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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수원 원문보기 글쓴이: 도류
이쯤 되면 날씨의 폭주라고 해야 할 듯싶다.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그 ‘뜨거움’에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그늘에서라도 잠시 쉬면 달아나던 그 더위가 아니다. 24시간 내내 푹푹 찐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더웠던 최근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강백(講伯)으로 꼽히는 무비 스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 봉은사로 갔다. 봉은사가 매주 진행하고 있는 ‘선교율 대법회’에서 무비 스님은 매월 둘째주 일요일에 ‘대승경전의 꽃, 법화경’을 주제로 법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법문 하루 전에 주석처인 범어사에서 봉은사로 올라와 대소사를 챙기고 있었다. 다래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서장』을 강설한 『이것이 간화선이다』가 출간돼 출판사 관계자들과 책과 관련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무비 스님은 『이것이 간화선이다』를 손에 들고 꼼꼼히 살폈다. 수없이 원고를 봤을 테지만 스님은 그래도 다시 책을 보며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책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간화선의 원형(原形) 전하고파” “한국불교에서의 대세는 간화선(看話禪)입니다. 위빠사나 등 여러 수행법들이 한국에 들어와 보급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그래도 간화선’입니다. 그런데 이 간화선이 지엽적이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돼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습니다. 또 간화선을 ‘쉽게 쉽게’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다보니 간화선이 상당히 왜곡돼 있습니다. 『이것이 간화선이다』는 다른 『서장』 강설 책에 비해 다소 두꺼웠다. 무비 스님은 “가능한 자세하게 풀어 준다고 생각을 하니 분량이 좀 많아졌다.”며 웃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 선적인 삶이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선의 여덟 가지 정신이 갖춰진 삶으로서 일상에 고고하고, 유현하고, 자연스럽고, 탈속하고, 간결 소박하고, 팔풍(八風)에 부동하며, 변화무쌍하고, 정적(靜寂)한 삶을 말합니다.
『서장』은 무비 스님이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선방에 갈 때 챙겼던 3권의 책 중 하나라고 한다. 무비 스님이 선원에서 정진할 때 바랑에 넣었던 3권의 책은 『서장』, 『선요』, 『임제록』이다. “강원을 졸업하고 바로 해인사 선방에 방부를 들였습니다. 일주문을 나가지 않고 강원에서 선원으로 옮겼습니다. 하하. 무비 스님은 『서장』을 통한 제대로 된 간화선 공부를 강조했다. 스님은 특히 화두를 들 때의 단계를 ‘정중일여(靜中一如)’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 ‘생사일여(生死一如)’로 나누어 각 단계별 특징에 대해 자세히 풀어 놓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사일여(生死一如)입니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공부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비 스님은 수좌 출신 스님들의 일탈(?)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밥값’을 못한다는 지적이다. 말이 나온 김에 올 가을에 치러질 총무원장 선거에 대한 생각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평소에도 한국불교에 대한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아왔다. 간화선과 종단 현안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느낀 스님의 엄청난 식견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비 스님이 과연 어떻게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됐는지가 궁금해졌다. 시간을 1958년경으로 되돌렸다.
동자승이 읊은 게송에 출가 결심 경북 영덕 출신인 스님은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인근에 있던 덕흥사에 자주 놀러갔다. 친구 집에 다니듯 드나들던 덕흥사에서 하루는 또래의 동자승이 경전에 나오는 글이라며 한 구절을 들려줬다. “그 동자승이 저와 몇몇 친구들 앞에 서더니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을 읊었습니다. ‘사흘간 마음을 닦을지라도 1000년의 보배가 되고 100년간 재물을 탐할지라도 하루아침에 티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 때 이 말의 뜻이 확실하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뭔가 저에게 울림이 왔어요. 그래서 저도 평생 마음을 닦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 전반의 살림이 어려울 때라 절에서도 힘겹게 살았습니다. 행자는 물론 학인들도 대중울력을 많이 했습니다. 잠깐 은해사 강원에 있을 때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매일 대중 모두가 각자 나무 두 짐씩을 의무적으로 했어요. 또 논농사 밭농사는 기본이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면 밥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는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한 것 같습니다.” 무비 스님은 은사 여환 스님에 대해 “평생 참선만 하셨지만 절의 살림도 잘 살았던 사판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스님은 또 “지금 둘러보아도 은사스님 같은 분을 찾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범어사와 은해사 강원을 거쳐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리고는 바로 해인사 선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수납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는 최치원 선생의 출가시처럼 수행만 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선방에 갔다. “정진 초기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화두로 정진했는데 자꾸 망상이 일어나 그 다음부터는 ‘무(無)자’와 ‘염화시중(拈花示衆)’을 화두로 들었습니다.” 정진했던 선원 중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주저 없이 봉암사를 꼽았다. “마치 요순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며 무비 스님은 환하게 웃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봉암사에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유, 고우, 적명, 정광, 법련 스님 등을 비롯해 모두 10여 대중이 함께 살았는데 다들 한참 젊고 신심도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봉암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질서 속의 질서’였어요. 정해진 청규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흐트러짐 없이 선원은 운영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방에서 나오지 않고 정진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산에서 나무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공양간에만 있어요. 그래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고 각자를 존중해 줬습니다. 다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했던 스님들 모두 자유로운 가운데서도 너무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선방에서 정진을 이어가던 중 스님은 송광사 선원에서 ‘좋은 체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송광사 선원의 대중들은 예불시간이 되면 각자 맡은 전각에서 기도를 하는 ‘부전’ 소임도 함께 맡아 생활했다. 관음전 부전을 맡았던 스님은 어느 날 새벽, 예불을 하기 위해 관음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성냥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들어오는 순간 온몸이 같이 ‘번쩍’했다고 한다. 10여 년간 선원에서 ‘선(禪)’을 연마한 스님은 ‘교(敎)’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동국역경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무비 스님은 동국역경원 시절 역시 더없이 알찬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선교(禪敎)를 망라한 스승들과의 만남
선과 교를 가리지 않고 정진하기 시작한 무비 스님은 근현대의 여러 선지식들을 모시면서 공부했다. “저는 스승 복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선지식들이 계시는 회상이 있으면 보따리 싸들고 찾아 다녔지요. 동산, 효봉, 구산, 성철, 향곡, 춘성, 전강 스님 밑에서는 선(禪)을 배웠고 운허, 탄허, 관응 스님께는 교(敎)를 배웠습니다.” “정말로 모두 다 훌륭하신 어른들입니다. 어떤 분만 꼽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굳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고 하면, 저에게 영향을 주신 분은 탄허 스님과 성철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동을 받은 분은 춘성 스님과 범룡 스님입니다. 탄허 스님은 아주 자유로운 분입니다. 승속에 얽매이지 않으셨고 또 의식이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물론 엄청난 정진과 공부에 바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탄허 스님을 교(敎)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탄허 스님이야말로 선교(禪敎)를 제대로 겸비한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선사입니다. 법문을 들어보면 항상 선(禪)에 대한 법문일정도로 두루 밝으셨습니다. 탄허 스님께서는 또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교인재를 양성해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셨습니다.” 무비 스님은 탄허 스님으로부터 강맥(講脈)을 이어받기도 했다.
저에게 정말 스님다운 스님을 꼽으라면 저는 춘성 스님을 꼽습니다. 정말 ‘중다운 중’이었습니다. 춘성 스님은 수행자로서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았고 자기 것이라는 게 없던 분이셨어요. 망월사에서 주지 소임을 살아도 당신 방이나 이불도 없었어요. 큰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잠도 좌복 하나 배에 걸치고 자던 스님이셨습니다. 정말 수행자답게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또 그릇이 아주 큰 스님이셨어요. 대구 동화사 비로전에 계시던 범룡 스님은 정말 허점을 찾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른스님들과 살다보면 보려고 하지 않아도 스님들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밖에서는 대단한 선지식으로 알려졌지만 곁에서 보면 단점이 많은 스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범룡 스님은 정말 완벽한 스님이셨습니다. 옆에 있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 올 정도인 분입니다. 범룡 스님을 모시면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스승들에 대한 무비 스님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복이 많다.”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스승들을 모셔서일까? 무비 스님은 얼마 전부터 ‘인불사상(人佛思想)’을 강조하고 있다. 무비 스님은 회원수만 2만 명에 가까운 인터넷 카페 ‘염화실’을 비롯한 온오프 라인에서 활발한 법문을 이어가고 있다. 수년 전 죽을 고비를 넘긴 스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스케줄들을 소화하고 있다. 스님이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신심(信心)’에 있다. 지금까지 펴낸 40권이 넘는 책 역시 마찬가지다. 무비 스님은 올해 초부터는 『화엄경』 80권에 대한 강설 작업도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대작불사다. 중국 청량 스님 이후 1200년 만에 시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아 온 스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충분하게 ‘원만성취’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 ||||||||||||||||||||||||||||||||||||||||||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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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스승님께 귀의합니다._()()()_
스님^^ 고맙습니다 "신심"에 의해 여기까지 오시게 된 그 말씀이 감동입니다
정말 부처님을 떠날수 없을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대 방 광 불 화 엄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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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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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을 말한마디않고 용맹정진 공부하셨다는 부분에 가슴에 뜨거움이 느껴집니다 다시태어난다면 저도 그렁게 공부 함 해보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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