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예레미야(3~5장) 묵상
1 회개(예레미야 3장)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예레미야 3:1)
예레미야는 3:1-5에서 유다 백성들을
자기 남편에 대해 배도한 아내로 묘사한다.
예레미야는 신명기 24:1-4의 율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혼인법 조항에 따르면
불미스러운 일로 이혼당한 여자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경우
전 남편은 그 여자와 다시 재혼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는 1절에서 논쟁조로 3가지를 연속 질문한다.
첫째,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둘째,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셋째,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겠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재결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유다 백성의 현 상황은
이러한 율법적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합법적으로 이혼한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부정을 행한 것이다.
그것도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했다.
게다가 다른 “한” 남자만 상대한 것도 아니고
“여러 명”에게 마치 고멜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창녀 짓을 했던 것이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이혼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재혼을 했으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한데,
하물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유다 백성이
본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회개가 가능한가?
여기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인간은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의 결과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의 결과이다.
2. 입에 발린 회개와 계속되는 악행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예레미야 3:5)
가나안의 신들(바알)에 대한 끊임없는 행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땅의 풍요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행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함께 섬기는
종교 혼합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이해한다(렘 2:2; 참조. 호 2:16).
이미 하나님과 결혼한 백성이
또 다른 정부인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긴다면
이는 곧 간음이요 행음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창녀의 낯을 가져서 수치를 모른다”(렘 3:3).
유다의 뻔뻔스러움은 도에 지나쳤다.
3. 언니 이스라엘의 파경을 옆에서 보고도
계속되는 동생 유다의 위험한 장난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예레미야 3:8)
예레미야 3:6-10의 내용은
요시야왕 때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들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이미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남유다의 그칠 줄 모르는 악행에 대하여 질타를 가한다.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 숭배에 심취해 있었다(렘 3:6).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간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내어쫓았고 이혼서까지 주었다고 말한다.
이는 주전 722년에 있었던
북 왕국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다(왕하 17:7-18).
놀라운 사실은 자매인 남유다 백성들이
이 모든 사건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워 아니하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음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매국가의 파국이 웅변하는
교훈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점에 있어서 유다의 죄는
이스라엘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렘 3:11).
북이스라엘은 배도하여 그 결과 국가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전에
선례가 없었다는 점을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유다는 자매나라인 북이스라엘이 당한 사건을 통한
경고를 받고서도 자기의 길을 바꾸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