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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 갈라 1,6-12
복 음 :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원한 생명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며칠 전 영명축일에 초등학교 친구 딸인 수녀님으로부터 흰 도자기의 성작과 성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수녀님이 특별히 외숙모에게 부탁하여 제작된 조선시대 백자를 연상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은은하고 그윽합니다.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편안하고 싫증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전통미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듯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저에겐 이 또한 영원한 생명의 사랑의 체험입니다.
바로 이 성작과 성반으로 오늘 미사를 봉헌합니다.
어제 미사 마치기 전 공지 사항 때의 유쾌한 여운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마침내 수사님들 기도와 일의 은총의 열매인 배가 수확되었습니다.
맛있고 양이 적어 10월 중순 전까지 다 판매될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미사 후 정원에서 시식회와 더불어 판매가 있습니다.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고 미사 후에는 성황리에 축제 같은 상황도 펼쳐졌습니다.
이 또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일 것입니다.
기도와 일의 은총의 열매, 축복의 열매, 하느님과 인간의 합작품인 배 열매를 먹으니 말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예나 이제나 구도자의 질문은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시험하려고 했던 질문과 일치합니다.
저도 이런 심정으로 27년 전, 답답한 심정에 지금은 고인이 된 어른 수도사제에게 드렸던 질문이 생각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어른은 가만히 웃으면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그냥 살면 되.” 하고 말씀하셨고 평생 잊지 못하는 말마디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이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물음이나
대동소이한 구도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되물음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이어지는 율법학자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답변이 평범하나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요약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 율법학자들이 둘째 계명에도 첫째 계명과 같은 중요성을 부여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첫째 계명은 신명기 6,5절, 둘째 계명은 레위기 19,18절을 이용한 것입니다.
바로 루카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음만 먹으면 활짝 열려있는 구원의 문,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났어야 할 율법교사가 자존심이 상해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바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루카에만 나오는 복음의 백미 같은 비유입니다.
강도만나 초주검이 된 유대인을 구한 것은 유대인 사제도, 유대인 레위인도 아닌
차별받고 무시 받고 냉대 받던, 사마리아 이교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나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비유를 읽는 독자들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는 지요.
사마리아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는, 또 우리의 이웃에 대한 편견을 깨는 회개의 비유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한마디로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결론하여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사고의 관점을 180도 바꿔놓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나 중심에서,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물음으로,
곤궁에 처한 이웃을 나 대신 중심에 놓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이기적 관점에서 묻지 말고,
‘곤궁에 처한 이들이 이웃이 되어 주라.’는 율법교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고의 전환, 관점의 변화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아니 지금 여기에서 작게 크게 곤궁에 처한 이웃들이 보일 것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예수님의 물음에 율법교사의 답변입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곧장 이어지는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자비’란 말과 더불어 아침 성무일도 때 몇몇 성구도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희생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지혜를 원하시나이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그리스말에서는 ‘베풀다’와 ‘하다’가 같은 동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37절에서 2회, 25절과 28절에서 2회, 도합 4회 나오는데
바로 제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애덕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너도 가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궁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한마디 말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기도 많이 해서 성경공부 많이 해서라기보다는
곤궁에 처한 이웃에 대한 구체적 자비행을 통한 은총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복음 역시
오늘 복음과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종, 온통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여 온갖 선입견과 편견에서 해방되어 모두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의 복음을 선포하며 자비행에 항구했던
복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 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오로였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시고,
자비의 사람으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0년 초반, 어느 본당신부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에 아이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다 신부 탓이야. 조금만 관심을 주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아이에 대한 신부님의 관심이 커서인지 이 본당에는 많은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신부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의 말씀이 생각나서 “요즘에도 아이들이 성당에 많이 나오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당에 아이들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학원에 가느라 성당도 나오지 않고,
또 성당 나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성당으로 이끌기가 정말로 힘드네. 어떤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어.”
신부님께서 관심을 거둬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과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아이를 향한 큰 관심을 가지면서 나름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아이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단순히 신부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문제점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떠한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고 이러한 안이한 생각이 또 다른 실패만을 맞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포기 상태가 되지요. “사회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는 거야.” 등의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는 다양한 각도로 문제의 해결을 살피고 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곳에서 나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하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된다고 해답을 말하지만, 이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사제,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가지요. 그들이 사랑을 몰랐을까요?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립니다.
난처한 이 순간을 피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 순간을 피하지 않고
최고의 사랑을 실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또 행동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웃이 되어준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
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드높고 푸른 가을 하늘입니다.
묘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면 드높아진 만큼 낮아집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 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묻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 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 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는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 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곧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루카 10,37).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 28; 10, 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상에서
가장 먼 것은
실천이고
가장 가까운 것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주고받는 존재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나는
착한 이웃인지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됩니다.
이웃과
우리 사이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고
아파하는 이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언젠가
우리도 쓰러질 수 있고
험한 일을
당할 수 있는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이웃들이 사라지면
우리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이웃은
먼저 쓰러진 이웃을 향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이웃들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자신이
착한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이웃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고수의 정석
전삼용 요셉 신부
1980년대 이전 바둑의 최고 고수의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중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한국-일본-중국으로 바꾸어놓은 한 사람이 ‘조훈현 9단’입니다.
조훈현 9단은 어렸을 때부터 바둑의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조훈현은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납니다. 그러나 바둑을 두는 족족 패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일본에는 바둑의 수를 정리해 둔 ‘바둑의 정석’과 같은 책이 있었습니다.
조훈현 9단은 창의력은 있었지만 기본기가 되어있지 않아
바둑의 정석을 배운 이들에게는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혼자 뛰어나도 역사 안에서 여러 고수들이 정리해 놓은 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본인들이 역사 속에서 정리해 놓은 바둑의 정석을 공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게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넘어서려면 정석대로만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정석으로 두는 수를 읽고 한두 차례 창의력을 발휘한 수를 두어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골목 상권을 살려준다는 백종원씨 프로그램에서 한 가게 주인에게 백종원씨가 지적한 것은
그들이 파는 기본적 메뉴에 대한 충고였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와서 보니 그 충고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신메뉴를 개발하여
그 앞에 갖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백종원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가게 주인에게 ‘기본’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팔고 있는 것의 맛이 기본이 안 되는데 신메뉴만 내어놓으면 무엇하겠냐는 말입니다.
자칫 고수들은 창의력이 발달하여 남들과 차별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기본 없는 차별화는 기둥 없이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차별화는 기본적인 구조에 장식만을 변형하는 것입니다.
집이 버텨줘야 거기에 창의력을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집도 만들 수 없는 목수가 큰 건물을 짓겠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짧은 시간 출전하여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스포츠 스타가
‘메이 웨더’라는 미국인 권투선수였습니다.
그는 수비 위주로 경기를 하지만 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펀치 한두 번 치는 것이 점수 차이를 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경기를 준비하며 매일 6시간씩 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 펀치 연습을 하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권투선수가 하루에 만 번 이상씩 펀치연습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고수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기본기입니다.
기본기가 안 된 상태에서 경기에서 이기는 방법만을 연구해봐야 이런 선수에게는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면
그 주제는 성사가 교회에 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손을 들고 ‘그러면 성당 안 다니는 사람들은 다 지옥가나요?’라는 식으로 질문합니다.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먼저 성당 안 다니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먼저 생각해주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문제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신앙의 고수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기본적이어서 거의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은 왜 내려오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기본임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도 그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고수는 언제나 기본에 충실합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율법은 대답해줄 수 없는 고수로서의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본당에서 열심한 봉사자가 자매들만 모여 있으면 듣기에도 민망한
농담을 하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농담을 하는 사람은 속에 그런 생각이 가득 찬 사람입니다.
봉사를 많이 해도 기본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율법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지 않는 것을 본인도 알 것입니다.
기본을 갖추지 않고서는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기본이란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과 행위를 스스럼없이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매일미사에 나오고 성당에서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해도
신앙의 기본이 안 된 사람입니다.
자신 있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을수록 기본에서 벗어나지는 않는지 먼저 살펴야합니다.
복음의 빛: 매일 성경 묵상
염철호 신부
•시작기도
성령님, 당신 빛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말씀 들여다보기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율법교사가 율법의 핵심에 대해 묻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당시 율법 교사들은 율법의 핵심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자신의 관심 주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가져와 물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이 관심을 두는 질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당신을 시험하려는 그를 도리어 시험하시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율법 교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진정 율법의 핵심임을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옳게 대답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던진 질문에 스스로 옳게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이 옳게 대답했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고 다시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또한 율법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던 주제입니다.
어디까지 이웃에 해당하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인만을 이웃으로 보아야 한다고 여겼고,
또 어떤 이들은 개종자들까지도 이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나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이는 누구나 이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기에는 유다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니 이웃의 범위가 매우 넓어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율법교사에게 이웃이 되어주라고 권고 하십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정의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말고,
가서 어려운 이를 도우며 직접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진정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건드리는 말씀 한 마디
•말씀 따라 걷기
*오늘 복음 가운데 30-37절을 여러 번 읽어보자.
*나는 진정으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
•마침기도
주님, 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야곱의 우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