에 과욕을 경계하며 내가 원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깨닫고 스스로 욕망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청심과욕의 마음가짐을 지닌다면 우리 인생이 좀 더 밝고 즐거운 이슈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종대 안과의사
Catch (Official Lyric Video) - Julia Cole & Kaylee Rose
첫댓글 오늘 하루 도 즐거움이 가득하시고 행복이 넘치는 즐거운 화요일 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 하세요? 감사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