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축구 시합이 시작된 곳이 바로 영국이다. 아웃과 반칙, 킥오프, 오프사이드 등 축구 시합의 규칙이 처음으로 생겨난 곳은 1948년, 영국(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그리고, 가장 오래 된 축구 클럽도 1857년에 생긴(역시 잉글랜드의)셰필드 크럽이다. 축구가 처음 시작된 곳은 잉글랜드였지만, 그 이후에 근처의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로드 축구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들 4개국은 `영국`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속하는 나라들이기도 한데, 상대국으로 건너가 친선 경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축구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축구에 관한 재미있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럼 축구 종주국 영국을 무대로 벌어지는 `축구의 창세기`를 훑어보리고 하자.
*요건몰랐을껄*->(우리나라 <삼국사기>에도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과 김춘추가 공차기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공을 잘찬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 가운데 고구려가 공차기에 관한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걸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공을 많이 찼던 모양.)
1872년 이때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제 축구 경기가 열렸으며, 장소는 축구 경기장이 아니라 크리켓 경기장이였다(당시엔 축구장이 없었으므로). 시합이 열린 곳은 서부 스코틀랜드의 크리켓 그라운드 였으며, 이 시합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0대0으로 비겼다. 입장료는 5페니였다. 이때, 2000여 명의 관중 속에서 특히 골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던 한 관중은 스코틀랜드의 레키 선수가 날린 강슛에 맞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다. 당시엔 골대에 크로스바가 없어서 양 기둥에 끈을 묶어서 골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187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두 번째 국제 경기(물론 이때도 장소는 크리켓장이였다)를 했으며, 잉글랜드가 4대2로 이겼다. 그리고 이때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시합을 하기로 했다.
1876년 웨일즈와 스코틀랜드가 첫 경기. 결과는 좋지 않았다. 0대4로 웨일즈의 완패.
1880년 아일랜드가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했으며, 상대 팀은 잉글랜드였다. 결과는 더 나빳다. 0대13으로 아일랜드의 완패!
1884년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이 4개국 사이에 <홈 인터내셔널 챔피언 전>열림. 각 나라가 서로 리그전을 가졌으며, 각 경기에서 이기면 2점, 비기면 1점을 얻었다. 최초의 챔피언 전 우승 컵은 세 경기에서 모두 이긴 스코틀랜드에게 돌아갔다.
1888년 최초의 `월드컵`경기가 벌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축구 클럽 대항전의 승자인 렌튼 팀과 잉글랜드 축구 클럽 대항전의 승자인 웨스트 브롬위치 앨버언 팀이 경기를 가졌는데,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씌어저 있었다고 한다. `세계 축구 챔피언 전`.
1895년 영국의 축구 천재 스티브 블루머(steve Bloomer) 선수가, 그의 데뷔전이기도 했던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두 번이나 골을 넣었다. 경기는 9대0으로 잉글랜드의 승리. `블루머`라는 특급 축구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블루머 선수의 사전에는 실수란 단어는 없었다. 1874년에 태어난 그는 국제 축구 초창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블루머의 외모는 축구 선수 특유의 터프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안색이 유난히 하얗고 창백해서 팀 동료들이 `희멀건`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잉글랜드의 선수로 뛰는 동안 23경기에 출전해서 28골을 넣었으며, 그중 10골은 국제 경기에서 기록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1896년 웨일즈와의 경기에서 블루머는 5골을 넣었다. 이를 보고 한 신문기자는, 그가 `뱀장어가 미끄러지듯이 날렵하게` 그라운드를 누볐다고 표현했다.
블루머는 바닥에 낮게 깔리는 공을 좋아했다.
1892년부터 1914년까지 더비 카운티 팀과 미들스보로 팀 선수로 뛰는 동안 598번의 경기에서 자그마치 353골을 넣었다. 오늘날의 축구 스타 선수들은 인기도 많지만, 돈도 많이 번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웨어나 다른 상품의 광고 출연료도 아주 짭짤하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앗다. 1891년, 블루머가 더비카운티 팀에 입단할 때 급료가 얼마였던가 하면.... 세상에, 1주일에 겨우 37.5페니! 중요한 사실은 블루머가 스포츠 상품광고에 출연한 첫 번째 축구 선수라는 것이다. 블루머와 계약 한 어느 신발 회사는 신상품으로 내놓ㅇ은 부츠를 `블루머의 행운의 신발`이라고 선전했다고 한다.
스티브 블루머는 40살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축구 인생을 계속 하기 위해 독일 팀의 축구 코치로 갔다. 이후 많은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있었지만, 동상이 세워진 선수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블루머는 달랐다. 1997년, 더비센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동상을 만들기 위한 기금의 일부는 각국 선수들이 우승컵을 팔아서 마련했다. 스티브 블루머와 같은 해에 태어난 빌리 메레디스는 당시 영국 축구계에서 블루머와 쌍벽을 이루었다. 빌리 메레디스는 여러가지 면에서 재미있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메레디스는 1905년에 1년 동안 출전이 금지되는 시련을 맛보았는데, 그 이유는 메레디스가 자신이 속해 있던 맨체스터 팀의 우승을 위해 애스턴 빌라 팀의 주장에게 10파운드를 건네면서 경기에 져달라고 꼬셧기 때문이었다. 메레디스는 이일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메레디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뛰어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스티브 블루머와는 달리, 메레디스는 누가 보더라도 축구 선수로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사냥개처럼 늘씬한 몸매에 달리기 실력도 상당했던 것이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모습에 관중들은 항상 환호를 보냈으며, 그는 `그라운드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레디스는 정말 놀라운 선수였다. 25년 동안 웨일즈팀에게 48번이나 우승컵을 안겨 줬으니까. 1920년,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46세(정확하게는 45세 8개월)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하이버리의 아스날 구장에서 열린 이 날 경기장에서 그가 속한 웨일즈는 잉글랜드를 2대1로 이겼는데, 웨일즈가 잉글랜드를 이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마지막 국제 시합 이후, 메레디스 선수는 국내에서 4년간 더 뛰었다. 1924년, 50세 생일을 4개월 앞둔 어느 날, 메레디스가 속해있던 맨체스터 팀은 FA(축구 협회:Football Association)컵 준결승에 오르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세 번이나 차지한 브라질. 이런 브라질에 축구를 알린 사람은 찰스 밀러(Charles Miller)라는 영국인이었다. 1880년대 초, 브라질로 이민을 간 찰스 밀러의 부모님은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영국으로 보냈다. 10년 뒤, 브라질로 돌아온 그가 갖고 온 것은 다음 세 가지였다.
·몇가지 학위 증서
·축구공 2개
·완벽한 축구 장비 한 세트
영국에 도착해서 축구를 알게 된 밀러는 사우드햄튼 팀에서 뛰었으며, 브라질로 돌아간 뒤에는 `위대한 축구`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처음 축구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상파울로 철도회사` 같은 곳에서 일하던 영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가스 회사 사람들을 상대로 브라질 최초의 축구 시합을 하고 4대2의 승리를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차가 브라질 축구의 탄생에 도움을 준 셈이다.
# 러시아 축구화의 비밀
두 명의 영국인, 차녹 형제가 러시아로 간 것은 1887년이었다. 모스크바 근처에 공장을 갖고 있던 두 형제는 축구팀을 만들기로 했는데, 문제는 축구화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두사람이 아니었다. 차녹 형제는 사람들의 신발 바닥에 징 대신 장식못을 받아서 축구화를 만들었다. 물론 모든 작업은 이들 소유의 공장에서 이루어졌다.
효과가 좋았을까?물론이다. 차녹 팀은 모스크바 리그에서 5년 연속 우승을 거두었다.
# 늦게 배워 앞지른 독일
독일에 살던 영국 학생들이 축구를 하기 시작하 것은 1860년대. 이 무렵 비로소 축구가 독이 ㄹ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899년, 처음으로 잉글랜드 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와서, 독일의 축구 발전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이후 잉글랜드 축구단은 시합에서 독일에게 질 때면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가슴아픈 전설도 있었다.
# 올림픽 챔피언
19세기 말, 전세계 스포츠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4년마다 ㅡ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ㅡ 열렸다.
따라서 올림픽 우승팀은 곧 세계 챔피언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 축구 종주국 영국이 올림픽에 안 간 이유
축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 때였다. 이때는 이전과는 달리 정식으로 토너먼트가 열렸으며, 영국도 단지 잉글랜드만이 아닌 대영제국 전체의 정식 국가대표팀으로서 출전했다. 영국응ㄴ 결승전에서 덴마크를 2대0으로 이겨, 명실공히 축구 종주국으로서 체면을 유지햇다. 또, 4년뒤 스웨덴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에는 지난번의 우승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이때에도 역시 결승전에서 역시 덴마크와 맞붙었는데, 이번에는 4대0으로 이겨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하지만 선수들 각자에게 메달을 주는 요즘과는 달리 금메달이 단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이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않음. 제1차 세계대전(1915~1918)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영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온 다른 나라들에게 질까 봐 겁나서였겠지. 벨기에가 스페인을 뿌리치고 첫 금메달 차지.
1924년 파리 올림픽. 영국은 역시 같은 이유로 불참. 남미의 우루과이는 1924년 청므 출전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 우루과이 선수들은 당시 유럽에서는 보지 못했던 독특한 플레이로 5경기에서 20골을 넣었으며, 단 2골만 허용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이번에 영국은 반대하는 의미로 불참. 무엇에 반대했을까? 바로 `돈`이었다. 올림픽은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한 경기이기 때문에 참가 선수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는데, 영국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느라 선수들이 직장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상하기 위해 위로금 명목을 돈을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은 이미 올림픽에 불참한 뒤였기 때문에 돈을 받지 못했다. 이 해에 우루과이는 다시 한 번 영광을 재현했는데, 이때 같이 금메달을 다툰 나라는 같은 남미 국가인 아르헨티나였다. 축구는 이제 세계적인 경기가 되었다. 우루과이를 승리로, 남미국가들의 실력이 유럽 국가들을 따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정말일까? 그럼 우루과이가 세계 제일의 축구 국가일까?
이런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올림픽에는 순수한 아마추어 선수만 뛸수 있기 때문이다. 1928년까지는 전세계의 많은 선수들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선수였다. 따라서 올림픽으로 세계 최고를 결정할 순 없는 것이다. 특히 프로라는 이유로 고국에 남아있어야 하는 선수가 있었다면....
하지만 올림픽 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올림픽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면, 누가 세계 최고인지 가리기 위해서는 프로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마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 선수가 모두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세계적인 축구 대회 말이다. 그럼 이 경기를 주최할 곳은? 당연히 FIFA였다. 마침내..
# FIFA와 월드컵
FIFA는 Federation Internation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영어로는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Associations, 우리말로는 국제축구연맹)의 약자로, 1904년 이미 축구 협회를 만들어 클럽 대항전을 열고 있던 유럽 국가들이 설립했다. FIFA의 설립국은 7개국이었다.
# FIF의 설립국은?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으로 축구가 처음 만들어진 축구의 고향 4개국(즉,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모인 것은 1905년으로, 비유럽국가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FIFA가 1904년에 한 일 중 하나는 프로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세계 축구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지만, 1928년까지는 별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엇다. FIFA는 마침내, 두 명의 프랑스인, 줄 리메(Jules Rimet)와 앙리 들로네(Henry Delauney)가 주축이 되어 월드컵을 탄생시켰으며, 첫 번째 토너먼트는 1930년에 개최 되었다. 세계 규모의 축구 대회를 구상한 지 10년만에 성사를 본 줄리메씨는 기꺼이 높이 30cm, 무게 약 1.8kg의 순금 컵을 기증했고 국제축구연맹은 이 컵에 기증자의 이름을 따 `줄리메 컵`이라 이름붙었다.
경기에는 FIFA의 설립국이면 어디나 참가할 수 있었지만, 불해하게도 축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참가할 수 없었다. 돈을 주지 않는다고 올림픽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 국가들은 모두 FIFA로부터 거절당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대망의 새 역사 탄생의 현장으로 가는 배를 놓친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