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살까, 누구와 살까. |
송 혁 기(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나 살아갈 곳, 어디를 택할까? 어진 사람들 있는 곳이 좋겠지. 난초 있는 방에선 향기 스미고 생선가게 있으면 악취 배는 법이니.” 목은 이색이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제목으로 삼아 지은 시의 첫 부분이다. 공자 이래로 유가 지식인들은 어디에 살 것인가를 어떤 이들과 함께할 것인가의 물음과 동일시해 왔다.
“성인 공자도 마을 사람 잘 택하라 경계하셨고 증자는 이문회우(以文會友)하여 인덕을 이루라 했네. 늙어가며 더욱 학문에 소홀함을 깨닫게 되니 빈손으로 또 봄을 기다리는 게 부끄럽구나.” 퇴계 이황이 70세에 지은 시이다. 출사와 퇴임의 긴장 가운데에도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일을 무엇보다 즐긴 퇴계였다. 그럼에도 좋은 이들과 함께 머물며 학문으로 교유하는 것은 여전히 더 이루어가야 할, 진행형의 꿈이었다.
어디에 살지는 요즘 사람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구와 함께 살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인다. 골목을 오가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마을의 개념은 사라지고, 같은 승강기를 이용하는 아파트 이웃과도 인사 나누기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대가족에 대비되는 새로운 현상을 가리키던 핵가족이라는 용어조차 어느새 잊혀가고, 1인가구의 비율이 30%를 넘어섰다. 함께 사는 식구조차 부담스러운 마당에 다른 집 사람과의 소통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여길 법도 하다. 혼자 방에만 있어도 세계 각지는 물론 상상의 공간까지 누비며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 시대다. 굳이 성가시게 현실의 이웃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아파트에서 꿈꾸는 마을공동체
필자가 사는 ‘위스테이별내’는 주택도시기금과 협동조합이 공동의 지분을 가지는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이다. 시공사가 아닌 입주민이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형 마을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다. 2017년 협동조합 설립 후 2020년 입주에 이르기까지, 공간 설계부터 운영 프로그램 수립 등의 과정을 조합원이 참여하여 진행했다. 동네카페, 공유주방을 비롯해 놀이방, 책방, 체육관, 목공실, 스튜디오 등 일반 아파트에 비해 훨씬 많은 커뮤니티 시설이 조합원 투표를 통해 조성되었다.
이제 입주 3년차. 협동상회와 공동육아, 방과 후 돌봄 교실 등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고, 자발적으로 만든 20여 개의 동아리에 참여하는 인원이 300여 명이다. 마을형 평생교육 플랫폼 ‘백 개의 학교’에서 서로 재능을 나누고, 소통, 교육, 공간 등을 위한 10여 개의 자치위원회가 활발하게 운영되며, 아파트 내에서 창출한 일자리도 40여 개에 이른다. 요리교실과 1인가구 식사모임, 인문학 강연, 음악 감상 등의 행사가 이어진다. 잔디 광장에서 동네 아이들의 축가와 함께 입주민 결혼식이 진행된 적도 있다. 함께 빚은 막걸리를 나누고 다양한 공동구매가 이루어진다.
입주민끼리 눈만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한다는 게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어울려 노는 아이들 소리가 끊이지 않고, 엄마 아빠도 서로 알고 지내다 보니 잠시 외출하며 이웃집에 아이를 맡기는 일도 자연스럽다. 코로나19로 격리 생활을 해야 하는 집의 현관문에는 이웃들이 마련한 반찬과 먹거리가 연이어 걸리곤 했다. 마음 맞는 가족들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먹고 마시고 함께 여행도 다닌다. 491세대 모든 입주민이 한결같지는 않지만, 각자의 형편과 의사에 따라 꽤 많은 이들이 현실의 이웃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성가시기는커녕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일상의 봄날
아파트로는 첫 번째 시도였기에 적잖은 관심을 받아 왔고 꽤 긴 분량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부정적인 댓글도 제법 있었다. “기사만 읽어도 너무 피곤하다”는 반응부터, 심지어 “지옥이다. 공짜로 살라 해도 안 갈 거다”는 극단적인 내용까지 있었다. 삶에 지치고 관계에 실망한 모든 이들에게 이런 공동체를 강요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연약한 인간으로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원하는 이들이 협동조합으로 모여서 ‘느슨한 마을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대안적 시도의 하나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인위미’니 ‘이문회우’니 하는 거창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살 맛 나는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독특한 즐거움인지 다시 발견하고 조금씩 더 깨달아가고 있다.
퇴계는 앞의 시를 음력 11월에 지었는데, 결국 기다리던 봄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루가 다르게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처럼 새로운 봄이 또 기적처럼 찬란하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4월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봄이 영원히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와 살 것인가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볼 때다. 우리에게 남은 봄이 다하기 전에.
글쓴이 / 송 혁 기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고전의 시선』, 와이즈베리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한국고전번역원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공저), 돌베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 월인
『나만이 알아주는 나 : 조귀명 평전』,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