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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가 조금 넘어 보정역에서 내린다. 오늘은 광교산을 수지에서 찾아올라가 지지대고개로 내려오려 한다. 오늘의 산행코스를 이렇게 잡은 것은 산행 들머리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을 만나고, 산행 날머리에서 정조 대왕을 만나기 위한 것. 택시를 타고 조광조 선생 묘소로 가자고 하니 운전사는 웬 묘지를 가느냐는 표정. 그렇겠지. 운전사로서도 정암 선생의 묘소를 찾는 손님을 만나기란 드문 일이겠지. 나는 운전사가 알만한 묘소 인근의 아파트 단지를 이야기 해준다.
8:25경 정암 선생의 묘소 앞. 묘소는 수지대로에 바로 다가와 붙어있다. 아니지. 수지대로가 정암 선생의 묘소 바로 앞까지 침범해 들어온 것이지. 정암 선생이 처음 이 묘소에 들 때에는 한적한 광교산 산자락의 땅이었을 텐데, 지금은 수지가 개발하면서 바로 묘소 앞으로 차들이 달려 나가니 이래서야 정암 선생이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묘역으로 들어가니 먼저 맞이하는 검은 대리석 비에는 정암 선생이 사약을 받고 죽기 직전에 쓴 절명시.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밝게 비추리
요순(堯舜)의 이상 국가를 이 땅에 실현하려던 38살의 이상주의자 개혁정치가가 사약을 앞에 두고 이 시를 지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암은 죽을 때는 훈구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다행히 후에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었다. 절명시 옆에는 숙종이 정암집 발간에 즈음하여 자기의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도 같이 있다. “죽음에 임하시어 남긴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어리더니 이제 선생의 글을 읽음에 도덕의 밝고 높으심을 더 더욱 알겠노라...”
나는 정암 선생의 묘로 올라가 잠시 묵념을 하며 정암 선생이 그토록 펼치고 싶었던 이상 국가가 지금 이 후손들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구현되기를 기원한다. 무덤 앞에는 노송이 허리를 숙여 머리를 땅에 대고 있다. 저 노송은 정암 선생에게 경배를 올리는 걸까? 아니면 정암 선생의 억울한 죽음에 엎드려 통곡하는 것일까?
이제 발길을 심곡서원으로 돌린다. 심곡서원은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되어 그 해에 임금으로부터 심곡(深谷)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대원군의 엄격한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심곡서원의 현판에는 흰 글씨로 경인 7월 27일에 사액 받았음을 자랑스럽게 써놓고 있다. 심곡서원에는 정암 이외에도 양팽손이 같이 배향되어 있다. 양팽손은 정암이 사약을 받을 때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정암이 숨을 거두자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정암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이듬해 이곳으로 이장까지 해주었다. 양팽손이 아니었던들 정암의 시신은 들짐승의 먹이로 사라졌을 것이 아닌가?
이제 힐스테이트 아파트 옆으로 하여 산으로 오른다. 군 철조망이 나타난다. 철조망에는 간격을 두고 깡통이 매달려 있다. 누군가 침입하려 하면 깡통이 흔들려 소리가 나게 하려는 것일 텐데, 글쎄~ 요즈음 실제로 저 깡통 덕을 본 적이 있을까? 가다 보이는 경고문은 의례 그러려니 하는데, 이 문안은 참 신선하다. ‘즐거운 날 되세요! 도움 필요시 부대로 전화 주세요. 031-XXX-XXXX'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예전 군부 독재시절에는 어찌 이렇게 군부대 담벼락 바로 옆으로 하여 등산을 할 수 있었겠으며, 조금만 이상하게 보이면 초병한테 안 좋은 소리 듣기 십상이고 심지어는 카메라 필름마저 뺏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즐거운 날 되라며,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 달라니...
길은 매봉을 넘어가고 나는 잠시 매봉샘에서 목을 축이고 계속 전진하니, 9:32경 버들치 고개에 도착. 고개에는 성복동으로부터 올라오는 길이 콘크리트 포장되어 넘어가고 있다. 버들치? 무슨 뜻일까? 버드나무가 많은 고개? 만약 그렇다면 치는 고개 치(峙)? 고개 ‘치’라면 버들치 고개는 고개를 중복하여 붙인 이름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보며 계속하여 광교산으로 나아가는데 차들이 달려 나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이미 산속 깊이 들어왔는데, 웬 차소리? 바위 위로 올라가 쳐다보니 용인고속도로가 지금 내가 나아가는 능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용인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좌우로 숲속이 펼쳐지니 기분이 좋던데, 이렇게 숲속에서 고속도로를 바라보노라니 저렇게 숲을 파괴하면서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하는 회의감이 든다.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구나.
10:04경 용인시 경계를 지나 수원시 하광교동으로 진입하니 여기서부터는 수원시. 조금 더 전진하니 경기대에서부터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이제 형제봉까지는 1km,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까지는 3.5km란다. 3년 전 이맘때쯤에 경기대에서 이 길로 올라갈 때에는 메마른 날씨로 등산객들의 발걸음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고생했는데... 10:41경 형제봉(448m) 도착. 원래 일기예보상으로는 비가 온다고 한지라 비록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으나 운무 때문에 경치를 뚜렷이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이제 양지재로 내려섰다가 비로봉으로 올라간다. 비로봉으로 오를 때 잠깐 등산로를 벗어났다. 등산로에서 70m 떨어진 곳에 김준용 장군 승전기념 암각비(岩刻碑)가 있기에 이를 보기 위함이다. 병자호란 때 김준용 장군이 이곳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워 청 태종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楊古利)의 목을 베어, 사기가 높아진 아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정조 때 축성 책임자 채제공이 수원 화성을 쌓으면서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에게 이 얘기를 듣고는 이를 기념하는 글을 새기게 한 것이 바로 이 암각비. 과연 숲속으로 들어가니 바위에는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忠襄公 金俊龍 全勝地)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곳에 산성이 있었단 얘기는 못 들었는데, 어떻게 이 높은 데까지 올라와서 전투를 한 것이지? 당시 전라병마 절도사였던 김준용 장군은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여 이곳 광교산에 군진(軍陣)을 설치하였고, 이를 안 청나라 군대가 공격해 들어온 것. 암각에 새겨진 ‘호남병(湖南兵)’이란 바로 김준용 장군이 이끌고 온 호남의 군대를 말하는 것이겠지.
11:25경 비로봉(488m)에 도착. 나무로 건축한 팔각정을 보니 수원지방법원 근무시 직원들과 광교산을 오를 때 저 정자 안에서 점심을 먹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지금은 여러 사람들이 정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냥 지나쳐 토끼재로 내려섰다 다시 치고 올라가니 11:54경 드디어 해발 582m의 광교산 정상이다. 본래 광교산은 광악산이라 했는데,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평정하고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이 산을 부처의 가르침이 내린 산이라고 하여 광교산(光敎山)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백운산을 향해 간다. 백운산을 향해 가는 길은 형제봉에서 시루봉까지 가는 길처럼 심하게 오르락내리락 하지는 않는다. 등산지도에는 이곳 능선을 억새밭으로 표시하였는데 억새밭은 어디? 가을이 되어야 정체를 밝히려나? 12:57경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 사이트를 우회하여 백운산에 도착. 이곳에서는 서쪽을 향하여 시원스럽게 뚫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서해의 푸른 바닷물까지 눈에 들어오는데 지금은 물방울을 머금은 물안개가 몰아쳐 올라오고 있어 아무런 풍광도 바라볼 수 없다. 이곳에서 계속 전진하면 바라산, 우담산을 거쳐 내려가 하오고개에서 다시 청계산으로 올라붙을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지지대고개로 가는 길을 택해 내려간다. 미군 사이트 때문인지 중간의 헬기장까지 내려가는 길은 콘크리트로 덮여있어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고생한 내 발에 계속 잔 펀치를 가한다.
하산길은 생각보다 꽤나 길다. 광교산 산세가 결코 작은 산세는 아니라는 얘기. 그래서인가? 길옆에는 멧돼지 발견시 대처요령이 걸려있다. 멧돼지와 마주치면 겁먹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고 침착하게 멧돼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는군. 천적이 없으니까 녀석들이 도시 인근의 산까지 나타나나? 2:32경 영동고속도로 밑을 지나가는 토끼굴에 도착. 저 위로 차를 타고 많이 달려보았지만 요 밑으로 이런 토끼굴이 있는 줄은 몰랐네.
2:35경 토끼굴을 지나 드디어 지지대고개로 내려오니 바로 옆으로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보인다. 프랑스군이 한국에 파병된 뒤 처음으로 숙영지를 만든 곳이 수원이라 이곳에 참전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프랑스 참전 기념비는 일반적 기념비와 달리 고분을 연상케 하듯이 주위를 쌓아올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세워놓았다. 문 앞에 쓰여 있는 글귀는, “정의와 승리를 추구하며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 바친 288명의 고귀한 이름 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기념비를 고분처럼 쌓아올려 조성한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죽어간 288명의 프랑스군의 고귀한 영령들이 이곳에서 편히 쉬라는 의미가 담긴 것인가? 잠긴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전면의 벽에는 28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지대 고개는 느릴 지(遲)자를 연거푸 써서 지지대(遲遲臺) 고개라고 한다. 당연히 뭔가 사연이 있는 이름이다. 정조는 주로 이 고개를 넘어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이 있는 수원 화산의 현릉원에 참배하러 갔었다. 그런데 돌아갈 때 이 고개를 넘어가면 더 이상 현릉원을 바라볼 수 없기에 정조는 이 고개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고개 위에서 한참이나 머물다가 돌아섰기에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돌아갈 때만 그렇게 지지(遲遲)했겠는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이 고개를 오를 때에도 어서 빨리 고개 위에서 현릉원을 바라보고자 정조는 ‘아직도 고개를 넘지 못하느냐?’며 더딘 행렬에 답답해하였으리라.
이런 정조의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하여 1807년(순조 7) 화성 어사 신현이 이 고개 위에 지지대비를 건립하였다. 나는 고개 건너편에 있는 지지대비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 고개 위를 지나가는 1번 국도를 횡단하고자 하나 도대체 건너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8차선의 1번 국도라 횡단보도는 저 멀리 고개 아래에나 내려가야 있고, 그렇다고 하늘을 보나 땅밑을 보나 건너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래도 되는 것인가?” 지지대비를 보기 힘들어서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지대고개는 바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이 지나가는 고개가 아닌가? 사실 나는 한남정맥의 길을 따라 지지대 고개로 내려온 것이고, 여기서 고개를 건너 내처 오봉산까지 한남정맥을 더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9 정맥 중의 하나인 한남정맥을 이렇게 끊어놓고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도 건너갈 수 없게 만들다니... 인간들이 이렇게 산의 맥을 끊어놓고 요즈음 뒤늦게 반성하며 이를 잇고자 생태다리를 만들던데, 이곳에는 그런 계획도 없나?
할 수 없이 지지대비는 강 건너 님을 보듯 바라만 보고 버스를 타기 위해 고개 아래로 내려가는데 바로 효행공원이 나타난다. 정조의 효심을 잘 나타내는 지지대 고개라 바로 이곳에 효행공원을 만들었나보다. 공원에는 지지대고개의 주인공인 정조 대왕이 곤룡포를 입고 서있다.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정조 대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일까? 정조대왕상 밑으로는 효행기념관. 수원시는 정조 대왕의 효심을 시의 브랜드로 삼으려는지 이런 기념관이나 동상 말고도 ‘효원(孝源)의 도시, 수원’을 시의 구호로 삼고 있다. 내가 수원지방법원에 근무할 때에 효원의 도시에 관해서는 많이 접했던지라,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대부분의 전시물들은 익히 알거나, 전시물을 보면서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들이다.
그중 정조 대왕의 효심을 나타내는 전설 하나만 소개할까? 정조는 현릉원을 오가는 길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많이 심도록 했는데, 송충이가 극성을 부려 현릉원 일대의 소나무 지대까지 이놈들이 침범한 것이다. 하여 송충이 한말에 엽전 일곱 푼을 품값으로 주어 송충이 퇴치작전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송충이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나? 보고를 받은 정조가 현릉원이 있는 수원 화산에 도착하여 둘러보니 과연 성한 나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송충이의 피해가 심한 것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정조는 송충이 한 마리를 맨손으로 잡아 입에 넣고는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그리도 정성껏 모시는 친산(親山)을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엄하게 꾸짖은 것. 그 순간 정조의 꾸지람을 알아들은 것처럼 송충이들이 일제히 땅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조가 살아있는 송충이를 입으로 깨물었을까만은, 그만큼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이런 전설을 낳게 한 것이리라. 효행관을 보면서 새로 알게 된 것은 정조가 그림도 잘 그렸다는 것이다. 효행관에는 정조가 그린 국화도(菊花圖) 사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은 보물 제744호란다. 설명을 보니 정조가 그린 국화도는 꾸밈없는 묘사와 청초한 필법으로 조선 후기 문인화의 한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한국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군. 정조는 나라를 잘 다스린 성군일뿐만 아니라 시·서·화에도 능통한 진정한 선비였구나.
이제 고개 밑으로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다가가니 머리 위로는 높은 교각 위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 눈에는 길 건너편의 옛 경수(京水)간 국도변에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이 보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심게 한 소나무 500그루. 당시 심은 소나무들은 대부분 고사하였지만 아직도 남아 그 시절을 증언하는 소나무에 대해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1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지. 문득 내 눈에는 저 노송지대 사이로 지나가는 정조 대왕 행차의 환영이 보인다. “대왕이시여! 왜 그리 갑자기 돌아가셨나이까? 대왕께서 좀 더 살아 정약용, 이가환과 같은 실학자들과 함께 이 나라 정치의 풍토를 바꿔놓았던들, 그 후 우리나라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겠나이까?” 정조는 인자하게 웃으며 지나간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느니라. 이미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 것. 너희 후손들이 내가 못다 이룬 꿈을 꼭 이룩해주기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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