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체제 비판은 이종욱 교수를 비롯한 서강대학파에서만 한 줄 알았는데 생각 보다 많더군요. 카페내에서 김용만선생님의 글도 있고 하니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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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體制설에 대하여
고대국가의 구조는 어떠하였으며, 고대 국가는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
이 문제는 삼국시대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에 있어 핵심이 되어온 사항이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었는가, 아니면 토착적 세력기반을 가진 족장층을 통합한 연맹체국가였는가. 아니면 성읍국가-연맹왕국-귀족연합정권체제-전제왕권체제 순으로 발전해왔는가, 그렇지 않으면 연맹체적인 부체제에서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로 진전되었는가. 이 가운데 현재 학계의 대세는 4번째 견해인 부체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체제는 초기 고대국가의 체제로서 후기 고조선과 삼국 초기의 정치체제에 해당되며, 삼국 중기이후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일종의 군현제국가의 앞단계에 해당된다.
부체제설은 70년대 인류학 이론을 도입해 Chiefdom론 등에서 한단계 발전된 논의라고 할 수 있으며, 1975년 노태돈의 '삼국시대 부에 관한 연구'라는 서울대 석사학위논문이 그 논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노태돈이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부체제론은 고대국가를 설명하는 기본적인 틀로 정착하게 된다.
지난 99년 8월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부체제론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돈은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부체제론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고 그 개념을 규정하였다. 이어서 그의 제자들은 각 나라별로 부체제에 대한 견해를 보강했다.
여호규(97 박사) - 고구려 보충 설명,
김영심 - 백제(98),
김태식 - 가야(92),
강종훈(97) - 신라,
전덕재(95) - 사료 조사,
송호정(99) - 부여,
백승충(부산대,95) - 가야
이러한 견해에다 노태돈이 후기 고조선의 체제가 부체제였음을 논증한 글을 합치면, 한국 고대사의 초기 정치제제는 부체제로 규정되어 보게 된다.
주보돈(경북대 - 신라사), 김현숙(고구려사, 96),
임기환(서울대학부-경희대박사, 고구려사, 95)
노중국(계명대학부-서울대박사, 백제사 - 소국연맹-부체제-집권적 고대국가 )
서울대 출신의 강봉룡(신라사, 94),
서의식(신라사, 94),
권오영(서울대, 96 - 소국(국)연맹체제론: 사로국연맹-집권적 고대국가 로 약간 차이)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반면 다른 학맥에서는 이와 다른 주장들을 내놓고 있다.
김정배(고려대), 박경철(고구려사, 96), 금경숙(고구려사, 95) - 군장국가-집권적 고대국가
김영하(고려대-성균관대 교수) - 귀족연합-대왕집권체제
김광수(연세대, 고구려사) - 초기중앙집권체제,
이종욱(서강대), 전미라(신라사, 98), 하일식(연세대, 98) - 소국연맹-소국병합-고대 국가
양기석(충북대) - 지역단위의 소연맹체-5부연맹체-고대 전제왕권국가
이들 가운데 부체제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은 이종욱 교수를 비롯한 서강대 학맥이다. 즉, 서울대 중심의 학맥과 이종욱을 중심으로 한 소수학파의 대립이 부체제설에서 뚜렸하게 볼 수 있다. 이전의 이기백, 김철준, 이기동, 김정배 등의 설은 이미 논의의 대상에서 물러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 다음의 표를 통해 부체제의 개념과 이에 대한 이종욱의 비판을 살펴보자. (표 해체 - 노태돈 견해 먼저, 이종욱 비판 그 다음. 번호별로 비교)
노태돈의 개념
1. 초기 고대국가는 정치적 위상을 달리하는 각급 자치체의 연합체이다. 초기고대국가를 건설하고 그 운영을 주도하며, 그 국가구조 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세력이 존재하였다. 그들은 몇 개의 자치체로 구성되어있었다. 그 자치체가 곧 部이다.
2. 部는 혈연집단이 아니며, 地緣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집단이며, 部 내부에는 계층분화가 진전되었다.
3. 각 국에서 部로 편제되었던 집단들의 범위의 결정에는 건국의 역사적 과정과 함께 종족적, 문화적인 요소가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4. 部는 왕에 의해 대외교섭권 등을 박탈당하는 등 일정한 통제를 받았으나, 그 내부의 事案에 대해선 상당한 자치력을 보유한 단위 정치체였다. 부 내에도 하위 자치체가 존재하였다(部內部).
5. 초기 고대국가의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자치체와 그 상위 정치체인 국가에 소속되었고, 그에 따라 部人들의 귀속의식 또한 兩屬性을 지녔다. 고유한 部名을 冠稱하는 것은 그런 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6. 複數의 부를 결속시키는 힘은 諸部 중 가장 강력한 部의 長인 왕을 대표로 하는 집권력이다. 왕은 大加(干)들의 대표와 같은 존재로서, 초월적인 권력자는 아니다.
7. 부의 大加(干)들은 왕실과 때로는 갈등을 이르키기도 하지만, 휘하 읍락민을 통제하는데 있어 이해관계를 함께 하였다. 초기 고대국가는 계급적 측면에선 대가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8. 피복속민 집단들 중 상대적으로 크고 유력한 세력은 ‘侯國’으로, 약소한 것은 집단예민이 되었다. 피수탈 정도 등 구체적인 예속 양상에선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를 행하면서 공납과 군사적 助力을 제공하였다.
9. 각 자치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는 집단은 읍락이다. 이 시기 읍락은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와 부내부의 읍락이나 식읍과 집단예민 등의 읍락은 그 渠帥를 통해 왕실과 대가층에 공납을 하였다. 초기고대국가의 국가구조 내에서 정치적 위상을 달리하는 각급 자치체에 속한 각종 읍락의 민은 피지배민으로서의 기본적인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부체제 하의 諸集團은 비슷한 사회적 토대 위에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10. 諸部의 대가(간)들이 참여한 제가(간)회의와 같은 회의체가 국정 운영에서 주요 기능을 하였다. 초기 관등제의 형성은 그러한 제가회의와도 연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11. 諸部와 侯國 및 집단예민을 포괄한 초기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이 諸部였고, 部의 성격이 곧 이 시기 정치구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이런 정치구조는 일정한 사회적 문화적 토대를 지니고 있었고,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므로, 한 시기의 역사적 성격을 집약해서 반영하는 하나의 體制(system)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초기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의 성격을 집약해서 部體制라 규정할 수 있다.
12. 부체제와 유사한 면은 거슬러 후기 고조선(위만조선)의 정치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이른바 정복왕조인 遼가 출현하기 이전 시기의 북아시아 유목민국가라든가, 군현제국가인 전국시대의 국가들이 출현하기 이전의 고대 중국의 국가들 등에서도 비슷한 면을 상정할 수 있다. 비교사학적인 면에서 이런 측면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13. 部는 삼국 중기 이후 점차 수도와 副都의 행정구역단위나 귀족들의 原籍과 같은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수도의 행정단위로서의 部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 부가 수도의 행정구역으로 변하는 것은 삼국의 정치체제가 부체제에서 영역국가(군현제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로 변모하는 것과 軌를 같이 한다.
이종욱의 비판
1 초기 고대국가는 정치적 위상을 달리하는 각급 자치체의 연합체였다고 한다. 그 자치체가 부라고 한다. 왕이 부장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왕은 부보다 1-2단계 높은 정치적 지배자였다(87․91). 그리고 신라 왕경의 부나 그 밑의 리의 지배세력은 그 후에도 부와 리의 통치와 관련되어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 자치권은 국왕의 통치력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의 향리들 역시 지방에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가지고 부체제론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신라의 부를 가지고 부체제론을 주장할 수는 없다.
2 부는 혈연집단이 아니며 지연에 바탕을 둔 집단이며 그 안에는 계층분화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연한 말이다. 부는 지방행정구역이고 그 안에는 신분층을 달리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부장을 배출하는 집단은 일정한 혈족집단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후일 그들을 李 씨 등의 성으로 파악하였다고 생각된다. 6부 부장들의 연합체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현재의 구청장회의 정도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3 각 국의 부는 역사적 산물이다. 실제로 신라의 6부는 사로6촌을 모체로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고구려 소국이 병합한 적어도 4개의 那들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부는 왕에 의해 대외교섭권 등을 박탈당하는 등 통제를 받았으나 내부의 통치에는 상당한 자치력을 가졌다고 한다. 고구려나 신라에 병합된 세력을 제후국적으로 편제하여 통치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부체제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중국의 춘추시대를 부체제라고 할 수 있나?
5 부체제론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소속 부와 국가의 양쪽에 속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경우 那의 제후적인 존재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 두 가지 소속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것이 부체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那는 이미 왕의 통제하에 들어 있었기에 그와 같은 사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부체제라고 하기보다 봉건제 또는 제후국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단지 봉건제라는 용어는 당시 봉건제가 존재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질문자는 한국사상 봉건제적인 시기가 있었다면 소국병합 때부터 왕권이 강화되기 전까지라고 본다.
6 왕은 대가들의 대표이나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ꡔ삼국사기ꡕ 기록을 통하여 보면 왕은 6부에 명령을 내리고 관등을 주고 병력을 동원하는 통치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왕이 6부를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왕권의 문제는 6부와 관계에서 따질 것이 아니라 왕실세력 안에서의 문제로 다루고 통치체제의 정비의 정도로 가려야할 것이다.
7 초기 고대국가는 대가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은 부의 세력과 비교하여 한 단계 위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부는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을 포함한 대가들의 연합체는 존재할 수 없다.
8 피병합국으로 이루어진 후국은 내부의 일을 자치적으로 수행하였고 공납과 군사적 조력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사정은 인정이 된다. 그러나 그 것이 어떤 이유로 부체제론과 연관이 되는가? 오히려 부치제론을 부정할 근거가 된다. 제후국의 존재를 인정하면 부체제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9 각 자치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읍락이라고 하였다. 그 것이 부체제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10 제부 대가들이 참여하는 제가회의가 국정운영의 주요 기능을 하였고 초기 관등제와도 연관된다고 하였다. 고구려나 부여 또는 고조선의 경우 제가회의를 인정하더라도 그 것이 부체제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오히려 (봉건제적인) 제후적인 존재를 인정하면 부체제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정치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창령비의 인물들을 부내부의 장이라고 하였으나 이 또한 납득이 안가는 주장이다. 제가회의는 고구려나 신라의 군신회의라고 할 수 있다.
11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의 중심을 이룬 것이 諸部였기에 부체제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거듭되지만 신라의 부는 단지 왕경의 구분일 뿐이다. 그 것을 가지고 부체제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당시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 것은 부가 아니라 부 안에 살던 그 중에도 왕도와 왕궁에 살던 정치지배세력들일 뿐이다. 그러한 사정을 이해하면 부체제론을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2 위만조선은 부체제와 유사한 정치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요동고조선, 평양고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2세기까지의 신라 등은 피병합국의 세력을 통하여 피병합지역을 통치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정치체는 군현제와는 달리 (봉건제적이며) 제후국적인 정치체라고 할 수 있다. 구태여 신라의 6부와 같이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인 부를 가지고 부체제라고 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도 사실은 관나 등이 부가 아니라 那였기에 부체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13 삼국 중기 이후 부는 성격이 변하여 수도의 행정단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6부는 6촌을 모체로 한 것이며 혁거세가 6촌을 통합하여 서라벌 소국을 형성할 때 이미 소국의 지방행정구역이 된 것이 분명하다. 단지 6촌지역에는 과거 촌장세력들이 지배세력으로 남아 있으며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강해지면서 부에 대한 통치력이 강하게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부나 리의 통치는 부와 리의 세력가들에게 맡긴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부체제론을 주장할 수는 없다. 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라벌 소국 또는 신라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안의 토착세력은 왕궁과 왕도에 살던 성골, 진골보다 낮은 6두품, 5두품이 되었을 뿐이다. 그들 부의 세력은 중앙의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었으나 그 것을 가지고 부체제를 주장할 수는 없다.
나의 종합적인 비판과 정리.
그러면 이와 같은 부체제의 문제를 정리하여 보자. 부체제란 왜 문제가 되는가?
1.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을 매우 뒤로 내리고 있다.
부체제설은 중국사에 있어서 전국시대 이전의 군현제 이전의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제후국을 가진 봉건제와는 다른 것으로 보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周가 건국하던 시기정도의 역사발전 단계처럼 보고 있다.
그러나, 서기 1~3세기까지 중국은 지방 할거정권, 즉 과거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지역적인 제후국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군현제라는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경우 군현제의 실시가 언제인가라는 문제는 대개 고구려 중,후기로 보고 있지만, 고구려 초기에 한나라의 군국제와 같은 제도를 실시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런데 부체제설은 이와 같은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우리 역사는 처음에는 강력한 국가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부체제적 입장에서는 고구려 초기에 보이는 강력한 왕권의 행위들-모본왕의 태원공격,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축조 등-의 기록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갖게 된다.
이에 반하여 김광수나 이종욱의 견해는 초기부터 왕이 강력한 정치적 지배자이거나, 귀족연합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종욱은 고구려의 경우 부에 속한 제후국은 부체제설을 부정하는 증거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차후 고구려나 신라의 발전과정을 중국과 비교하는 문제에서 더욱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2. 부체제설의 가장 근간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해석에 대한 부분이다. 부체제론자들은 소위 수정론이란 방법을 사용한다. 이종욱은 수정론은 식민사학의 삼국사기 부정론에 뿌리를 둔 한국고대사 연구를 가로막는 원흉으로 비판하고 있다. 삼국사기 수정론에 의거해 부체제설이 지지도 받지만, 반대로 부체제설을 기반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를 과감히 수정하는 자들이 나오기도 한다. 부체제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전부 믿어버릴 경우 논거의 기반이 흔들린다. 즉,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경우 초기부터 왕의 권한이 매우 강했고, 신라 6부는 왕경의 행정단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부라는 것이 혈연집단도 아니면서 부내부에 부가 있다고 했고, 부가 다른 제후국을 거느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성격은 漢나라로 보자면 제후국에 해당되는 것이 옳다. 제후국은 천자의 나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예를 차린다. 고구려 초기의 경우 이와 같은 대왕과 제후왕간의 관계가 보인다. 그런데, 연나부, 소노부 등을 제후국으로 보지 않고 국가 성립 이전의 부족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발전 단계가 늦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도 문제다. 부는 인디안이나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의 부족과는 엄연하게 차이가 있는 발전된 집단이다.
4. 왕이 하나의 部長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왕의 권위를 극도로 낮추어 보는 것이 된다. 이종욱도 지적하였듯이 신라의 경우 훼부와 사훼부만이 유독 금석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왕의 동생이 다른 부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것은 부와 부간에 완전히 다른 집단간의 연합체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울진봉평비 등에서 왕과 갈문왕이 서로 다른 부의 우두머리로 나와 같이 일을 처리한다는 것등의 기록이 부체제설을 보강한다고 보는 것은 한쪽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구려의 경우 명림답부의 혁명(165년)으로 환나부와 관나부가 5나부 가운데 세력이 극도로 약해져 5나부체제가 붕괴되었다. 차대왕의 집권을 도왔던 환나부나 관나부의 역할이나, 신대왕을 옹립한 명림답부의 연나부는 부체제에서 설명하는 5부의 연맹체의 하나로서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명림답부 이후 방위명 부가 등장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치가 단순히 부와 부의 연합으로 보기 어려운 한 사건이다. 즉, 연나부는 왕실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왕실과 밀착된 세력으로 왕실을 넘볼 수는 없는 세력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2세기의 한나라처럼 고구려왕도 천자와 같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권력의 소유권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고구려 초기에 비류국왕 송양왕을 추모왕이 굴복시킨 이후에도 다물도주로 삼은 것은 분명 왕권 초기에 고구려가 세력이 강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 소노부, 연나부 등이 별도의 제사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자치적 권한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체제를 설명하는 근거는 아니다. 오히려 이들 자치적 권한을 가진 부의 우두머리들이 결국은 왕권에 복종해서 해외로 출병하며, 동맹행사에서 왕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이것은 왕이 부의 장으로서 보기보다는 이들과 한단계 다른 차원의 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나라 손권과 그 부하장군들의 관계, 유방과 그 부하들의 관계 등에서 볼 수 있는 힘의 강약에 의한 동맹적 관계보다 오히려 강고한 왕권을 보여준다.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던 197년 소노부가 공손씨에게 붙은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왕의 동생인 발기를 추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발기가 공손씨에게 가지 않았다면 소노부의 일탈행위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왕권의 영향력이 각 부에게 굉장히 강하게 미치고 있다. 이것은 부체제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왕이 部의 長이라고 나오는 문헌은 없다. 오히려 왕이 속한 부의 우두머리가 고추가로 별도로 왕과 다른 차원에서 각부의 우두머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볼 수 있다. 동방사회에서 왕이란 존재는 적어도 중국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명을 받아 지상을 통치하는 신성한 권력자로서 여타 부의 장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 대가들의 연합체라는 것은 고구려의 경우는 그와 같은 연합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또 신라의 경우도 박, 석, 김 3개성과 6부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 박, 석, 김은 왕실이며 다른 6부와는 구별되는 한단계 높은 차원의 세력집단이다. 그럼에도 신라를 6부 연합체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부체제설은 고대인명의 표기에 부명을 반드시 기록한다는 것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5세기경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고구려에서 인명앞에 부가 기록된 사례에서 보면, 이때 부는 단순한 출신지역을 나타날뿐, 그들의 집단행동을 좌우하는 부체제로 볼 수 없다. 신라의 경우 왕과 王弟가 서로 다른 부에 속하는 것은 부를 넘나들기 때문으로 부체제가 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강력한 시대적 특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7. 정치발전 과정에서 부체제를 등장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청동기사회에서 초기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각국의 성장단계를 규정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나, 그 용어가 부적당할 뿐 아니라, 그러한 설정이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장해요인이 되고 있다.
부체제로 인해 기존 사료의 해석에 역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이론이 사실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고, 종교적 권위에 의한 왕권의 신성화가 동방사회의 심리적, 혈통적 구심점이 고조선의 등장이후 형성되어온 과정에서 생성되어 왔다는 측면을 전체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즉, 1세기 논형에 등장하는 부여족의 동명성왕 신화의 경우는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이미 하늘의 명을 받아 지상에 국가를 세운 신성한 왕에 대한 믿음이 동방사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이점은 동방사회의 발전과정을 늦추는 왜곡으로 전환된다.
8. 삼국지 예전에는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동방사회에 대군장이 사라진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고조선의 멸망으로 일시 열국시대가 된 상황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상황을 꿰맞추려는 일본인의 논리가 부체제설에서도 그대로 관절되고 있다.
9. 신라가 6세기까지 부체제였다면, 고구려가 400년 내물왕을 몰아내고 실성왕을 옹립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실성왕은 이미 다른 부의 장과는 다른 차원의 왕이었다. 실성왕을 세운 고구려는 신라의 왕을 통해 신라를 복속으로 삼는다. 만약 당시 6부 연맹체의 신라였다면 고구려는 개별 부들을 하나 하나 접수해서 차지했을 것이다. 또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 실성, 눌지왕은 당연히 6부와는 차원이 다른 중앙집권 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10. 부체제의 핵심론자인 노태돈은 그의 학문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정치사연구(99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함)에서 고구려의 역사발전을 정치사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1. BC1세기~AD 3세기(봉상왕) : 초기
BC75~1세기 중반(태조대왕) - 부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주변 나들의 병합단계
태조대왕 이후 -3세기 종반부터 고유명의 부가 보이지 않는 단계
2. 4세기 ~ 6세기 중반(미천왕~안원왕) : 중기 -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
427년 평양천도가 중요한 전환
3. 6세기 중반 ~ 668년(양원왕~보장왕) : 후기 - 귀족연립정권기
642년 연개소문의 혁명이 중요한 전환
이러한 시기구분은 그의 부체제, 고대사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천왕 이전 단계를 부체제로 본 것에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미천왕 이전에 고구려는 이미 활발한 대외팽창을 이루었다. 특히 후한과의 관계는 고구려가 영역국가로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동천왕시기인 240년 이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러한 부체제는 일본인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으로 인한 고대국가의 성립단계를 낮추는 것에서 비롯하고, 김원룡의 원삼국시기 개념으로 이어졌다가, 김정배등에 의한 추장사회의 개념 정리로 전개되었다가, 현재 노태돈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배 세대에서는 최몽룡등이 인류학의 이론을 통해 고조선을 고대국가의 성립으로 보고 있음에 반해, 노태돈은 부체제로 파악하고 있다. 부체제는 분명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선행하는 단계로 비추어진다.
즉 용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고대국가의 성립을 늦게 잡아보려는 일본인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부체제가 한국고대사에서 주류로 잡아갈수록, 고구려와 신라의 초기사는 더욱 더 미궁과 수수께끼의 시대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점은 부체제가 지닌 우려할만한 점이다.
이종욱이 제기한 고대국가발전 과정 역시 몇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으나, 노태돈과 다른 합리적인 면도 많다. 그러나, 논리가 아닌 인맥에 의해 하나의 견해가 더욱 더 보강되고, 반대편의 주장은 묵살하는 풍토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잘못된 견해가 쉽게 바뀌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스승아래에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며, 제자들은 스승의 설을 무리하게 옹호하려 노력하고 그것이 자신의 연구과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더욱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