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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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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심란했다. 태풍 “산산”이 몰려오면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자정 지나 겨우 좀 잦아들기는 했지만, 오늘 행사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나무뿌리가 묘실까지 파고들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산소를 파는 일도, 뼈를 주무르는 일도. 나이란, 또 그에 따른 경험의 축적이란 때로는 세상일을 덤덤하게 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포클레인과 돈이 해결해주었다. 한 사람도 지나가기 힘들 만큼 잡초가 우거진 골짜기를 튼튼한 바퀴를 둘둘 말며 힘차게 전진해온 포클레인이 일부러 벌초를 하지 않은 쑥대밭을 두어 번 파헤치니 묵은 산소는 금세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복잡한 이장(移葬) 행사를 주도하는 상일꾼이 묘실로 들어가 호미로 조심스럽게 흙을 쓸어내렸다. 침이 꼴깍 넘어가며 숨이 턱 멎었다. 그리고 얼마 뒤. 녹슨 철모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황토색 물체가 나왔다. 해골 ― 세상을 뜬지 반세기만에 내 아버지가 신선한 아침햇살 아래 처연한 몰골로 등장했다.
다른 유골은 더욱 부실했다. 엉치뼈와 슬개골을 빼고는 제대로 수습하기도 어려웠다. 일꾼들은 “흙이 좋아 육탈(肉脫)이 매우 곱게 됐다”며 명당이라고 말을 이었다.
그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걱정한 점은 산소에 물이나 차지 않았는지, 그래서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가 진흙 속에 누워계신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었다.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흙이 아주 보송보송하고 색깔 또한 싱싱하게 살아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버지가 영면했던 자리에 동전 세 개를 던지며 아버지의 목소리로 지신(地神)께 정중한 인사를 드렸다. “잘 쉬고 갑니다.”
그러자 슬그머니 다른 종류의 부아가 치밀었다.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개발 바람에 밀려 아버지의 유택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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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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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두 분이었다. 그래서 남들에게 창피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사랑을 두 배 이상으로 받고 자랐다. 생모가 큰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시켰던가. 한참 커서까지 나는 큰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분인 줄 알았다.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신 큰어머니는 “귀한 자식”이 모기라도 물릴까봐 부채질을 해주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집에 올 시간에 맞추어 고기와 두부를 넣고 끓인 찌개를 화로에 얹어놓고 나를 기다리셨고, 학기말 상이라도 타오는 날에는 무슨 임금님 칙서라도 되는 양 깨끗이 닦은 밥상에 그걸 올려놓고 수없이 절을 하셨다.
큰어머니 산소 옆으로 옮기기 위해 일꾼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칠성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지로 묶은 뒤 삼베로 다시 쌌다. 손끝에 정성이 묻어나는 듯해서 고마웠다. 이런 절차라도 없었다면 파묘라는 게 얼마나 싱거웠을까.
아들과 함께 앞뒤로 칠성판을 들었다. 너무 무게가 가뿐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내 나이 조금 더 되신 아버지는 나를 도회지에서 키우겠다고 고향 땅 금산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오랫동안 정이 든 아내와, 30대 젊은 색시 그리고 핏덩이에 지나지 않는 외아들 늦둥이를 거친 세파에 맡긴 채 눈이나 제대로 감겼을까. 먹을 걸 좀 남긴 것이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아들과 나 ― 광산김가 3대가 차 한 대에 함께 타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뼈에서 내가 나와, 다시 저 녀석 뼈를 통해 우리 가문이 이어지는구나. 초로(初老)의 촌부가 따뜻한 손을 쥐어주는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네 할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오늘 아침 할아버지 유해를 보며 첫 대면한 셈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훈기가 느껴지는 것 같구나.”
“나도 그래, 아빠.”
아들 역시 상기된 표정이었다. 군사학 시간에 빠지면 ROTC 학점이 잘 안 나온다는 놈을 억지로 끌고 와서 어젯밤에는 유성에서 가장 비싼 일식집에 가 그럴 듯하게 대접을 했는데, 이제는 “오길 잘 했다”고 했다.
그래, 이놈아. 핏줄이라는 게 이런 거 아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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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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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8경의 하나라는 구봉산 줄기. 큰어머니 산소 옆을 파는 건 바위산을 좆아내는 지난(至難)한 작업이었다. 포클레인 기사는 장비가 허연 돌가루를 뿜어낼 때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지관이 두 산소를 합쳐 1기로 쓰자고 제안했다. 두 분이 한 이불 아래 정답게 누우신 걸 아는 날엔 살아서도 눈치를 살피셨을 생모가 섭섭해 하시지나 않을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었다.
부부연이라는 게 그런 것인가. 큰어머니 쪽으로 조금 옮겨 흙을 파니 바윗돌이 나오지 않아 작업이 훨씬 수월했다. 합폄을 하고나니 산소 크기가 풍만한 젖가슴처럼 붕긋 솟아 탐스러웠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리 만들어놓기로 한 우리 어머니의 가묘 역시 바위가 나오지는 않을까.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포클레인이 다시 날카로운 이빨을 흙 속으로 박아 넣었다. 그러나 고운 흙으로 이루어졌던 아버지 산소처럼 작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모두 조바심을 내며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파내려가자 양쪽 바위틈으로 부드러운 흙이 나왔다. 정확히 관 하나를 내려놓을 만큼의 너비.
지관은 “석관보다 더 훌륭한 묘”라고 스스로의 재주를 뽐냈고, 큰어머니의 조카 ― 그러니까 나의 외사촌형 ― 는 “작은고모가 복이 많으셔서 좋은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 또한 기껍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어머니가 복이 참 많으신 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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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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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잘 했냐? 나는 잘… 안 되더라.”
악취가 진동하는 변소에서 만난 친구는 혀 꼬인 발음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다리가 휘청거려 삐걱거리는 문을 붙잡고 겨우 오줌을 누었다.
대학교 2학년 때던가. 대충 우리 아들 나이 언저리에 나는 작은아버지라는 분의 산소를 옮겨서 화장하는 현장에 서있었다. 그때도 그곳이 아파트 단지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지만, 아마도 나는 그분을 위해 자식 역할을 대신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따르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감회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불에 태운 작은아버지의 뼈를 냇물에 뿌리면서 나도 모르게, 이유도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술 ― 독주 생각이 간절했다. 부리나케 휴가 나온 친구를 불러냈다. 술이 얼근해지자 그 녀석은 “귀대하면 여자 따먹은 얘기로 신고식을 대신해야 하는데 큰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클에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고, 그 유명한 중동 10번지가 바로 옆집인 녀석이 군대에서 몇 달을 갇혀 있다가 해방을 맞고서도 휴가가 끝날 때까지 아무 짓도 못한 모양이었다.
알코올이 머리 꼭대기에 찰 때까지 마셔댄 뒤, 붉은 불이 켜진 골목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반지를 빼주자 주인은 우리를 각자 다른 방으로 밀어 넣었다. 푸줏간 조명이 겨우 나와 남을 분간하게 만드는 퀴퀴한 방에 누우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새벽녘이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는 참에 여자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래 뵈도 논산훈련소 가는 빡빡이들 동정은 내가 다 받아먹었다구.” 관록이 묻어나는 말투에서 인생선배의 노련미가 그대로 배어나왔다.
몇 달 뒤. 반지를 찾으러 대전역 부근을 어슬렁거리는데, 한약방을 하는 그 친구 아버지가 불렀다. “너, 우리 애 친구아녀?”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반지 빼주고 얼른 대전까지만 도망 오라”며 비상용으로 장만해준 어머니의 입학기념 선물은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 영원히 결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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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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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잔뜩 하늘을 덮고 있어 불안했다. “구봉산이 훤한 걸 보니 비는 안 와, 틀림없어.” 누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일꾼들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고마운 김에, 산소 위에 엎어놓은 잔디 밑에 얼른 흰 봉투를 꽂아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계신 어머니의 묘를 만들어 놓자고 했다면 내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천명의 나이.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산소 옆에 어머니의 가묘가 쌍벽을 이루는 모습이 가득 찬 곡식창고처럼 든든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이 모두 “큰일을 참 잘 치렀다”고 치사를 하셨다. “천지인(天地人)이 고루 도와주셔서 그렇다”고 답례했다. 그래, 그건 돈이나 기계의 힘이 아니었다. 태풍 가운데서도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하늘의 도움, 바위 사이에서 고운 흙이 나왔으니 땅의 도움, 땀을 뻘뻘 흘린 일꾼들과 마을 어른들의 도움.
오전에는 억지로 옮기는 것이 불만스러웠는데, 둥그런 산소와 널찍하게 정돈된 주변을 보니 이제 겨우 자식 노릇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초라한 친부모 산소에 성묘를 한 뒤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으로 장인어른 산소를 찾아가노라면 늘 아이들 앞에서 괜스레 주눅이 들곤 했는데, 올 추석부터는 조금쯤 어깨를 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추석엔 훤한 주변에 패랭이꽃을 심고 코스모스 씨를 뿌려야겠다. 그리고 내년 봄 내 생일에는 작은 나무를 한 그루 심어야겠다. 나 죽은 뒤 내 뼈를 그루터기에 뿌리면 그 나무는 나를 대신해 세상을 살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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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부추꽃, 그 환한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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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내 좋아하는 호남 시인 박남준의 “흰 부추꽃으로”)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일을 치르셨군요.. 아들은 아버지를 땅에 묻고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틀린 말 같습디다. 제 아버지는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으니까요.. 현중님 기회가 닿는다면 조만간 쏘주한잔 나누고 싶네요. 정모때 수고많으셧구요....
추석 지나고 스산한 저녁에 한잔 하시지요.
현중님 그 때 지도 낑가주시묜 안될까예
한편의 가슴찡한 소설을 읽은 듯 하네요^^ 현중님 잘 계시죠 떄 뵙고 오늘 글로써 첨 뵙네요^^ 앞으로는 자주 이렇게 좋은 글들 부탁 드릴꼐요^^ 그래도 되죠
나는 이쁜 여자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는 속없는 사냅니다.
참으로 무게있고 깊이있는 장문의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작가분의 글을 읽는듯 빼어난 문장 표현력에 감동합니다... 우리나라 양반서열을 따지기로 광산김씨가 그 첫번째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 온 터...,정말 훌륭한 가문의 후예시군요... 구봉산이라고 하셨는데여! 여산송씨의 송익필 선생(호:구봉)과도 연관이 있는 산인지요... 구봉 송익필은 이율곡선생과도 서로 친하게 학문으로 종유하셨던 학덕이 높으신 분이지요... 님의 고향 금산이라하면 호남과 금강을 경계로 대전과는 서로 이웃하는 고장이기도 하지요... 금산하면 인삼이 유명하고 추부에 중부대학교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 여행을 워낙에 좋아하다가 보니 이곳저곳 인문지리에 관심이 많지요...보학도 좀 배우고요..풍수는 관심은 있는데 정성이 부족해서요...선친 묘소로 님 양모님을 합폄하시고, 또, 생모의 가묘까지 성분하시고 돌아오시어 그 감회를 아름다운 필치로 엮어주셨네여...젊은 시절의 방황의 시절도 맛배기로 소개해주시구여...님 자제가 ROTC 지망생이군요...참 잘 생각하셨어요...장닌어른께서 국가유공자시군요...왕대밭에 왕대 난다고요...앞 알에 님 가문에 큰 영광이 있을 것이란 저의 예감입니다... 넘 넘 격조높은 글에 크게 감동먹고 갑니다...그케 행복한 한주 열어가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사계 김장생 선생에게 예학을 배웠기 때문에 광산김가와 송씨와의 혼사가 매우 많습니다. 우암 선생은 은진 송씨 - 요즘 특히 그 가문을 떼어서 회덕 송씨라고도 하는데 - 로 알고 있어서 여산송씨 가문과의 연관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구봉산은 봉우리가 아홉개라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금만 읽고 하다 다 읽고 말았네요. 현실에서 옛기억을 더듬으며 가신님을 그리워 하고서~~~
가을인데다, 나이가 나인지라.
현중님 오랜만에 뵙니다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정모때가 생각 많이나는군요 자주 뵙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간간이 만나 이슬이도 만져 보자구요 그럼 편안한 밤 되시고요
이슬이 그거 참 좋은 겁니다. 그거 없었으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또 골 때렸겠습니까? 혹시 대학로 지나다가 생각나시면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