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琵瑟山)이 온통 안개에 덮여있다. 하얀 솜뭉치 속의 세상으로 말려든 것 같다. 대견사지 삼층석탑 앞에 서서 우람한 바위 들목에 마애불상을 바라보니 하얀 수염을 내려 쓰다듬는 위용으로 겁에 질린다. 안개가 산을 덮고 있으니 근두운을 탄 손오공이 되어 세상을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슬비를 맞고 물방울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영롱한 진달래 꽃잎이 해맑은 웃음으로 어서 오라고 반기며 잔잔한 미소를 건넨다.
산 정상에 오르니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간다. 잠시 뒤 진달래 숲길이 보인다. 교수님은 숲길을 보고 어릴 때 숨바꼭질,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옛 시절의 즐거움을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리는 날 학교길을 가면 앞에 가는 친구가 잘 보이질 않아 친구 이름을 부르면 “응”하는 대답이 기쁨이 되어 안개비를 헤집고 메아리처럼 귀에 젖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니 배달부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부른다. 다가가 저라고 하니 미납편지가 왔다며 돈을 내라고 한다. 갑자기 겁이 나, 엄마한테 가서 돈을 달라니 누구한테 온 편지냐고 묻는다. “나한테” 라고 하니 아버지 편지도 아니고 네 편지냐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조막만한 것이 무슨 편지냐며 혼을 내고 돈을 내어 준다.
편지를 들고 집 뒤안으로 갔다. 뒤안도 밝아서 다시 돌아 나와 집 앞 가지밭으로 갔다. 가지 잎이 무성하고 키가 커서 그 사이로 숨어들었다. 편지를 꺼내 읽어보니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개비를 머금은 가지 잎이 흔들려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흠뻑 맞은 탓에 한기가 들어 할머니 방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밤새 열이 올라 앓았다. 뒷날 할머니가 아파서 학교에는 못가겠다며 쉬라는데, 아버지는 학교에는 가야 된다고 한다. 할머니 말이 떨어지자 바로 할머니 품을 파고 들었다.
마비정(馬飛亭) 누리길을 돌아 벽화마을을 지났다. 점심으로 먹은 산채 비빔밥이 꿀맛이다. 모두들 탁주를 권하기에 나도 마셨다. 얼떨결에 두 잔을 마시니 몽롱한 기분에 즐거움이 솟는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은행나무 앞에 섰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을 넘었다고 한다. 김굉필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은행나무를 일명 김굉필 나무라고 한다. 서원의 이름이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다는 동재와 서재 안에 들린 우리 일행은, 출발 OX 문제를 풀었는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나의 의지에 상품권을 받았으니 기분은 호사다. 갑자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모두 우산을 쓰고 마당으로 내려와 만남의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했다.
불혹에 들면서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어떤 남자 친구가 내게 다가오더니 어디 사냐며, 잘 사냐고 연거푸 안부를 묻는다. 또 얼굴이 둥글고 통통한 친구가 오더니 “너 그 집 앞 노래 알지? 내가 그 집 앞 노래를 무척 좋아해. 초등학교 다닐 때 너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노래를 불렀어. 지금은 너도 없고 그곳으로 갈 일도 없지만, 요즘에도 가끔 네 생각으로 부르곤 해.” 순간 가슴이 예전처럼 또 철렁 내려앉는다. 혹, 이 친구가 그때 미납편지를 보낸 친구인가? 절대 아닐 거라며 애써 고개를 젖는다.
문우들과 찻집에 둘러앉아 대추차를 마시며 잠시 동창회 생각에 든다. 우리 반 반장일까? 아니면 학습 부장, 아니면 키다리 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지금은 먼 과거의 일이지만 안개가 낀 날이면 가끔 추억의 편지에 빠져드는 건 왜일까.
남지 유채밭을 바라보니 유채는 옷을 떨구어 내고 나신으로 비를 맞으며 춤추고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서로를 얼싸안아 춤은 고저의 템포로 리듬을 맞춘다. 싸하게 불어오는 비바람을 맞으니 상쾌하다.
안개비 내리는 날 비슬산을 오르며 비슬산은 비가 슬슬 자주 내린다고 하여, 비슬산인가 했더니, 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은 것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신선이 거문고를 타면 꼭 안개비가 슬슬 내리지 않았을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봄 문학기행의 즐거움의, 피로에 젖어, 어두워지는 차창을 바라보니 또다시 편지를 써 보낸 친구의 얼굴이 지나간다. 우리 반 반장일까. 학습 부장일까. 키다리 친구일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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