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야구장 안으로 소주병이 날아 들어오고 난리다.
숫제 웃옷을 벗어 버린 두 청년은 114M 외야석에서 구장으로 뛰어 내린다.
라디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혀를 차면서, 중계하고 훈계하고 경고한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연장입니다. 학생 야구에 성인들이 저런단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삽니다. 스포츠 정신이란 게 뭡니까? 룰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아닙니까? 네네, 그렇습니다. 경기는 일단 중단됐읍니다만, 아 지금 경비원들이 외야 쪽으로 가고 있군요.”
주심에게 항의하러, 외야 쪽에서 홈으로 달려 들어온 한 휴가병은, 전경 경비대에 그대로 안긴 채 들려 나간다.
관중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장내 방송 여자 아나운서가 싸나운 음성으로 계속 꾸짖어대고 있다.
“파울선에 내려와 있는 분들도 빨리 나가 주세요!”
다시 남자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慶北高-光州一高, 숙명의 격돌’이라고, 정말 대문짝만하게 ‘미다시’를 뽑은 ‘日刊스포츠’로 모자를 만들어 李 선배와 나는 하나씩 머리에 썼다.
李 선배와 나는 안타 하나에 딱 한 잔씩만 하기로 한 소주를 공평하게 다 마셔버렸다.
“아마, 제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다 저런 사람들이었을 거야.”
- 황지우 시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 문학과 지성사) 중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에서 앞부분 발췌 인용.
황지우 시인의 이 시는 아마도 고교야구가 성행했던 1970년대 5월의 어느 날 고교야구가 열리고 있던 야구장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암울한 세상, 출구가 좀체 보이지 않던 그 시절 사람들은 야구장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울화를 풀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야구장 관중들의 속 풀이는,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에도 쭈욱~ 계속된다.
아, 경기 ‘보이콧’이라니
1989년 7월 13일, 듣도 보도 못한 경기보이콧 소동이 벌어졌다.
MBC 청룡은 7월 12일 잠실구장 해태 타이거즈전에서 빚어진 판정시비로 인해 관중 소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13일 상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경기(13일 저녁 해태전) 취소 신청서를 제출했다.
관중 난동을 걱정한 나머지 경기를 아예 치르지 못하겠다고 취소 요청을 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 그 이전도, 그 이후에도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당시 <일간스포츠>의 보도를 요약하면, MBC 구단은 경기취소 신청서에 ‘12일 해태전의 경기 후에 일어난 관중 소란은 전적으로 남창희 구심의 판정 실수로 인한 것이다. 같은 심판이 13일에도 계속 출장하는 상황에서는 13일 경기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12일 경기가 어쨌기에 MBC 구단이 그 같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일까.
12일 경기의 판정 시비는 9회 말에 불거졌다. MBC가 1-2, 한 점 차로 뒤져 있던 9회 말 2사 2루에서 윤덕규가 좌전안타를 날렸다. 2루 주자 민경삼이 득달같이 달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파고들었으나 남창희 주심이 아웃을 선언했다. 그 대목이 미묘했다.
남창희 주심은 해태 좌익수 김평호의 송구를 받은 포수 장채근의 태그가 민경삼 주자가 손으로 홈플레이트를 짚은 것보다 빨랐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MBC 측은 그 반대로 보고 남창희 주심의 아웃선언이 부당하다고 여겨 배성서 감독이 덕 아웃에서 뛰쳐나와 강하게 항의했다.
동점 기회를 날리게 된 배성서 감독이 남창희 주심을 밀치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일부 흥분한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어지러운 상황으로 돌변했다.
당시 조광식(고인) MBC 상무는 “남창희 주심이 우리 구단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 일이 한두 번 아니다. 5월 14일 삼성전(대구)에서도 4회에 신언호의 스퀴즈번트로 3루 주자 서효인이 홈으로 들어왔지만 아웃으로 판정하는 바람에 3-4로 역전패 당한 일이 있다”면서 특정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을 지적했다.
소동은 경기 후 잠실구장 밖에서도 계속됐다. 판정에 불만을 품은 MBC 응원 관중들이 본부석 출입구로 몰려가 남창희 심판을 찾으며 내려져 있던 셔터를 흔들어 대며 대형유리창 3장을 깼고 기물을 파손시키는 등 소란을 피웠다.
MBC 구단은 5월 13일치 <일간스포츠> 1면에 실린 사진과 MBC TV가 녹화한 문제의 장면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완벽한 세이프’라고 주장했다. MBC 측의 취소요청 공문을 접수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3일 오후 긴급 대책을 숙의했다.
그 사이 MBC 구단측과 KBO가 물밑 접촉에 나섰다. 13일 오후 이웅희 KBO 총재와 이건영 MBC 청룡 사장이 KBO 총재실에서 회동, 서로 유감을 표명하고 ‘아웃, 세이프는 심판의 고유권한이다. 그로 인한 경기 취소 불상사는 피해야한다’는 데 공감, MBC 구단이 결국 5시간만에 취소신청서를 철회했다. 일과성 소동이었지만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가 심판 판정을 둘러싸고 얼마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게한 사건이었다.
당시 박현식(고인) KBO 심판위원장은 “심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 할 수도 있다. 그런 문제로 (심판에게) 징계를 줄 수는 없다. 다만 벌점을 매겨 연봉산정 때 참고하겠다”고 무마했다. 남창희 심판은 13일 경기 때는 좌익 선심으로 출장했다.
MBC 청룡, 럭키금성에 매각 …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한국 프로야구 창립 구단이었던 MBC 청룡은 그해 시즌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8년 황선필 구단주 시절부터 매각설이 나돌았던 MBC 구단은 12월 14일 럭키금성에 매각됐다. 매각조건은 럭키금성이 구단 양도금 100억 원을 MBC에 3년6개월 동안 분할 상환하고 그와 별도로 협찬금 명목으로 30억 원을 주기로 해 총액 130억 원 규모로 정리한 것이다. MBC는 매각 발표 한 달 뒤인 1990년 1월 18일에 공식적으로 럭키금성과의 구단 양수양도서에 서명했다. 1982년 1월 26일에 창단했던 MBC 청룡이 8주년 기념일을 불과 일주일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MBC의 매각은 3년간 계속된 성적 부진과 모기업인 MBC 방송의 자금압박으로 인한 구단 운영의 어려움과 공영방송이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명분이 약하다는 노조 측의 압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두 손을 들어버렸다. MBC는
MBC는 팀 매각에 앞서 시즌을 마친 뒤 11월 7일 원년(1982년) 감독이었던 백인천을 배성서 감독의 후임으로 선임했다. 백인천 감독은 1990년 LG 트윈스로 새 단장한 팀을 이끌어 첫 우승을 일궈냈다.