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미술관 나들이 (2018 1,1-1,4)
매년 가는 제주도라 그냥 가족에 봉사하는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토막잠에 꾸벅 조는데 곧 제주공항에 도착한단다. 포화 상태의 렌터카가 굴러다니는 섬이라 렌터하는 요금도 저렴하여 79시간의 중형차 비용이 십 만원이 조금 넘는다. 이웃에 살다가 동백으로 이사 간, 친 처제 같은 수아가 동행하여 예쁜 참새처럼 재잘댄다. 돋보이는 미모에 성격도 쾌활하여 무어 하나 빠질게 없는 게 요즈음 골드 미스의 특징인가 보다.
우선 동문시장에 들러 옥돔 한 꾸러미를 사고 소문난 식당을 물어가 성개 미역국과 보말미역국으로 점심을 하고, 처제의 지인인 도두 마리나의 나씨 성의 회장을 방문하여 차 한 잔 같이하고 37m 돛이 높다란 대형 요트에 오르니 바람이 차갑다. 겨울철이라 멤버들의 방문이 뜸하다는 나회장은 백발에 머리숱도 많지 않아 나보다 연상인가 했더니만 띠 동갑 아래란다.
10년 전에 오픈한 마리나 사업 외에도 해변에 신축한 호텔도 올해 개관할 예정이라니 아직 20년은 거뜬히 사업에 매진하겠다만, 아직도 젊다는 자신감에 머리도 염색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모습에 처음엔 나보다 연상으로 보였으니, 회장님, 이제 염색이라도 하시지요? 년 전부터 목공에도 필이 꽂혀 손수 만든 탁자와 의자가 사무실에 찻잔을 받치고 있다. 이처럼 육지인들의 제주 진출이 활발하나 아직도 제주도민의 폐쇄성에 대한 소문이 아직도 다 가시지 않았다.
예약해둔 제주 란 팬션으로 가는 길은 애월의 해변도로를 따라간다. 공항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팬션의 박사장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로 자식 둘을 외국에서 공부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 년 전부터 애월에서 취미삼아 숙박업을 하는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으로 무장한 점잖은 분이며 부인 또한 소담하시다. 파도소리가 들리는 해변 가의 팬션 지하는 식당에서 바로 마당으로 올라가는 둥근 돌계단 위 양쪽에는 아름드리 해송이 하늘을 밀고 서있어 답답하지 않다. 2층과 1층은 5개의 객실로 멋을 부린 입구의 대문은 투박한 철물에 강화유리로 갈바로 마감한 입구는 촌스럽지 않다.
저녁 식사 전에 처제의 동생뻘 되는 총각이 한라봉과 레드향을 한 박스씩 사들고 인사를 와, 함께 토종돼지 구이로 저녁을 마치고 잠자리로. 습관대로 5시에 잠이 깨어 커텐을 젖히고 덧문을 여니 어렴풋한 하늘은 찌지부동하나 해변에는 부서지는 흰 파도가 번쩍인다. 춥지 않는 날씨라 방의 온도를 올리지 않은 바닥은 냉골이나 침대 속은 체온이 남아있어 이불을 감싼다. 어제 친구들과 밤을 샌 아들을 코를 골며 떨어져 자고, 애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함께 밤을 샌 처는 코골이를 피해 이불을 뒤집어 썬 모습이다.
8시 30분, 식당으로 내려가니 사장님 부부가 아침준비에 한창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언제나 칭찬을 받는다. 치즈를 넣은 빵에 한 접시 야채와 계란과 리필해주는 주스나 우유는 나그네의 오전 나들이를 허기지게 하지는 않겠다.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시고 추사유배지를 향해 출발. 이번 여행은 미술관 투어를 위주로 하여 그냥 먹고 마시고 쉬는 것이 목적이라 편하기 그지없다.
추사 유배지 및 미술관
예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을 아버지로 둔 김정희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금석학의 대가이며 8년 3개월간의 귀양지였던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명필로 회자된다. 서체에 과문한 내가 보아도 그의 글씨는 시대를 압도하며, 말년의 그의 글씨는 군더더기 살을 다 발라낸 소의 뼈대처럼 간결하나 힘차 보이고, 때로는 풀도 없는 맨땅에 홀로 앉아있는 큰 바위 같은 무개를 느끼게 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학문을 접하여, 여덟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로 간 추사는 12살 때 양아버지가 별세하자 가장이 되었고, 채제공은 어린 추사의 필체에 놀랐다 하며, 실학의 거두였던 박제가로부터 2년 간 학문을 익혔다. 15세에 혼인한 후 다음해에 모친이 별세하고 20세의 부인마저 사별했고 스승마저 사망했으나 학문의 정진을 소홀히 하지 않아 23세에 사마시에 합격 후 스물네 살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외교 업무를 직접 담당하지 않고 수행원 임무만 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동행하여 2개원 자류롭게 머물면서 청나라 석학과 교류하였다.
연경에서 옹방강과 완원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승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특히 완원은 그에게 그의 성을 딴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아 추사(秋史) 외에 완당으로도 불린다. 특히 금석학의 대가로 고증학자인 옹방강 등으로부터 고증학을 익혀 서른한 살 때 북한산 비봉에 올라, 당시까지는 왕건 때의 도선국사나 태조 시절의 무학대사비로 알려져 오던 북한산의 비가, 1400년 전에 20대의 청년이었던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巡狩碑)임을 밝히고, 다음 해 다시 올라 64자의 비문을 탁본하여 고대사 연구에 기여했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제수 받는 등의 관직생활을 하던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세도가 안동김씨의 모함으로 여섯 차례나 고문을 당하면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감일등(減一等)하여 55세에 제주로 유배를 가는 길목의 대흥사에 들린 완당은 초의에게 걸렸던 ‘이광사의 현판을 때라.’하고 대신 남긴 무량수각(無量壽閣)과 환갑의 나이에 화암사에 써준 무량수각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귀양이 풀려 귀경길에 다시 대흥사를 들런 완당은 지난날 그의 무례를 반성하여 팽개쳐있던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라고 했으니 유배지에서 남의 것도 인정하는 성숙한 성품이 되었다.
위는 대흥사 무량수각, 아래는 화암사 무량수각
추사가 귀양살이를 한 대정의 유배지는 연산군 이래로 60여명이 유배되어온 대표적인 유배지로, 추사는 이곳에 유배를 온 마지막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포교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으나 뒤에 지금의 강도순 집으로 옮겼다가 유배가 풀려 복귀했다가, 3년 뒤 다시 북청으로 간 귀양에서 풀려나 선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71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대정에서의 유배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유배 중에도 까칠했던 그에게 변함없는 정리를 표하며 연경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완원의 방대한 저서인 360권의 황청경해(皇淸經解)를 가져다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으로, 유배생활 5년째인 오십구 세 때 그려준 세한도는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칭송받는다.
후에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를 역관(譯官) 이상적이 자랑하려고 연경으로 가는 사신 길에 가져가자, 청의 학자들은 다투어 16명이 찬문(撰文)을 더했고, 오세창 등도 동참하여 더욱 유명한 그림이 되어, 세한도(歲寒圖)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란 칭송을 받는다. 그의 제자인 소치가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도 볼거리이며, 2010년에 건립된 추사관은 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는데, 단순함과 독특한 외관으로 눈길을 잡는 이 건축물은 승효상의 역작이다.
제주도는 1984년 강도순 증손자의 고증에 따라 옛 유배지를 복원하여 김정희 유배지를 조성하고, 세한도 사본과 현판과 기증받은 추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유배지를 둘러보니, 뒷방에서 밀랍으로 만든 추사와 동갑인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로 불렸던 다성(茶聖) 초의는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하던 다산 정약용이 친교를 맺어 학문을 논하며 시름을 달래던 백련암의 혜장선사의 후학이다.
젊은 나이로 혜장이 입적하자 다산은 초의와 나이차를 건너뛰는 허교(許交)를 하고 졸하기 몇 년 전에 마재까지 찾아온 초의와 우의를 나누었다. 그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모습은 인자한 문인의 모습이며, 초의선사와 차를 마주하고 앉아있는 그림은 말년의 안정된 모습이라 정겹다. 그의 글씨 제자이면서도 평생 벗이었던 초의가 처가 사망한 완당을 위로하러 제주로 내려와 6개월을 머물면서 그의 슬픔과 고독을 함께하며 차를 나누는 밀랍인형의 모습이 정겹다.
사실 조선의 귀양살이와 부모의 삼년상을 치 르는 초막집살이가 없었다면, 비록 실용적이 지 못한 학문이지만, 흥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금은 아끼는 신하를 당쟁으로부터 보호하려 는 목적으로 귀양에 처하기도 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를 물리치는 방안으로 부모상 을 치른 뒤에 부르지 않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만들었다.
그가 안동김씨에 의해 제주도로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이 지금의 유배지다. 그러나 ‘벼루 열개와 붓 천 자루를 버려가면서 만들 어 졌다.’는 추사체를 완성한 것도 이 유배지 였으며 세한도라는 보물도 남겼다. 그의 글씨 를 보면 힘 있고 예사 필체에서 벗어난 자유 와 여유를 느낄 수 있으나 글씨를 알지 못하 는 나의 무식이 안타깝다.
추사의 서예가 수사체로 완성되기 까지는 그의 천부적 재능 외에 금석학을 공부하여 옛 대가들의 글씨를 많이 보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모방을 하면서 자기만의 글씨를 만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그의 추사체를 보는 기쁨을 누린다. 유배지를 떠나면서 추사관과 초막을 돌아본다. 71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제주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이 유배지를 잊지 못해 저 파란 겨울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까? 봉원사에 있는 판전(板殿)은 말년에 겸손함을 찾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이 쓴 마지막 작품으로 칡뿌리를 잘라 만든 갈필로 쓴 것으로 그도 이 글씨에 만족했다한다.
여행 중 맛 집을 찾아가는 것은 즐거움이라 부지런히 소문난 집을 찾는다. 겨울은 방어 철이나 요즈음은 서울서도 싱싱한 방어를 쉽게 접하여, 오늘은 고등어 회로 점심을 하기로 하여 모슬포의 Y집을 찾았다. 대자 한 접시가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를 하니 주인아줌마가 넉넉하단다. 그러나 역시 아껴 먹어야할 량이다. 운전사는 금주해야하니 일행들만 가볍게 한잔 하며 야금야금 회를 즐긴다. 생선도 어느 정도 사이즈가 되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인데, 고등어가 조금 작아 회가 깊은 맛이 부족하나 지리는 맛있다.
손 빠른 처재가 계산을 했는데 바로 나오지 않아 잠시 기다리니, 계산을 잘못하여 먼저 한 카드를 취소하고 다시 카드를 끊었단다. 75,000원이 맞는 금액인데 145.000원이 카드에 찍혀있었단다. 정정을 요구하니 미안하다며 귤 한 봉지를 주더란다. 손님도 없는 점심시간인데 설마 고의로 한 것은 아니겠지? 외국에서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계산서를 점검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