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모험 13 (외 2편)
—나의 달은 매일 운다
곽은영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라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불한당들의 모험 35
—아름다운 턱시도 고양이들은 짧은 여름밤을 우아하게 말아올린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서서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나는 너의 말을 모르고
너도 나의 말을 모르는데
너는 꼬리를 내리고
나는 물끄러미
우리 둘 사이에는
흐르는 밤이 하나
침묵이 둘
불한당들의 모험 46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 수 없어서 고유하고 외롭다
까마귀가 반짝이는 거울을 모아가듯
시간의 기류를 타고
나는 두 발의 컴퍼스로 지도를 그려갔다
태양의 위도와 바람의 경도가 만나는 점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지
그늘을 받아먹던 흰 벽에 누런 응달 자국이 앉을 무렵 지도는 그려질 줄 알았어
자오선은 길게 펼쳐졌는데
당신이 여기 있어도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 사이에
희멀건 강이 눈부시게 흘렀다
강은 언제나 저만큼 웅크려 있다가 나의 다가섬만큼 모양이 변했다
경계를 나누기 힘든 햇살처럼
강은 측량하기 곤란한 빈칸
우연 같은 위도와 필연 같은 경도가 내게서 만나는데
당신은
당신의 자오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
침착해서 서글픈 물결을 이기고
돋보기로 모은 태양점처럼 희멀건 강을 분홍코끼리 한 마리가 건너가길 바랐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어서 그릴 수 없는 길고 깊은 강과 마주섰다
당신은 잠깐 고개를 들었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
비극의 첫 페이지가 무난하게 시작하듯
무심한 강은 눈부시게 흘렀다
탐 다오 탐 다오 코끼리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시집『불한당들의 모험』(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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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영 / 1975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교육학과와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검은 고양이 흰 개』『불한당들의 모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