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의 고향
박운현
민족의 노래, 우리 현대시조의 산실인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태어난 곳이 바로 마산이다.
선생이 시詩를 짓고 김동진 선생이 곡曲을 붙인 “가고파”가 오늘의 산행목적지 마산으로 내려가면서 나의 머리에 불현 듯 떠오르게 한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기고파”.
이은상 선생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산의 진산, 무학산을 오르기 위해 아침 일찍 보건소직원 열 명이 한 대의 차량에 탑승하고 청도를 출발하여 마산으로 향했다. 아침 여덟 시에 청도에서 출발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어서 아침 일찍 서두르는 통에 아침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등산복차림으로 배낭을 걸머지고 단장을 지참하여 보건소로 향했다.
도착하니 일곱 시 사십오 분이었다. 이미 몇 명이 와 있었고 조금 더 있으려니 한 사람, 한 사람 속속 도착하였다. 마지막으로 수영장에 근무하는 배 주사가 여덟 시 십 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늦게 도착하여 곧바로 승차하자마자 차는 황급히 청도 읍내를 빠져나가 목적지 마산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가는 코스는 신대구김해고속도로로 차를 올려 밀양창원방면으로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그 쪽으로 향해 갔다. 아침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덥지도 않고 미풍이 살살 불어 등산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일기예보를 사전에 미리 숙지하고 오늘의 산행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기에 차질없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보건소에서 여덟 시 십 분에 출발한 차량은 청도 관문을 통과하여 신대구김해고속도로에 올려 즐겁게 얘기꽃을 피우며 신나게 달리며 내려갔다. 지나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산과 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녹음이 짙어져 경치가 뛰어나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청도, 밀양으로 내려가는 주위 산야에는 환경이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였다. 청도천, 밀양천 위로는 흰 두루미가 한가로이 날개 짓을 하며 날아가는 모습이 참 평화스럽게 보였다.
차량은 남 밀양 관문을 빠져나와 창원국도방면으로 한참을 달렸다. 창원을 지나 드디어 마산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용감한 장수 앞에 출전하는 사기 높은 병사처럼 들뜬 기분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입성하였다. 마산에 당도하니 웅장한 위용의 대도시가 바다와 무학산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였다.
바닷가에 높은 빌딩 숲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많은 차량행렬과 인파, 그리고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꽃을 피운 마산자유수출공단이 자리하고 있어 활기 넘치는 대도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이었다. 우람하게 서있는 마산시청, 또 경남대학이 옆으로 위용을 자랑했다. 저 높은 고층건물과 많은 차량들이 이 도시가 나날이 발전하고 살아 숨쉬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마산에 도착하니 아홉 시 사십 분, 청도에서 한 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초행길이라 무학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산 산복도로를 지나 쭈욱 외곽 쪽으로 달리다 보니, 무학산 등산길 진입로를 모르고 그만 지나쳐 버린 것이다. 지나가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게 들어 길을 가는 행인에게 차를 세우고 물어 보았다.
아차, 그런데 진입로를 한참 지나가 버린 게 아닌가. 그래서 차를 돌려 다시 온 길로 차를 몰았다. 드디어 무학산 진입로 입구에 도착하여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 길로 올라갔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려니 무학산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이곳으로 더 올라와서 주차를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포장마차가 양쪽 길옆으로 줄지어 있었고 그 옆으로 조그마한 사찰이 개울가 산비탈아래 매달린 듯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열 시였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울창하게 서있는 나무들은 싱그러운 초여름의 햇빛이며 적당한 비에 더욱 푸르게 문실문실 커가며 낯선 이방인들을 반겨 맞아주는 것 같았다. 저 나무들도 이방인을 맞는 어진 마음이 있는 것일까. 그야 알 수 없지만은 나그네의 마음은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산정을 향해 올라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남해바다 한려수도는 장마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연무로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맑은 날이면 남해바다가 쪽빛처럼 보일 텐데 아쉬움이 크다. 등산객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더위 때문일까? 아니면 날씨가 장마기라 비가 올 것 같아서 못 온 탓일까? 궁금증이 실타래처럼 새록새록 날개를 편다. 아무렴은 무슨 상관일까 내가 산행을 즐기다 가면 그만이지.
한참을 올라가니 산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사가 급해서 오르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산정 가까이 다가 올라서니 계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을 세면서 올라가는데 여든 아홉 계단이었다. 소재는 합성수지였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빠지면서 지쳤다. 그래도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으며 올라가야 했다. 계단난간에는 기둥과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였다. 거의 다 오르니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벤치가 있었고, 파고라가 있었고, 운동기구도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이름 하여 “서마지기”라 했다. 광장넓이가 서마지기가 되는 면적이라서 그렇게 붙여진 까닭일까.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이곳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바로 곁에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또 있었다. 광장 주위로는 진달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꽃피는 사월이면 장관을 연출할 것으로 보였다.
여기가 정상이 아닌 능선이었다. 옆으로 계단을 따라 더 올라가야 산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능선을 오르는 데처럼 계단을 세면서 오르니 삼백 사십 아홉 계단이었다. 소재는 합성수지였고. 계단 끝까지 올라가니 정상이었다. 정상부위에는 헬기장이 있어 산불발생이나 등산객 안전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헬기가 앉고 뜰 수 있도록 콘크리트바닥으로 편편하게 너른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바로 옆 최고봉은 암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정상이었다. 태극기가 국기게양대 끝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었다. 정상 표석에는 “舞鶴山”이라 새겨진 화강석 비碑가 설치되어 있었다. 산 높이가 해발 칠백육십삼 미터. 모두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끝내고서는 아름다운 풍광을 놓칠세라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바로 곁에 무선통신탑도 우뚝 서 있었다. 산정을 향해 마산 앞바다에서 물안개가 뿌옇게 엄습해 왔다. 산세지형을 타고 한 점 해풍이 불어오더니 더위가 싹 가신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온몸이 식으며 상쾌하였는데, 오래 서 있으려니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주위 산들이 운무에 가려져 시야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맑은 날이면 첩첩이 뻗어 내린 산과 바다를 보며 풍광을 즐길 수 있을 터인데 아쉽게도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었다. 잠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넓게 펼쳐진 가까운 주위 아름다운 산들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했다.
아,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찌하여 여기 이 자리에 와서 내가 서있단 말인가. 따뜻한 남쪽나라 남녘땅에 발걸음하기란 그리 쉽지 않는데…. 언제 이곳을 다시 밟아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미치니 감개무량하였다. ‘마산아, 내가 여기 왔다 가노라. 2006. 7. 8. 정오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4.19의거의 성지이기도 한 마산. 민주주의 정신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우리의 앞날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산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마음속으로 민주주의 정신이 식지 않고 활활 타오르길 염원을 하면서 아쉬움의 발길을 돌려야 했다. 눈앞에 바라보이는 망망대해 남해바다는 저 넓은 태평양 바다 속으로 유유히 떠내려가고 있는 듯 보였다.
註)제가 현직에 있을 때인 십여 년 전에 마산의 무학산을 다녀와서 기록으로 남긴 글입니다.
첫댓글 마산에 다녀왔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노산의 시비도 시민들의 반발에 부닥치기도 했지요. 노산은 그 만큼 명암이 엇갈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토론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노산 이은상. 우리 한국문학사에 빼놓을 수없는 존재로, 우리 국민 머리 속에 "이은상"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긴 인생에서 티없는 사람 있을 것인가, 없다. 좌익들이 노산을 중상모략 선동하는 걸로 알면 될 것이다. 사실 북한 김성주(개명 후 김일성)는 괴뢰집단 만들 때 우남 이승만보다 더 많은 친일파를 기용하였다. 그래놓고 걸핏하면 생사람 세워놓고 친일파로 매도한다. 친일파를 매도하여 주체사상을 만든 꼼수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기행문 속에 이은상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엿 보입니다^^그 냥, 기행이라기 보다 문인의 마음인가 합니다^^
유년 시절이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이나 어느때 들어 보아도 좋은 "가고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